658. 전향 (7)
(1900)전향-13
핸드폰이 진동을 했으므로 조철봉은 집어들고 발신자 번호부터 보았다.
외국이다.
그러나 중국인지 베트남인지는 알 수 없었고 번호도 물론 모른다.
핸드폰을 귀에 붙이면서 조철봉은 벽시계를 보았다.
오후 네시반이다.
“여보세요.”
응답하자 이초쯤 후에 수화구에서 여자 목소리가 울렸다.
“나야.”
그것이 장선옥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 때까지 다시 이초쯤 걸렸다.
긴장한 조철봉의 몸이 굳어졌다.
그러나 인사는 했다.
“응, 그래. 잘 있었어?”
베이징을 떠난 지 이주일이 넘었다.
보름쯤 되는 기간에 조철봉은 장선옥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그쪽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지나면 다 잊어지게 된다.
그 중 인간관계는 틀림없다.
시간이 지나도 컴퓨터처럼 클릭 한 번에 다 떠오른다면 살아남을 인간은 없다.
배겨내지 못한다. 미치거나 자살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슬슬 잊어지고 있던 장선옥이 번쩍 떠올랐지만 큰 충격은 아니었다.
많이 무뎌졌다.
그때 장선옥이 입을 열었다.
“여기 태국이야.”
“태국?”
이맛살을 찌푸린 조철봉의 머릿속에는 잠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태국에 일 때문에 간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어, 그래? 일하러 간 거야?”
“아니, 나 몰래 나왔어.”
그 순간 긴장한 조철봉이 입안의 침을 삼켰다.
“몰래 나오다니? 무슨 말이야?”
“이걸 뭐라고 하지?
남한에서는 탈북이라고 하나?”
장선옥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띠어져 있었으므로 조철봉은 호흡을 골라야 했다.
“이봐, 지금 장난하는 거야? 뭐야?”
조철봉이 거칠게 물었을 때 장선옥이 대답했다.
“도망쳐 나온 거야. 북조선을 떠난 것이라구. 망명을 해 온 셈인데.”
차분한 목소리로 장선옥이 말을 이었다.
“망명 신청을 하려고 해.”
“어, 어디로? 한국 대사관쪽에 내가 말해 놓을까?
가만, 내가 여기서 손을 쓸 테니까 말이야, 거기….”
“잠깐만.”
허둥대는 조철봉의 말을 장선옥이 막았다. 목소리가 더 가라앉아 있었다.
“엉뚱한 생각 마. 한국 대사관에 갈 생각 없어.”
“아니 왜?”
“왜라니? 아마 내 문제 갖고 공무원들이 골을 싸매고 몇날 며칠을 허둥댈 텐데,
내가 어떻게 기다려? 이른바 찬밥 신세가 되어서 말이야.”
“…….”
“한국 대사관에서 탈북자들을 귀찮아하고 무시한다는 말 못들었어?”
“그거야 일부 직원이 그랬지. 그리고 너는 달라.”
“다르긴 뭐가 달라? 더 골치 아픈 존재가 될 텐데.”
하더니 장선옥이 목소리를 낮췄다.
“미국 대사관에 갈 거야. 그래야 서로 편해져.”
“그, 그럼 뭐 필요한 거 없어? 돈이라도.”
“베이징에서 나올 때 몇백불 갖고 나왔으니까 당분간은….”
“가만, 너 거기 어디야? 내가 지금 당장 그리로 갈게.”
다시 벽시계를 본 조철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국까지 비행기로 여섯시간쯤 걸릴 것이다.
지금 인천 공항에 나가면 비행기를 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장선옥이 말했다.
“아냐, 나, 지금 미국 대사관에 갈 거야.”
(1901)전향-14
조철봉이 카바레를 좋아한다고 이강준은 약속 장소를 지난번에 만났던 ‘대지’로 정했다.
이번에는 룸에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조철봉은 혼자 와 룸에서 기다렸다.
저녁 8시였으므로 카바레는 아직 이른 시간이다.
카바레는 9시 반이 되어야 물이 오르기 시작해서 10시 반경이 피크이고
그 후부터는 안정이 된다.
무슨 말인고 하면 10시 반쯤 되면 선남선녀들이 제각기 다 짝을 짓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분위기가 안정된다.
그때까지 파트너를 못 찾은 선남선녀는 늦게 입장한 손님들을 노리지만 별무신통이다.
늦게 입장하신 분들치고 변변한 인물이 드문 것이 통례이기 때문이다.
저녁 먹다가 소주에 취해서 오시는 분,
다른 곳을 돌다가 재미를 못 보고 오시는 분들에다 뜨내기까지 섞여서
이때 오신 분들은 웨이터들한테 대접도 못 받는다.
조철봉은 약속 시간 15분 전에 와서 기다렸는데 그동안 웨이터가 세 번 다녀갔다.
미리 술상을 차려놓은 터라 술도 따라주면서 오늘 밤의 기상예보를 착실하게 해준 것이다.
예를 들면 단골 여자 손님인 누구누구가 올 것이며 어떤 스타일이라는 등,
또 누구누구는 즉석이 가능하며 영계도 대령시킬 수가 있다는 등의 예보였다.
이강준은 8시 정각에 방 안으로 들어섰는데 웃음 띤 얼굴이었다.
자리에 앉은 이강준이 금방 본론을 꺼내었다.
“장선옥씨는 방콕 주재 미국 대사관에 있습니다.
우리 연락을 받은 미 대사관 측도 흥분하더군요.
장선옥씨는 꽤 거물급인 데다 여자거든요.”
이강준이 활기 띤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자료를 다 넘겨줬습니다.”
“그럼 장선옥씨는.”
정색한 조철봉이 이강준을 보았다.
“미국으로 가는 겁니까?”
“미국 정부는 장선옥씨 망명을 받아들일 겁니다.
아마 거기서 바로 미국으로 가겠지요.”
“그렇군요.”
“만나 보시려면 조 사장님이 미국으로 가시면 됩니다.”
머리를 든 조철봉은 이강준의 웃음 띤 얼굴을 보았다.
장선옥과 통화를 끝내고 나서 바로 이강준에게 상황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이강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시더니 곧 정색하고 말했다.
“장선옥씨가 잘 선택한 겁니다.
미국 정부에 망명을 하게 되면 남은 가족들에 대해서 어렵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곧 북·미 수교가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
“전향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장선옥씨처럼 어렸을 적부터 이념 무장이 된 사회 지도층 인사가 말이죠.”
빈 술잔을 당긴 이강준이 위스키를 따르면서 말했다.
“장선옥씨는 엄청난 용기와 의지가 필요했을 겁니다.
더욱이 북에 가족까지 있는 상태에서 말입니다.”
“결국은.”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조철봉이 커다랗고 길게 숨을 뱉었다.
“전향했구먼.”
“자, 한잔하십시다.”
술잔을 든 이강준이 생기 띤 눈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나는 자세히 모르지만 장선옥이 기밀문건을 꽤 가져온 것 같습니다.
미국 측이 그것 때문에 더 흥분하고 있어요.”
“영업 담당이 되었다더니.”
한 모금 위스키를 삼킨 조철봉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첫 오더를 크게 했구먼.”
그러나 표정은 가라앉아 있어서 이강준은 웃으려다가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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