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20장 인물 32

오늘의 쉼터 2014. 9. 29. 15:17

제20장 인물 32

 

 

 

 

알천이 변복으로 신분을 속이고 용춘의 집에 당도했을 때는 삼경도 넘어선 깊은 밤중이었다.

 

이때 사량부 용춘의 집에는 주인 부자(父子)와 시위부의 장군들인 염장, 천림(泉林), 재량(才良) 등이

 

모여 있었고, 서현도 사위인 춘추가 모셔와 막 자리를 잡고 앉은 터였다.

 

이들은 백정왕이 필시 시해되었을 거라 추측하고 차후의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럴 무렵 숨을 헐떡거리며 나타난 알천은 대궁 후문에서 원복을 죽인 일과 덕만 공주를

 

무사히 빼내 자장의 절에 모신 경위를 대강 설명했다.

 

그러잖아도 삼도대감 구평이 덕만 공주를 모셔오지 않아 한창 걱정에 사로잡혔던 사람들은

 

저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알천을 칭찬했다.

“자네가 들어 계림의 7백 년 사직을 구하였네. 장하이.”

용춘도 몹시 흔쾌한 낯으로 알천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나 문제는 뒷일이었다.

 

덕만 공주가 무사하다는 것은 장차 그를 임금으로 추대할 근거가 되었고,

 

대의명분을 논함에도 임금을 시해한 불충한 자에게 보위가 흘러가는 것을 막는

 

중요한 구실이 될 수 있었지만, 3궁을 비롯한 도성 전체가 이미 백반의 수중에 들어간 이상

 

무슨 수로 어떻게 대적해야 할지 엄두가 서지 않았다.

 

자칫 대궐을 점령한 백반이 허전관령으로 만조의 백관들을 소집하고 노쇠한 선왕이

 

천수를 마친 것처럼 꾸민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중신들은 그런 줄만 알 것이요,

 

형식적으로 화백을 열고 경사의 귀족들과 왕실 족친들의 추인을 받아 즉위식이라도 거행한다면

 

이에 반대하는 자신들이 오히려 역적으로 내몰릴 위험마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성 3궁을 속수무책으로 병부에 뺏긴 것은 실로 통탄할 노릇이었다.

“흰 개가 드디어 궁궐 담장 위로 올라갔구려.

 

아, 이는 모두가 나의 불찰이외다.

 

백반이란 작자의 본바탕이 자신의 숙부를 극약으로 독살할 만큼 끔찍한 위인임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차마 선왕의 생전에 또다시 찬학까지 저질러가며

 

반역을 꾀할 줄은 정말 몰랐소.

 

중국에선 더러 보위를 탐내어 부형을 살해하는 경우도 있다더니

 

유서 깊은 내 나라 왕실에서 이런 금수 같은 일이 거푸 일어날 줄 누가 알았으리.

 

아아, 결국은 내가 백반을 몰랐던 게요!”


용춘이 차탄을 금치 못하자 서현이 나서서 말했다.

“백반은 임금을 시해한 역적의 수괴요,

 

병부령 칠숙과 염종은 왕명도 없이 군사를 함부로 움직였으니

 

이 또한 간적(姦賊)들이오.

 

따라서 도성 전체가 적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나 진배없소.

 

이번 역모에 동원된 병부 군사가 대략 5만쯤 되니

 

우리는 군사 5만의 적국을 상대한다고 생각하면 크게 무리가 없을 듯하오.

 

그런데 적이 장악한 도성은 압량주와 일선주, 하주와 금관주의 땅들로 둘러싸였고,

 

4주의 군사들을 모두 합친다면 10만은 너끈할 것이오.

 

게다가 지난번 백제에 거타 6성을 잃고 거타주 일원에 배정한 군사가 7, 8만은 되니

 

이들까지 규합한다면 도성의 5만 적군이 무슨 문제가 되겠소?”

서현은 품에 지니고 온 지도를 펴놓고 전장에 나간 장수처럼 형세를 소상히 설명했다.

“문제는 외지 군주들이 과연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달렸소.

 

하주와 금관주의 군주는 두 사람 다 나와 막역지간이니

 

내가 가서 사정을 설명한다면 쉽게 원군을 내어 도울 것이오.”

서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찬 염장이 거들었다.

“거타주에는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군주 조진(朴詔眞)이 저의 외숙이올시다.”

침울하던 좌중에 한줄기 서광이 비치고 사람들의 얼굴에도 생기가 돌았다.

“외주에서 군사를 얻을 수만 있으면 승산이 있소.

 

도성을 겹겹이 포위해 시일을 끌며 백반의 소행을 만천하에 알린다면

 

조정 중신들 가운데도 동요할 이가 적잖을 것이외다.

 

그럼 자중지란이나 내응을 기대할 수도 있는 일이오.”

용춘이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자 삼도 장군인 일길찬 천림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북적이나 서적이 그런 사실을 알고 군사를 내어 쳐들어오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안팎으로 전쟁을 치러야 할 판이니

 

임금이 시해당한 사실을 함부로 퍼뜨릴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천림은 일선주 군주를 지내다 임지에서 죽은 일부(金日夫)의 아들이자

 

병부령을 지낸 후직의 손자인데, 어머니가 진골이 아니어서 신분이 6두품에 불과했다.

