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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장 호각세(互角勢) 3

오늘의 쉼터 2014. 9. 30. 11:11

제21장 호각세(互角勢) 3

 

 

 

 

소천이 용무도 잊은 채 고봉으로 떠온 밥을 다 먹을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희희낙락 노닥거리다가

 

장미가 밥솥을 긁어 끓인 숭늉 한 사발까지 말끔히 비운 연후에야 별채 쪽을 훔쳐보며,

“어따, 옷 입고 나오는데 무슨 놈의 시간이 이리 더딘가 모르겠네.

 

좌우간 우리 도련님이 마음잡고 한번 늘어졌다 하면 명 짧은 놈은 기다리다 지쳐 죽을 거야.”

하고 푸념을 하였다.

 

소천의 흉보는 소리를 듣기라도 했는지 별채 쪽에서 당장 큰기침 소리가 나더니,

“소천이가 왔다고?”

하며 유신이 나타났는데,

 

그 행색이 잠자던 옷차림 그대로인 데다 얼굴은 간밤에 마신 술기운 탓인지

 

 아직도 군데군데 붉은 기운이 남아 있었다.

“어이쿠, 얼마나 마셨으면 지금도 술내가 등천이오.”

소천이 잠시 코를 싸쥐는 시늉을 하였다가,

“나라에 난리가 난 것은 알고 계십니까?”

했더니 유신이 무덤덤한 얼굴로,

“난리라니, 무슨 난리가 났느냐?”

하고 되묻는 품이 소천이 보기에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듯하였다.

 

소천이 저는 아는 것을 유신이 모르니 신이 나서 말이 바빴다.

 

소천의 말을 듣는 유신의 안색이 점차 흙빛으로 변해갔다.

 

소천이 말하는 사이마다,

“난리 난 지가 언젠데 여태 그걸 모르고 계십니까?”

“하긴 이런 곳에 들어앉아 주야장천 신선 놀음에 빠져 지내면 난리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이 나도 모르긴 모르겠소.”

“내가 너무 빨리 왔나? 박가, 석가가 왕이 되고 나거든 올 걸 그랬지.”

하며 면박을 주었으나 딴 때 같으면 실없는 소리 그만 하라는 불호령이 떨어질 법도 하련만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소천이 보니 농담조차 하지 못할 만치 크게 놀라고 당황한 듯싶었다.

 

특히 외주 군주들이 군사를 원조하지 아니하여 서형산성 진채가 비탄에 잠겨 있다는 말을 옮길 때는

 

유신의 안색이 하얗게 변하고 볼에 살점마저 가볍게 떨렸다.

 

뒤이어 선도산에서 서현이 급하게 찾는다는 말과, 도성의 문이란 문에는 병부 군사들이

 

개미 떼처럼 깔려 출입하는 사람을 일일이 훑어보는데,

 

그 까닭이 덕만 공주와 용춘의 식솔들에게 내린 수배령 때문이라는 말까지 다 듣고 난 유신은

 

별안간 소천의 행색을 눈여겨 살피더니,

“옷을 벗어라.”

다짜고짜 하는 말이 그랬다.

 

소천이 처음엔 무슨 말인지를 몰라,

“네?”

하고 묻자 유신이 다시,

“냉큼 옷을 벗으라지 않니?”

하며 소리쳤다.

 

소천이 익히 아는 그 서슬에 자초지종을 묻지 못하고 급하게 저고리를 벗어주니

 

유신이 한 손으로 옷을 받아 쥐며,

“급하다! 바지도 벗고 견포 복두와 신도 벗어라!”

하고 재촉하였다.

 

엉겁결에 소천은 유신이 말한 것들을 다 벗었다.

 

유신은 소천의 옷을 벗어주는 족족 받아 입었는데,

 

소천도 작은 체구는 아니었지만 유신이 워낙 큰 사람이라 품은 미어질 듯하고,

 

소매는 짧아 팔을 걷어붙인 듯했으며, 바지 끝도 종아리가 죄 드러날 만치 강동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신은 소천의 옷으로 빈틈없는 범골이 되더니,

“선도산으로 돌아가 있거라. 나도 재주껏 뒤따라가마.”

말을 마치자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부리나케 사라졌다.

달랑 속옷만을 남긴 채 벌거숭이가 된 소천이 그때서야 자신의 몰풍스런 입성을 내려다보며,

“이런 꼴로 어떻게 선도산에를 돌아가?”

하고 난감해서 섰는데 망신살이 뻗치려고 그랬는지 대문 여닫는 소리를 들은 주인아씨와 장미가

 

동시에 안에서 달려 나왔다가,

“에그, 흉물스러워!”

장미는 속옷바람의 소천을 보는 순간 안색이 홍변하여 부엌으로 달아나고,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처럼 되었는가?”

주인아씨는 고개를 외로 돌리고 웃음을 머금었다.

 

소천이 황급히 툇마루로 뛰어올라 기둥에 가까스로 몸을 숨긴 뒤,

“아씨, 집에 남자 옷이 있거든 한 벌만 내어주십시오.

 

소인이 상전을 잘못 만나 보시다시피 오그랑바가지 꼴이 되었습니다요.”

“집에 남자가 있어야 남자 옷이 있지. 도련님 벗어놓고 간 진골 옷은 한 벌 있네.”

“진골 옷은 백 벌이 있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걸 입고 나갔다가 병부 순라한테 붙들리면 무슨 봉변을 당하라구요.”

“그럼 어떡하지? 흥륜사에 아는 스님이 있으니 가서 승복이라도 한 벌 얻어 볼까?”

“어이쿠, 고만 놀리십쇼. 집에서 부리는 하인 옷이라도 좋습니다.”

“하인 옷을 자네가 어찌 입으려구?”

“부탁합니다요. 하인 옷 한 벌이면 지금 소인에겐 천금보다 더 중하고 귀하지요.”

소천의 간곡한 부탁에 주인아씨는 몇 번이나 혼자 소리 높여 웃다가,

“가만있어 보게. 옷을 주려는 하인이 있을까 모르겠네.”

하고는 뒤채로 사라졌다. 옷을 구하는 동안 소천이 기둥 뒤에 숨어 생각하니

 

죄도 없이 당하는 봉변이 곱씹을수록 기가 찬데,

 

무엇보다 점잖게 수작을 걸어놓은 장미한테 한순간 체통과 위신을 잃어버린 것이

 

뼈에 사무치도록 가슴 아파,

“간밤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니 내가 이런 꼴을 당하려고 선도산에서 그처럼 허겁지겁 달려왔나.

 

뒤에 죽을 고비 있으면 앞일이 잘 풀린다더니 아까 얻어먹은 밥맛이 유난히 달더라.

 

누구는 더러 상전 덕도 본다던데 저놈의 상전은 어째서 허구한 날 욕만 보이나 그래?

 

혀가 만발이나 빠지게 달려와서 기껏 만난 것이 벌거숭이에 개망신이라니……”

시종 투덜거리며 상전과 일진을 싸잡아 원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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