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6. 남북동거(10)
(1856)남북동거-19
셋이 식당을 나왔을 때는 밤 10시 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저, 집에 약속이 있어서.”
식당 앞에서 손목시계를 보는 시늉을 하고 최갑중이 말했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그러고는 조철봉의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돌리더니 건성으로 이경애에게 인사했다.
“그럼 미스 리, 내일 봐.”
조철봉은 가만히 서 있었고 이경애는 주춤거렸지만 갑중은 순식간에 뒷모습을 보이며
멀어졌다.
제법 산뜻한 마무리였다.
조철봉이 이경애의 옆으로 다가가 섰다.
“저놈은 우리 둘 사이를 알아.”
앞쪽을 향한 채 조철봉이 말하자 이경애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우리 둘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시려는 것 같은데, 오버하신 것 아녜요?”
“천만에, 마음에 쏙 드는 행동을 했어.”
“그럼 오늘 외박하셔도 되는 건가요?”
“외박이라니?”
눈을 둥그렇게 뜬 조철봉이 이경애의 앞으로 바짝 다가가 섰다.
거리의 불빛은 환했지만 이경애의 얼굴은 그늘에 덮였다.
대신에 생기를 띤 눈동자가 반짝였다.
“집에 안 들어가도 되시느냐고요.”
이경애가 한 마디씩 또박또박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여기서 주춤거리면 망한다.
어디 한두 번 겪은 일인가?
더구나 장선옥과의 동거는 정식 관계도 아닌 데다가 이경애는
거기에서 한 계단 더 멀어져 있다.
자, 오리발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차를 타자고.”
이경애의 팔을 쥔 조철봉이 택시 정류장으로 다가갔다.
차는 이미 보낸 것이다.
“괜찮은 호텔로 가자. 안내해.”
“정말 괜찮으세요?”
하면서도 이경애는 택시를 세우더니
조철봉을 태우고 저는 예의바르게 나중에 탔다.
그러고는 운전사에게 중국어로 목적지를 말해 주더니 조철봉을 보았다.
“사장님 여자 있는 줄 알고 있어요.”
“어? 누가 그래?”
조철봉이 정색하고 묻자 이경애는 눈웃음을 쳤다.
“제 육감이죠. 누가 뭐라고 한 사람은 없어요.”
“육감을 믿어?”
“네. 하지만 사장님한테 전혀 부담드리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까 신경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건 고맙지만.”
“오늘 늦더라도 돌아가세요. 제가 돌려보내 드릴게요.”
하더니 다시 눈웃음을 쳤다.
“그래요. 한 번만 하고 가세요.”
“이런.”
중국인 운전사여서 이경애는 마음 놓고 한국어로 그렇게 말했지만
스스로 뱉고 나자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머리를 반대편으로 돌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택시가 곧 호텔 현관 앞에서 멈춰섰는데 조철봉은 처음 와본 곳이었다.
그러나 택시에서 내린 이경애는 거침없이 행동했다.
제가 프런트로 가더니 계산을 하고 키를 받아들고는 앞장을 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에서 내려 방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 이경애가
조철봉을 끌고 온 것처럼 되었다.
“저, 먼저 씻을까요?”
방 안의 불을 켠 이경애가 재킷 단추를 풀면서 물었다.
“아니면 그냥 하실래요?”
그러자 조철봉이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이봐, 서둘지마. 나, 여기서 잘 테니까.”
(1857)남북동거-20
베란다 밖으로 보이는 베이징시의 야경은 그야말로 휘황찬란했다.
거대한 중국의 경제 성장을 보여주는 것 같다.
창가의 의자에 앉은 조철봉이 야경을 보면서 가슴이 서늘해지는 감회가 일어났다.
무거운 느낌이다. 서운하고 화도 난다.
중국은 10여년 동안 무서운 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시행착오도 일부 일어났고 부정부패도 있었지만 그야말로 민관이 합심하여 이룬 성과일 것이다.
이제 중국 경제는 아시아는 물론이고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할 만큼 되었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그 대답은 삼척동자라도 안다.
국민의 활력이 그렇게 만들었다.
하겠다는 의욕, 이루겠다는 의지, 잘 살아 보겠다는 꿈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이념이나 조직, 경제 계획 따위는 부수적인 문제일 뿐이다.
지도자들의 확고한 신념이 있었고 국민이 호응한 때문이다.
10년 전만해도 아시아의 용이라고 자처하면서 오만했던 한국은 어떤가?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아직도 기회는 있는 것이다.
늦지 않았다.
갈길도 멀고 험하지만 한국인이 누구인가?
북괴의 6·25 남침으로 폐허가 된 강산을 바탕으로 세계 최빈국 중의 하나에서
30여년 만에 일약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민족이다.
이 자긍심은 어떤 것과도 바꿀 수가 없다.
세계 역사상 이런 민족이, 이런 국가가 없었다.
이 찬란한 업적을 비하하고 업신여긴다는 것은 제 부모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이나 같다.
“뭐 하세요?”
뒤에서 불렀으므로 조철봉은 머리를 돌렸다.
침대에서 상반신을 일으킨 이경애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의 불을 꺼놓아서 이경애의 몸에 창밖 네온사인의 불빛이 반사되었다.
온몸이 푸른색으로 덮였다가 금방 붉은색 글자가 얼굴에 씌어지더니 사라졌다.
“먼저 자.”
했지만 이경애가 몸을 일으키더니 알몸에 가운을 찾아 걸치고는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이제 둘은 나란히 앉아 창밖의 야경을 본다.
새벽 두시반, 방안에는 아직도 비리고 덥고 달콤한 기운이 가셔지지 않았다.
조철봉에게는 나른하면서도 개운한 순간이다.
“무슨 생각을 하세요?”
이경애가 부드럽게 물었다.
조철봉이 비록 장선옥하고는 동거를 하고 있지만 서로 신뢰하는 비중을 놓고 따진다면
아마 이경애 쪽이 더 무거울 것이었다.
비밀을 공유하는 깊이가 깊을수록 그만큼 당연히 의심의 정도도 비례한다.
이것이 사기꾼에서 출세한 조철봉의 지론이다.
따라서 이경애한테는 공유한 비밀이 거의 없었고
그만큼 자연스러운 관계라고 볼 수 있었다.
자연스러운 관계에서 신뢰가 쌓이는 것이다.
이경애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난 처음부터 남북한 합자사업의 목적이나 의미 따위는 관심이 없었어.
오직 이 사업을 이용해서 한몫 챙길 작정이었지.”
긴장한 이경애가 눈만 크게 떴고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그랬더니 내 약점을 안 남북한 양국에서 날 이용하려고 들었고 나는 또.”
조철봉이 이경애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그들하고 손발을 맞춰서 내 입장을 굳히게 되었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돼?”
“조금요.”
외면한 채 대답한 이경애를 향해 조철봉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런데 이제 공사 현장에서 남북한 실무자들까지 해 처먹는 상황이 일어나고 있어.
윗물이 더러워서 그런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나갔다가는 다 망하게 될 거야.
이건 남북한 당국도 예상하지 못한 일인 것 같단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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