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강안남자

537. 동반자(12)

오늘의 쉼터 2014. 9. 20. 19:32

537. 동반자(12)


(1663) 동반자-23




다음날은 일요일이어서 조철봉은 모처럼 집에 머물렀다. 

 

그러나 초등학교 5학년이 된 영일은 제 아빠가 옆에 있는 것을 별로 반기는 눈치가 아니었다. 

 

슬슬 피하다가 어느사이에 제 방으로 돌아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마다 영일을 끄집어 내기를 반복했던 조철봉은 이은지의 핀잔을 받고 나서야 그만두었다.

“억지로 그러는 거 아녜요.”

찌푸린 얼굴로 응접실에 앉아 있는 조철봉에게 다가선 은지가 말했다.

“맨날 떨어져 있다가 갑자기 치근대는 거, 애들한테 안좋아요.”

“저 자식이 제 에미를 닮은 것 같아. 변덕이 심한 게 말야.”

조철봉이 낮게 말하자 은지는 눈을 흘겼다.

“영일이 성품은 좋아요. 남 탓하지 마세요. 물론 농담이겠지만.”

“당신 덕분에 영일이가 저만큼이라도 되었어. 당신은 내 은인이야.”

“당신은 칭찬이 너무 헤픈 거 알아요?”

그러면서 웃던 은지가 문득 벽시계를 보고 나서 조철봉에게 말했다.

“벌써 한시네. 지선이가 두시에 온다고 했는데.”

“지선이라니?”

“내 친구.”

그러더니 은지가 조철봉 옆에 앉아 허벅지를 쓸었다.

“취직 시켜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고 해서 내가 집으로 오라고 했어요.”

“집으로?”

이맛살을 찌푸린 조철봉이 은지를 보았다.

“집으로는 왜? 그냥 당신한테 인사나 하면 됐지.”

“당신은 지선이 만나지도 않았다면서요?”

“바빴어.”

“그래도 그렇지.”

은지가 조철봉의 허벅지를 움켜쥐었다가 놓았다.

“걔도 꼭 인사를 하겠다고 해서 얼굴도 볼겸 오라고 했으니까 만나봐요.”

“그거야 어려운 일 아니지만.”

“나두 생색도 내고.”

그러더니 은지가 조철봉의 볼에 입술을 얼른 붙였다가 떼었다.

“지선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 청도 공장 영업팀장 대리가 되었다면서. 당신이 은인이래.”

“당신 덕분이지 뭐.”

했지만 조철봉의 언짢았던 기분도 조금 풀어졌다. 

 

문득 가화만사성이란 말이 떠올랐으므로 조철봉은 저절로 심호흡을 했다. 

 

바로 이것이다. 

 

은지가 온 이후로 집안에 화기가 돌았으며 기틀이 잡혔고 바깥일도 걱정없이 잘 풀린 것 같았다. 

 

모두 은지 덕분이다. 

 

은지가 다 이끌었다. 

 

남자 탓을 했던 서경윤과 대조적으로 은지는 아무 불평도 하지 않았다. 

제 자식처럼 영일이를 챙겼으며 허둥거리면서 중심을 잡지 못하는 조철봉에게 

 

안정감과 여유를 심어 주었다. 

 

그리고, 조철봉은 팔을 뻗어 은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은지는 단 한번도 여자 관계를 문제 삼은 적이 없는 것이다. 

 

외박과 출장을 밥먹듯이 해서 한달에 절반 이상을 밖에 나가 있는 조철봉에게 

 

여자의 ‘여’자도 꺼낸 적이 없다.

“당신은.”

불쑥 말을 꺼냈던 조철봉이 침을 한번 삼키더니 말을 이었다.

“날 믿어?”

여자 관계를 떠올렸다가 품어나온 말이었으므로 조철봉의 심장박동이 빨라졌지만 

 

은지는 금방 대답했다.

“그럼.”

은지가 몸을 붙이면서 말했다.

“믿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 믿어야지.”

 

 


(1664) 동반자-24




“안녕하세요.”

응접실로 들어선 유지선이 인사를 했다. 

