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6. 시장조사(11)
(1759) 시장소사 -21
이경애는 이제 조철봉의 심중을 읽는다.
무엇을 알고 싶어 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주문한 요리가 놓여졌을 때 조철봉과 이경애는 시선을 음식에다 쏟고는 열심히 먹는 체했다.
여자한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시야 밖에 있었지만 조철봉은 여자가 단정한 자세로 먹고 있는 것을 알았다.
예의를 잃지 않은 것이다.
굶주려 있을 텐데도 허겁지겁 대들지 않았다.
소리도 내지 않는다.
이경애는 국수에다 돼지고기, 소고기, 탕에다 만두까지 시켰기 때문에 양이 많았다.
접시가 절반쯤 비워졌을 때 젓가락질이 드믄드믄해졌고
여자는 속이 찬 듯 국물을 자주 떠먹었다.
이제는 셋이 가끔씩 머리를 든다.
그때 이경애가 여자한테 물었다.
“참, 3년간 사시다가 도망쳐 나오셨다고 했는데 아이는요”
“죽었습니다.”
시선을 내렸다 든 여자가 웃어 보였는데 얼굴이 일그러졌다.
여자가 이경애를 똑바로 보았다.
“바로 지난달에요.
두 돌을 못 넘기고 죽었지요.
그 애가 있었다면 이렇게 도망 나오지도 못했지요.”
“도대체.”
조철봉이 끼어들었다.
“어떻게 중국인한테 팔려 가신 겁니까?”
“그런 조직이 있습니다.”
여자가 남의 일처럼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두만강을 넘어서 소개받은 조선족을 찾아갔는데 그 집은 비어있더라고요.”
“…….”
“그런데 갑자기 중국인 세 명이 나타나 우리가 민선생 대신 왔다면서
우리 일행 네 명을 데려갔습니다.”
“…….”
“그러다가 일행 중에서 중국어를 하는 오선생이 먼저 떨어졌고
여자 둘과 아이 하나인 우리 셋이 그놈들한테 잡힌 것이지요.”
“아이라니요?”
“저하고 같이 탈북한 박씨 아주머니 아들입니다. 열한 살짜리인데.”
“…….”
“박씨 아주머니하고 아들하고도 떨어져서 저는 랴오닝성 북쪽의 중국인한테 팔려갔지요.
처음에는 일자리를 준다고 해서 따라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저를 팔았더군요.”
“…….”
“가끔 술 마시고 저를 때렸지만 살만했어요.
중국어도 틈틈이 배워서 말도 통하기 시작했고.”
조철봉은 지그시 여자를 보았다.
가끔 한국에서 탈북자 사연을 듣기는 했다.
목숨을 건 탈북, 그리고 박해, 다시 목숨을 건 한국행이었다.
그런데 여자의 사연은 조금 달랐다.
절박감이 느껴지지 않는 대신 현실감이 더 강해졌다.
바로 앞에서 본인으로부터 듣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때 여자가 말을 이었다.
“더구나 아이까지 낳고, 어쨌든 제 피가 반은 섞였으니까요.
그놈도 아이를 귀여워했고 그때부터 저는 조금씩 인정을 받는 것 같았지요. 그런데.”
여자의 얼굴에 희미하게 웃음기가 떠올랐다.
“아이가 죽고 나니까 절 다른 놈한테 팔아넘기려고 하더군요.
놈들이 말하는 것을 엿듣고는 바로 그날 밤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러고는 여자가 길게 숨을 뱉었다.
“전 돈 받고 팔린 종에 불과했어요.
아이 낳았다고 인정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도 자라면 종이 되었을지도 모르니 차라리 잘 죽었지요.”
여자의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1760) 시장소사 -22
여자의 이름은 김순복, 33세, 양강도 갑산 태생으로 오빠가 7년 전에 탈북한 후로
당국의 감시가 심해지자 탈북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했다.
가족은 갑산에 올케하고 두 조카만 남아있을 뿐 부모는 다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식사를 마친 조철봉이 김순복의 사연을 듣고 나서 물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러자 김순복이 조철봉과 이경애를 번갈아 보았다.
당황한 듯 눈동자가 자주 움직였다.
이윽고 김순복이 입을 열었다.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탈북했을 때 계획은 뭐였지요?”
다시 조철봉이 물었을 때 김순복의 눈동자가 고정되었다.
빤히 조철봉을 본다.
“조선족이 많은 옌볜에서 살고 싶었어요.
제가 간호사였거든요.”
“한국에 올 생각은 없었습니까?”
“아뇨.”
머리를 저은 김순복이 말을 이었다.
“저하고 안 맞아요.”
“뭐가요?”
“사는 것이.”
“이해를 못하겠는데.”
한쪽으로 머리를 기울였던 조철봉이 정색했다.
“다 잘 살려고 목숨을 걸고 한국으로 오던데.”
“잘 살면 얼마나 잘 산다구.”
길게 숨을 뱉은 김순복이 다시 머리를 저었다.
“저도 소문 다 들었어요. 남한에 간 탈북자들이 어떻게 산다는 거 알아요.”
“소문이 어떻게 낳습니까?”
“적응을 못해서 고생하고 있다구요.”
“처음에는 다 그렇죠.”
“차라리 중국 땅에서 조선족 동포들하고 사는 것이 편해요.”
그러더니 다시 긴 숨을 뱉었다.
“어차피 혼자 살 수는 없으니까 조선족 남자라도 만나서요.”
“잘 생각하셨어요.”
듣기만 하던 이경애가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공안한테 걸리면 당장 북으로 보내질텐데 어쩌죠?”
“그럼 가지요, 뭐.”
김순복이 이경애를 향해 웃어 보였다.
“삼년간 종 노릇을 하면서도 살았는데 뭘 못하겠어요?”
그때 이경애가 조철봉에게 물었다.
“옌지 오빠한테 연락해서 김순복씨 맡아달라고 할까요?”
“그렇지.”
눈을 크게 뜬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조선어판 신문사를 운영하는 이수동을 말하는 것이다.
그만한 적격자가 없다.
그러자 이경애가 김순복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옌지에 내 오빠가 계세요.
조선어 신문사를 하고 계시는데
그 오빠한테 부탁할 테니까 옌지로 가보시지 않을래요?”
“옌지.”
김순복이 초점이 긴 눈으로 앞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옌지는 먼데.”
“차로 하루면 가죠.”
비행기는 한시간 거리지만 차는 하루가 걸릴 것이다.
그때 조철봉이 말했다.
“차를 대절로 빌려서 태워 보내지.
여기서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서 말야.
그리고 옌지 오빠한테 기다리라고 하면 되겠다.”
그러고는 김순복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우리가 정착금을 드릴테니까 이수동씨하고 장래를 상의해 보세요,
그분은 이사람 오빠로 믿을 만한 분입니다.”
또 한사람, 이번에는 탈북자 한명을 구해 내었다.
돈 벌어서 모처럼 좋은 일에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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