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남역(南域)평정 9
그런데 신라군을 격퇴시킨 후에 망루에 올라가 줄곧 사방의 동태를 살피던 은상은
초경에 접어들 무렵 가만히 흑치사차를 찾아가 말하였다.
“지금 살매현에 또 다른 원군이 도착한 게 분명합니다.”
“그것을 네가 어찌 아느냐?”
“좀 전에 살매현에서 흰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는데
적어도 수천 명을 먹일 밥은 짓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
흑치사차는 눈을 휘둥그래 떴다.
“수천 명의 원군이 왔다면 예삿일이 아니구나!”
“그래서 말씀입니다만 오늘밤에 살매현으로 군사를 내어 습격하지 않으면 내일부터는
큰 낭패를 당할 게 뻔합니다.
만일 저들이 밤에 당장 군사를 내면 어찌할까 대걱정을 했지만 아직까지 잠잠한 걸로 보아
다행스럽게도 오늘밤은 그냥 넘어갈 모양입니다.
아마도 저들은 먼길을 달려온 원군이 틀림없지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하늘이 준 절호의 기횝니다.
밥을 배불리 지어 먹고 한잠이 들었을 때 벼락같이 급습한다면 만군인들 어찌 두렵겠나이까?”
“네 말도 일리는 있다만 우리 군사들도 지금 몹시 지쳐 있다.
과연 그럴 기운이 날지 모르겠구나.”
“다행히 우리 군사들에겐 아직 저녁을 먹이지 않았습니다.
장군께서는 군사들에게 저녁을 굶는 대신 살매현을 치고 돌아오면 밥과 고기를 배불리 주겠다고
약속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오히려 먹이를 본 승냥이 떼처럼 날뛸 것입니다.”
은상의 말은 조목조목 탓할 것이 없었다.
흑치사차는 은상의 새로운 면모를 볼 때마다 속으로 크게 놀라고 감탄했지만
이를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혹시 밥 짓는 연기를 피워 올린 것이 우리를 유인하려는 술책은 아니겠느냐?”
하고 물으니 은상이 빙그레 웃으며,
“지금 적군에게는 그런 계책 따위를 쓸 여유가 없습니다.
장군께서는 안심하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흑치사차가 문진과 의논하니
문진 역시 은상이 빈틈없는 장상(將相)의 재목이라고 탄복하였다.
그날 백제군은 이경을 넘긴 시각에 늑노현을 출발해 야반 삼경,
한잠에 빠져 있던 신라군의 살매현 진채를 급습하였다.
불시에 허를 찔린 신라군들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꿈결에 목을 잃은 자가 부지기수요, 방향감을 잃고 허둥대다가 죽은 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의 대부분은 무기와 갑옷도 챙기지 못한 맨몸으로 달아나기에만 바빴다.
살매현 입구는 자다가 봉변을 당한 신라군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파랑은 경황 중에도 무은을 찾았다.
“어르신께서는 무탈하신지요?”
“나는 괜찮네. 자네는?”
“저도 요행히 목숨은 건졌습니다.
말을 준비해왔으니 어서 피하십시다!”
“어디로 간단 말인가?”
“살매현 입구는 이미 쑥밭이올시다.
우선 왕재성(王在城)이나 삼년산성으로 몸을 피하여 뒷일을 도모합시다!”
“내가 너무 오래 살었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굳게 잡수셔야 합니다!”
파랑은 참담해하는 무은을 위로하여 말에 태우고 황망히 그곳을 빠져 달아나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멈춰라! 너희는 허락도 없이 어디로 도망하려느냐?”
희끄무레한 달빛을 등지고 돌연 두 장수의 앞을 가로막는 이가 있었으니 그는 다름아닌 은상이었다.
은상을 처음 본 파랑은 그가 비록 장수의 복장을 했지만 아직 어린 티가 밴 것을 시쁘게 여겨
코웃음을 쳤다.
“네까짓 게 감히 뉘 앞을 막아서느냐? 냉큼 비켜서지 못하겠느냐!”
파랑이 짐짓 언성을 높여 꾸짖자
은상은 대꾸도 없이 칼을 빼들고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어르신께선 잠시만 옆으로 피해 계십시오.”
파랑은 어린아이를 상대하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무은을 잠시 옆으로 비켜서게
한 뒤 혼자 삼사 합을 싸웠다.
전날 용춘의 낭도 가운데 무술로는 제일이란 평가를 들어온 파랑이었다.
그러나 상대를 너무 얕잡아본 탓이었을까. 은상이 짧은 기합 소리와 함께 휘두른 칼날에
파랑은 그만 외마디 비명을 토하며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곁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무은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무기를 버리고 말에서 내리면 목숨만은 살려주리라!”
파랑이 죽은 것을 확인한 은상이 자비라도 베푼다는 듯 무은을 향해 말했다.
칠순 노장 무은은 모욕감에 치를 떨었다.
“건방지구나! 내 어찌 손자뻘인 너 따위에게 목숨을 구걸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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