 

천림이 기운도 좋고 머리도 비상하여 만군을 거느릴 장수의 재목으로 손색이 없었으나

 

오로지 백반에게 밉보인 일부를 아버지로 둔 탓에 오래 등관하지 못하다가 용춘이 출각한 뒤에야

 

시위부의 항(項)이 되었고, 삼도 군사를 잘 다스린 공으로 마침내 장군의 지위에까지 승차해 있었다.

“천림공의 말씀이 옳습니다.

 

도성을 포위하고 소문을 안으로만 내야지 만일 외지로 말이 샌다면 양적에게 침략의 빌미가

 

될 게 분명합니다.”

재량 역시 천림과 뜻이 같았다.

 

그때 침묵하고 있던 김춘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의 소견으론 양적의 일은 당분간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듯합니다.”

“어찌하여 그렇느냐?”

용춘이 반문하자 춘추가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서적 백제는 작년 여름 한재가 심해 한해 농사를 크게 망쳤습니다.

 

그 바람에 사비의 궁궐 수리를 핑계로 웅진에 주둔해온 부여장이 왕명으로

 

도성 역사를 중지하게 하고 급히 환도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고구려 역시 지금은 길이가 천여 리나 되는 장성 축조에 급급해 군사를 낼 형편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얼마 전 저에게 다녀간 당나라 사람의 말을 들어보니 당주가 살수전에서 죽은

 

수나라 전사자(戰死者)의 일을 거론하는 바람에 양국 사신이 한창 뻔질나게 오가는 중이라고 합니다.

 

고구려 조정은 그 일로 신경이 곤두서서 다른 일은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양적이 모두 바깥일에 관심을 둘 때가 아니니 실로 천행이라 생각합니다.”

춘추는 평소에도 당나라 사람들과 왕래가 잦았다.

 

고구려의 낭비성을 친 직후 덕만 공주의 심부름으로 당을 다녀온 뒤로도 장안에서 사귄 벗이라며

 

여러 사람들이 다녀갔고, 해가 바뀔 때는 당조의 중신은 물론 이세민이 보낸 칙사까지도

 

춘추의 집을 찾곤 했다.

 

용춘은 자신보다 아들을 찾아오는 손님이 점점 늘어나자,

“이제 이 집의 주인도 바뀌어야겠다.”

하고서 별당을 춘추에게 내주고 따로 출입하는 문을 만들어준 일까지 있었다.

“장안에 있으면 천하가 한눈에 보인다더니

 

네가 당인들과 깊이 사귀면서 양적의 사정을 마치 손바닥 보듯 꿰고 있구나.”

용춘은 그윽한 눈길로 아들을 바라보고 나서,

“하면 서현공과 염장공은 날이 밝기 전에 일을 서둘러주오.

 

우리는 해가 뜨는 대로 궐 안의 사정을 알아보고

 

덕만 공주를 모셔와 임시로 거처할 곳을 알아보겠소.”

하여 서현과 염장은 외주 군주를 설득하러 길을 떠나고,

 

 나머지 사람들은 덕만을 옹립하고 역적들과 싸울 장소를 물색하느라

 

동이 틀 때까지 의견들이 분분하였다.

 

건밤을 꼴딱 지샌 치열한 공론 끝에도 마땅한 장소를 구하지 못하자 알천이 말하기를,

“제가 선도산 서남쪽 자장 스님의 절을 가보았는데 밤이라 지형을 자세히 살펴본 것은 아니지만

 

뒤로 야산과 둔덕이 있고 옆으로는 개천이 흐르는 데다 지세가 평평하고 수목이 울창하여

 

동북간의 서형산성을 의지한다면 능히 한 진채를 꾸밀 만했습니다.”

하고서,

“남천(南川:형산강)과 서천(西川)을 경계로 삼고 서형산성에서 간적들과 대치한다면

 

도성을 군박하기에도 제격일 듯합니다.”

의견을 내니 재량이 즉각 찬동하며,

“낮에 보아도 알천공의 말과 같습니다.”

하고서 자장이 자신의 손아래 처남인 것과,

 

그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전원을 헐어 절을 지을 때 자신이 세 아들을 데려가서 공역 거든

 

일을 자랑을 섞어가며 설명하였다.

 

재량까지 알천이 말한 곳을 추천하자 용춘은 드디어 단안을 내렸다.

“선도산은 나라의 삼사(三祀)를 받들어온 계림의 진산일 뿐더러 신모(神母)가 사는 신령한 곳이니

 

그곳을 의지한다면 반드시 무도한 간적의 무리를 일거에 토벌할 수 있을 게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족친을 살해하고 임금을 시해한 희대의 미치광이를 지하에 계신

 

열성조의 넋이 어찌 용납하겠소? 필경 우리가 놀랄 만한 선계의 감응과 음부(陰府)의

 

도움이 있을 것이니 모두 마음을 굳건히 가지고 그쪽으로 갑시다.”

이들은 날이 밝는 대로 도성 안의 식솔들을 모두 거느리고 덕만이 있는 자장의 절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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