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장 인물 20
조금 있으려니 고구려 진채에서 장수 하나가 말을 타고 달려나와 고래고래 악을 쓰며
부아를 돋우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아버님께 잠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장수들이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논의하던 군막 밖에서 갑자기 기척이 들려왔다.
서현이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차리고,
“유신이냐?”
하고 물었다.
“네.”
“들어오너라.”
서현의 허락이 떨어지자 이내 건장한 체구의 유신이 군막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투구를 벗고 여러 장수들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하고 나서
서현의 앞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말했다.
“우리 군사는 첫 교전에서 대패하여 모두 싸울 의욕을 잃었습니다.
소자는 평생 충효를 맹세하였는데 만일 이대로 물러간다면 나라에도 불충일 뿐더러
아버님께도 패장의 오명을 안겨드릴 것이므로 충과 효를 모두 그르칠 수밖에 없습니다.
대개 흐트러진 옷의 모양새를 바로잡자면 옷깃을 들어야 하고,
그물을 제대로 펴자면 벼릿줄을 당겨야 하듯 지금과 같은 때는 군사들의 잃은 사기를
찾아주는 일이 시급합니다.
남은 군사가 비록 적지만 싸울 의욕만 되찾는다면 승산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닙니다.
아버님께서 명령만 내리시면 소자가 능히 옷깃과 벼리 구실을 해보겠나이다.
옛날부터 저는 아버님이 보는 앞에서 적과 싸워보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부디 소자가 원을 풀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유신의 말에 서현은 괴로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 시간은 불과 잠시였다.
그는 이내 밝고 환한 낯으로 기특하다는 듯 유신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과연 내 아들이다!
그동안 서로 헤어져 지낸 탓에 너의 무예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는지 궁금했는데
어디 얼마나 재주가 늘었는지 한번 보자꾸나.
나가서 목숨을 아끼지 말고 힘껏 싸워보라!”
서현의 승낙이 떨어지기 무섭게 유신은 군막 밖으로 나가 애마 백설총이에 올라탔다.
온몸이 눈처럼 새하얗고 오직 주둥이만 검은 백설총이는 유신이 타자
돌연 씩씩거리며 앞발을 들고 허공을 향해 긴 울음을 울더니
그대로 바람을 가르며 적진으로 내달았다.
용춘이 급히 서현의 팔을 붙잡고서,
“어쩌자고 유신을 혼자 사지로 모는가?
자네는 아이가 젊은 혈기로 한 말도 구분하지 못한단 말인가!”
얼굴이 시뻘개서 책망하니 서현이 짐짓 정색을 하며,
“장부가 싸움터에 나와 힘껏 싸우다가 죽는 것은 도리어 자랑일세.
내 비록 아비지만 싸움터에서는 같은 장수요,
한 임금을 섬기는 같은 신하일세.
무슨 자격으로 저 아이가 가고자 하는 충효의 길을 막을 것인가?”
하고서,
“내 아들이 죽어 2천 군사의 사기가 되살아난다면 나로서도 자랑일세.”
비장한 소리를 덧붙였다.
“아무리 그렇기로 무슨 승산이 있어야지! 이거야말로 새알을 들어 바위치기요,
앞날이 구만리 같은 유신에게 덧없이 죽으라는 말과 무엇이 달라?
자네가 말리지 않겠다면 내라도 쫓아가 데리고 옴세!”
서현을 설득하던 용춘이 안 되겠다 싶었던지 군막 밖으로 달려가서 막 말에 오르려 할 때였다.
갑자기 사방에서 와 하는 함성이 일고 군사들이 저마다 휘파람을 불며 박수를 쳐댔다.
용춘이 왜 그런가 하고 낭비성을 바라보니 유신이 검은 주둥이의 백마를 탄 채로 돌아오는데
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적장의 수급이 들려 있었다.
진영에 당도한 유신은 적장의 머리를 하늘 높이 치켜들고 벌판이 떠나갈 듯 큰 소리로 외쳤다.
“군사들은 들어라! 나는 용화향도의 화랑인 국선 김유신이다!
가잠성에서 죽은 해론과 속함의 3성을 지키다 순국한 눌최가 모두 나의 낭도였는데
그들의 최후가 얼마나 뜨겁고 장렬했는가는 계림의 삼척동자도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간 금성에 상수로 붙잡혀서 싸움터에 나가고 싶어도 기회를 얻지 못했으나
마침내 때를 만나고 운을 얻어 이번 낭비성 공격에 합류하게 되었다.
나의 아끼던 낭도들은 가는 곳마다 적과 싸워 한 걸음도 물러설 줄 몰랐고,
이르는 곳마다 썩지 않을 이름을 남겨 만대의 입에 오르내릴 영웅이 되었다.
하물며 그들의 풍월주(風月主)인 내가 적들을 코앞에 두고 반 보인들 물러설 것인가!
