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강안남자

558.인연(8)

오늘의 쉼터 2014. 9. 23. 00:19

 

558.인연(8)

 

 

(1704) 인연-15

 

 

 

양주를 서로 세 잔씩 비웠을 때 서연주는 긴장이 풀린 듯 표정이나 행동이 자연스러워졌다.
 
갑자기 사주와 사원 관계로 맺어졌지만 서연주에게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 것처럼 느껴졌다.
 
아르바이트를 포함해 십여개의 직장을 전전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철봉이 그리 길지 않은 시간 겪어본 바에 의하면 서연주는 적극적인 성품이었다.
 
또렷하게 응시하는 눈을 보면 앞에 놓인 기회를 놓칠 것 같지가 않았다.
 
조철봉은 서연주의 검은 눈동자를 보는 순간 찌릿한 전류가 온몸을 훑고 지나는 느낌을 받았다.
 
우연히 부딪쳤다가 금방 비켜갔지만 자극적인 눈빛이었다.
 
욕심이 많고 남자 경험이 풍부하다.
 
조철봉은 그렇게 결론지었다.

“저기….”

술잔을 든 조철봉이 다소 느긋한 표정이 되어서 서연주를 보았다.
 
바 안에는 외국인 손님이 두 테이블에 있을 뿐이어서 조용한데다 아늑했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지만 마치 숨소리와 같아서 분위기를 그대로 유지해주고 있었다.
 
서연주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부드럽게 물었다.

“남자 친구 있어?”

“아뇨.”

말이 끝나자마자 서연주가 머리를 저으며 대답했다.
 
정색하고 있었다.

“바빠서 만들지 못했어요.”

“그래? 그 미모에 믿기지 않는데.”

놀란 듯 조철봉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하지만 지금까지 데이트라도 했던 남자는 한두명이라도 있을 거 아냐?”

“없어요.”

다시 머리를 저은 서연주가 흰 이를 드러내며 소리없이 웃었다.

“믿기지 않으시죠?”

“그러네, 도무지.”

“같이 밥 먹은 남자 친구는 몇명 있었죠. 과 친구나 동아리 멤버. 하지만….”

다시 정색한 서연주가 똑바로 조철봉을 보았다.

“남자 친구는 만든 적이 없거든요?”

“그것 참.”

“소개해 주시려고요?”

하고 서연주가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조철봉만큼 여자의 거짓말에 대해서 익숙한 인간은 드물 것이다.
 
또한 조철봉만큼 여자의 거짓말에 대해 이해심이 많은 인간도 드물 것이었다.
 
여자는 가끔 신데렐라를 꿈꾼다.
 
그래서 호박이 황금마차가 되는 상상을 하다 보면 현실과 혼동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을 갖고 기니 아니니 따지는 놈은 병신이다.
 
그런 건 그냥 넘어가 주는 것이 남자다.
 
서른여덟 먹은 여자가 서른둘이라고, 마흔넷짜리 여자가 서른여덟이라고 하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
 
체중도 3㎏쯤 내려서 말한다고 알고 있으면 되는 일이다.
 
여자가 떠들면 사기 치려고 하지 않는 이상 그냥 들으면 된다.
그러면 복이 온다.
 
그런데 조철봉은 앞에 앉은 서연주에 대해서는 생각이 좀 달라졌다.
 
47개월동안 12명의 남자를 갈아치운 서연주인 것이다.
 
그래서 적어도 두어명 정도는 남자 친구가 있었다고 대답할 것을 예상했었다.
 
조철봉식으로 표현하면 싸가지가 없는 경우였다.

“흐음.”

그러나 조철봉이 감탄한 표정을 짓고 서연주를 보았다.

“열심히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 일하고, 공부하고 말이야.”

“그랬어요.”

정색한 서연주가 조철봉을 똑바로 보았다.

“남자한테 한눈 팔 시간이 없었던것 같아요.”

조철봉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이 거짓말은 너무 심하다.
 
애교로 못 봐주겠다.

 

(1705) 인연-16

 

 

그때 서연주가 말을 이었다.

“남자친구 만나는 것도 습관인 것 같아요.
 
제가 아는 선배 하나는 수시로 남자친구를 바꾸는데 나중엔 이름도 다 기억하지 못한다는군요.”

“흐음.”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은 서연주가 제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했다.
 
서연주의 잔에 술을 채워준 조철봉이 물었다.

“그래, 지금은 어디서 살고 있지?”

“신촌에서 원룸 오피스텔을 얻어 놓았거든요? 하지만 옮겨야 될 것 같아요.”

“그래?”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지그시 서연주를 보았다.
 
지금 서연주와는 고용자와 사원의 관계로 마주 앉아 있다.
 
그러나 둘은 남녀 관계인 것이다.
 
조철봉이 80 먹은 노인이라도 서연주는 남자를 느껴야 정상이다.
 
그래야 감정이 흐르는 인간인 것이다.
 
서연주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조철봉은 확신할 수 있었다.
 
조금 전에 남자 친구를 물었을 때부터 서연주의 눈빛은 번들거렸다.
 
마치 맑은 물속에서 꿈틀거리는 물고기처럼 생기를 띠고 있다.

“내가 다음주에 하바로프스크에 가야 될 것 같은데.”

조철봉이 불쑥 입을 열었다.
 
긴장한 서연주가 눈을 크게 떴으므로 조철봉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비공식 출장이야. 회사에선 비서실장만 알고 있지.
 
난 하바로프스크에서 유리 젤린스키의 사업체와 시장을 내 눈으로 직접 둘러보고 싶어.”

조철봉이 정색하고 서연주를 보았다.

“사흘이나 나흘쯤 일정이 될 것 같은데 같이 갈 수 있겠어?”

“네.”

간단하게 대답한 서연주가 조철봉을 향해 웃었다. 조금도 긴장하지 않는 것이다.

“제 업무 같은데요. 모시고 갈게요.”

“남자친구가 없다니까 하는 말인데, 만일 있다면 이런 출장을 허락했을까?”

불쑥 조철봉이 묻자 서연주는 3초쯤 눈만 깜박였다.
 
그러더니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있다고 해도 제가 갔을 것 같아요.
 
허락 같은 건 받을 필요 없구요.”

“다행이군.”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다시 술잔을 쥐고 말했다.

“날 믿어주는 것 같아서 말야.”

하바로프스크 비공식 출장도 본래 최갑중과 함께 떠나기로 되어 있었던 계획이었으니
 
즉흥적인 제의는 아니다.
 
다만 서연주에게 최갑중 이야기는 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것으로 조철봉은 서연주의 적극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연주가 사장과 둘이서 비공식 출장을 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기회가 오면 서연주는 거침없이 잡는다.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굳이 하바로프스크까지 데려가서 마지막 테스트를 해 볼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도 가능하다.

“어때?”

조철봉이 똑바로 서연주를 보았다.
 
그때 문득 며칠전 그린호텔 바에서
 
서연주에게 조건을 제시한 유중환 부장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소형차, 기름값, 월 150만원이라고 했던가?

“서연주씨가 나한테 바라는 것이 있으면 지금 말해봐.”

조철봉의 말이 그렇게 나왔다.
 
그러자 서연주가 머리를 들었다.

“없습니다.”

조철봉은 시선만 주었고 서연주의 말이 이어졌다.

“사장님께서 시키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러더니 시선을 내렸다.

“모두 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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