 

약간 긴장한 얼굴에 웃음을 띠었고 자세는 단정했다. 

 

조철봉은 머리를 숙여 답례했다. 

 

그러나 응접실로 들어선 지선과 처음 시선이 마주친 순간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과 함께 

 

목을 밧줄로 조여 당기는 것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황망히 시선을 돌렸지만 지금도 심장의 고동은 세찼고 목구멍이 금방 건조해졌다. 

은지의 안내를 받은 지선이 앞쪽에 나란히 앉았다. 

 

공교롭게도 은지의 자리는 바로 조철봉의 정면이다. 

 

여자는 얼마나 신비스러운 존재인가? 

 

시선을 은지와 지선의 중간 부분에 놓은 조철봉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초점은 중간에 두었어도 시계 내에 지선의 모습이 다 들어와 있다. 

 

지선은 하늘색 바탕에 옅게 꽃무늬가 박힌 수수한 원피스 차림이었다. 

 

얼굴에 화장을 하지 않아서 눈 밑의 작은 점들이 드러났고 입술도 까칠했다. 

 

그러나 진갈색 눈동자와 흰창은 맑았으며 입술을 꾹 다문 표정은 다부졌다. 

 

손끝으로 어딘가를 살짝 찌르기만 해도 뭐가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빼어난 미인은 아니다. 

 

이목구비의 균형이 잡혔고 섬세한 느낌은 들었지만 눈에 확 띄는 용모는 아니다. 

그런데 왜. 웃음 띤 얼굴로 지선과 은지를 자연스럽게 돌아보면서 조철봉이 반문했다. 

 

그런데 왜 심장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단 말인가? 

 

더구나 어젯밤 이영혜와 질펀한 섹스를 나누고 온 터라 천하의 조철봉이라고 해도 

 

성적 욕망은 많이 가라앉은 상태인 것이다. 

 

이 욕망은 아주 단순해서 배설하고 나면 양귀비 할머니를 앞에 데려다 놓아도 평상심이 유지된다. 

 

그 반응은 노소, 고하, 빈부는 말할 것도 없고 교양, 지식의 경중에 상관없이 공평하다. 

 

그때 지선이 조철봉에게 말했다.

“제가 직접 인사드리려고 왔습니다. 한번 뵈어야 될 것 같아서요.”

부드럽고 맑은 목소리였다.

“아, 잘 오셨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은지를 보았다. 

 

은지도 웃음 띤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당신하고 제일 친한 친구라고 했지?”

“그래요.”

가정부 아줌마가 가져온 주스 잔을 들면서 은지가 말했다.

“우리는 한때 연애한다는 소문까지 났었으니까요.”

“흐음.”

조철봉은 감탄한 표정을 지었지만 지선은 당황했다.

“얘는 참.”

눈을 흘기는 지선을 무시한 채 은지가 말을 이었다.

“그래요. 난 그런 감정을 품은 적도 있어요. 정신적인 것보다 육체적인 감정.”

그러더니 은지가 지선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툭 쳤다.

“얜 여자죠. 보호해 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여자 역할.”

은지가 다시 손끝으로 제 가슴을 가리켰다. 

 

웃음 띤 얼굴이다.

“전 남자. 그땐 그런 분위기였죠.”

“흐음.”

따라 웃은 조철봉이 은지를 지그시 보았다.

“난 당신만 한 여자다운 여자를 보지 못했는데 우습군.”

“그건 상대 나름인 거 같아요.”

조철봉을 똑바로 보면서 은지가 대답했다. 

 

눈빛이 강했고 시선에는 신뢰가 가득 배어 있었다. 

 

그 시선을 받으면서 조철봉은 시야 한쪽에 박힌 지선을 보았다. 

 

이제야 알았다. 

 

아까 심장이 내려간 이유를. 이 여자의 분위기가 그랬기 때문이다.



 

'소설방 > 강안남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539. 유혹(1)  (0) 2014.09.20
538. 동반자(13)  (0) 2014.09.20
536. 동반자(11)  (0) 2014.09.20
535. 동반자(10)  (0) 2014.09.20
534. 동반자(9)  (0) 2014.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