적이 비록 숫자는 많다 하나 내 눈에는 그저 고함소리 한 번에 흩어질 허무한 새떼처럼 비칠 따름이다!
두고 보라,
나는 낭비성 성문을 열고 나오는 적장마다 반드시 그 목을 취해 이 꼴로 만들 것이니
계림의 의로운 장부들이여!
우리의 부모 형제를 괴롭혀온 구적의 멸망을 보려는 자,
두려움에서 벗어나 모두 나를 따르라!”
말을 마치자 그대로 몸을 돌려 다시 낭비성으로 내달았다.
쏜살같이 달려 나오는 유신을 보자 낭비성에선 또 한 사람의 장수가 말을 몰고 나왔다.
그는 낭비성 성주 적문(積雯)이란 자였다.
양진영의 중간쯤에서 맞닥뜨린 두 사람은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뒤 이내 한 덩어리로 어울렸다.
적장을 맞은 유신의 칼 놀림은 상대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마치 신선이 벌판에서
홀로 춤을 추는 것과 같았다.
적문이 비록 수천 기병을 휘하에 거느린 장수였지만 유신의 적수는 아니었다.
말머리를 어울러 교전한 지 단 3합, 이번에도 유신은 적장의 머리를 가볍게 취하여
의기양양하게 신라 진영으로 돌아왔다.
신라군의 함성이 또 한번 광활한 들판을 뒤흔들었다.
“이 자가 낭비성 성주 적문이라고 한다!
보라, 제군들은 이래도 내 말을 의심하는가?
이제 승리는 우리 것이며 그대들은 승군의 깃발을 높이 들고 부모형제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 만인의 칭송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의심하는 자가 있거든 다시 나를 지켜보라!”
유신은 세번째로 말을 달려나갔다.
신라군들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신비롭고 통쾌한 광경을 더 이상 앉아서만 구경할 수 없었다.
몇 사람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서자
그 바람에 시야를 가린 뒷줄의 사람들도 다투어 앞으로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성주마저 목이 달아나자 고구려 진영에서는 부장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대형 솔천수가 직접 말을 타고 나왔다. 군사들의 사기를 감안하면
더 수모를 당하기 전에 시급히 적장을 베어야 하니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솔천수는 범처럼 날뛰는 적장의 기세를 꺾어놓을 요량으로 휘황한 대장기(大將旗)를 앞세우고
출장하였다.
“신라에도 너와 같은 장수가 있었더냐? 무예가 제법이구나.”
“신라라고 어찌 이름난 장수가 없겠느냐? 그러나 나는 장수도 아니요,
다만 장수들을 뫼시고 잡일이나 거드는 일개 중당의 당주(幢主)일 뿐이다.”
“그렇다면 잘되었구나. 나는 임금을 지척에서 모시는 대형 솔천수다.
너도 귀가 있다면 전날 우리 대왕께서 양광의 수백만 군대를 흔적도 없이 토벌한
신화를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때 대왕을 도와 내호아의 수군 4만을 개 잡듯이 두들겨 쫓아낸 장수가 바로 나다.
어떠냐? 네가 무기를 버리고 우리에게 투항하여 온다면 만인이 부러워할 출세와 호강을 보장하겠다.”
솔천수의 말에 유신이 별안간 소리를 높여 웃었다.
“부형을 살해한 미치광이 양광의 군대를 토벌한 일이 무에 그리 자랑스러우며,
또한 굳이 공을 논하자면 너의 임금이 아니라 을지문덕이란 장수에게 있음은
만천하가 다 알고 있는 바다.
나는 너 따위의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거니와, 설령 계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어찌 멀쩡한 제 나라를 두고 북방의 오랑캐와 어울리겠는가?
여러 말이 시끄러우니 어서 목이나 내놓아라.”
유신의 대답에 솔천수는 크게 노하였다.
“닥쳐라, 이놈! 너를 불쌍히 여겨 살려주려 하였더니 어디서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느냐!”
솔천수가 손에 든 대장기를 내던지고 험악한 기세로 칼을 뽑아 달려들자
유신은 들고 있던 보검으로 가볍게 이를 막았다.
그때부터 양인은 손에 땀을 쥐는 화려한 검술로 한동안 맹렬히 상대의 허 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솔천수 역시 유신의 적수는 아니었다.
마주보고 겨룬 지 10여 합 만에 솔천수의 목이 댕강 떨어지니
이 모습을 지켜본 고구려의 군사치고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유신은 땅에 떨어진 솔천수의 머리와 대장기를 함께 집어 들고 적당히 자란
검은 수염을 휘날리며 돌아와 포효하듯 외쳤다.
“이것이 대형 솔천수의 머리며, 또한 고구려 임금이 이 자에게 하사한 장수의 깃발이다!
더 이상 무엇을 겁내며 무엇을 주저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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