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6. 시장조사(1)
(1739)시장조사-1 |
두 시간 후에 조철봉이 휴게실로 나왔을 때 이경애는 TV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끝내셨습니까?”
정색하고 그렇게 이경애가 묻는 바람에 조철봉은 힐끗 시선을 주었다.
너무 노골적인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최갑중이라도 그렇게 묻지는 않는다. 끝내다니,
지금 뭘하고 온지 뻔하게 아는 여자가 그렇게 묻는다면 이쪽이 민망하지 않은가 말이다.
표현이 어렵다면 두 시간 동안 충분히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시치미를 뚝 떼고 딴말을 하는 것이 낫다.
예를 들면 “이제 숙소로 가시겠습니까?”라든지
“저녁식사는 어디서 하시겠습니까?”하고 물어도 좋았을 것이다.
이것은 조철봉의 머릿속에서 이삼초간 전광석화처럼 스쳐간 생각이다.
말이나 글로 표현하면 한참이나 걸리는 사연도 머릿속 생각은 일이초에 펼쳐진다.
“응, 잘 끝냈어.”
이경애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그렇게 말해버렸다.
약간의 반발심도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경애는 정색한 채 앞장서 계산대로 가더니 중국어로 말했다.
계산하려는 것 같았으므로 조철봉은 지갑을 건네주었다.
계산을 마친 둘은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차에 올랐다.
“내일 아침에 회의를 끝내고나서 바로 떠나도록 하지.”
조철봉이 말하자 이경애가 서둘러 가방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들고 적었다.
의자에 등을 붙인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요령성, 길림성을 둘러보고 싶으니까 그쪽으로 출장 계획을 세우도록.”
“며칠간입니까?”
긴장한 이경애가 머리를 들고 물었다.
두 눈이 반짝였고 단정한 입술이 곧게 닫혀졌다.
조철봉은 이경애가 수재 축에 드는 여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베이징대를 졸업하고 증권회사에 근무했다면 보통머리가 아니다.
“그쪽은 닷새정도로.”
이경애와 시선을 부딪친 채 조철봉이 말했다.
“북한과 접경지역도 가보고 싶고 연변자치구도 봐야겠어.”
“알겠습니다.”
“시장조사야,
조선족 동포와 중국인들의 생활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느끼고 싶어서 그래.
그러니까 기업체나 관리들의 면담 따위는 필요 없어.”
“예, 사장님.”
“우린 말 그대로 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생활상을 보는 거야.
조선족 민가에 가서 재워달라고 부탁하면서 말야.”
“네, 사장님.”
열심히 적던 이경애가 조철봉을 보았다.
두 눈이 더 반짝이는 것 같았다.
“그럼 배낭여행을 하시는 것이 낫겠는데요.”
그러자 조철봉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게 낫겠다.”
조철봉이 자신의 옷차림을 둘러보았다.
말끔한 양복 차림이다.
“이렇게 입고 다니면 안 되겠지?”
“네, 사장님.”
“옷차림도 바꿔야겠다.”
“제가 준비해 놓겠습니다.”
“기차도 타고 버스도 타는 거야.”
“네, 사장님.”
“참, 나이가 몇이야?”
“스물넷입니다. 사장님.”
“나이 차가 많아서 부부가 같이 다니는 것처럼 보이진 않겠다.”
“사장님은 아직도 젊으십니다.”
그래놓고 이경애가 시선을 내렸다.
아부에 익숙지 않은 것이다.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배낭여행이다.
그것이 밑바닥 민심이나 시장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이다.
(1740)시장조사-2 |
다음날 오전, 회의를 마친 조철봉은 이경애와 함께 공항으로 출발했다.
옌볜 조선족 자치구의 옌지, 즉 연길행 비행기를 타려는 것이다.
둘 다 작업복 차림에 배낭을 매었고 발에 편한 캐주얼화를 신었다.
이경애는 복장에 신경을 써서 둘은 중국인 여행자처럼 보였다.
물론 카메라 따위는 들지 않았으며 가방도 옷가지 몇 개만 넣었을 뿐이어서 가뿐했다.
국내선 비행기 안은 소란했는데 대부분이 중국인인 것 같았으므로 조철봉이 옆에 앉은
이경애에게 말했다.
“조선족 자치구로 가는 비행기에 조선족은 보이지 않는군.”
그러자 주위를 둘러본 이경애가 희미하게 웃었다.
“꽤 있습니다. 조선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런가?”
조금 놀란 조철봉이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면 이곳은 중국 땅이고 조선족 동포의 국적은 중국인 것이다.
일상 생활에서 중국어를 사용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때 조철봉의 왼쪽에 앉은 중년 사내가 불쑥 입을 열었다.
“한국분이시오?”
한국어였으므로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바로 옆에도 조선족 동포가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 중년 사내는 조금 전에 승무원과 중국어로 이야기를 주고받았기 때문에
중국인인 줄 알았다.
“예, 한국에서 왔습니다.”
조철봉이 대답하자 사내의 시선이 창가에 앉은 이경애를 스치고 지나갔다.
“옌지에는 무슨 일로 가십니까?”
“관광이죠.”
간단하게 대답한 조철봉이 사내를 보았다.
50대쯤으로 양복 차림에 오른손 중지에는 다섯 돈쯤 되어 보이는 금반지를 끼었다.
사내가 다시 물었다.
“옌지는 처음이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난 김금택이라고 합니다.”
사내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명함을 건네주며 말했다.
“옌지 시내에서 여행사하고 식당을 차려놓았지요. 식당이 꽤 큽니다.”
“예, 전 조철봉입니다.”
사내의 명함을 들여다보고 난 조철봉이 웃어 보였다.
“서울에서 조그만 가게를 하고 있습니다.
명함을 가져오지 않아서 미안합니다.”
“서울 무슨 동이신데요?”
“저기, 대림동에.”
“아, 영등포 말입니까?”
정색한 사내가 말을 이었다.
“내가 대림동하고 시흥 쪽을 자주 다녔지요.
그래서 그쪽 길은 좀 압니다.”
“어이구, 그러세요?”
“내가 한국에 8년 있었지요.”
비행기는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을 그냥 떠있는 것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조철봉이 관심을 갖는 시늉을 하자 사내의 목소리에 열기가 띠어졌다.
“서울에 평양냉면을 소개한 사람이 바로 납니다.”
제 가슴을 손바닥으로 두드리고 난 사내가 말을 이었다.
“평양냉면 지점을 85개까지 냈지요.
내가 북한에서 주방장까지 데려다가 한국에 평양냉면 바람을 일으켰는데.”
말을 그친 사내가 입맛을 다시더니 곧 머리를 저었다.
“사기를 당해서 겨우 본전만 건졌습니다. 다 사기꾼이요. 한국놈들.”
그러고는 힐끗 조철봉을 보았다.
“물론 선생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기꾼은 사기꾼을 알아본다.
조철봉이 보기에는 사내가 사기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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