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남역(南域)평정 8
다행히도 추격군의 후미에 있다가 화를 모면한 무은은 볏단에 지핀 불길이 가라앉자
함성을 지르며 쏟아져 나오는 한 패의 백제군을 만났다.
그는 거의 필마단기였으므로 내심 죽음을 각오하고 손에 든 칼자루를 단단히 고쳐 잡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이게 누구시오? 무은 장군이 아니시오?”
무은이 바라보니 백제군을 인솔하고 나온 적장은 연문진이었다.
두 사람은 전날 문진이 부여헌을 수행하여 백공을 청하러 금성에 갔을 때
대궐 탑전에서 면을 익힌 사이였다.
“그대 나라의 미륵사는 완공이 되었는가?”
무은은 우선 그렇게 장왕의 배은망덕을 꼬집었다.
문진이 잠시 대답할 말이 궁하여 머뭇거리자
무은은 마상에서 얼굴빛을 달리하여 준절히 꾸짖었다.
“그대의 왕은 어찌하여 한 입으로 두 가지 말을 예사로 하며,
어제는 스스로 국서라 칭하면서 백공을 청하더니
오늘은 또 이처럼 군사를 내어 장인과 지어미의 나라를 짓밟는 것인가?
대체 그대의 왕과 같이 막돼먹은 쥐알봉수가 천하 고금에 둘이 있을까 모르겠구나!”
그러자 문진은 큰 소리로 껄껄대며 웃었다.
“천하를 경영하는 데 쓰지 못할 계책이 무어란 말이오?
만일 그를 두고 탓한다면 장군은 일생을 헛 산 게지요.”
막상 대꾸는 그렇게 했지만 아들까지 잃은 늙은 장수가 불쌍해 보였던지
문진은 막아섰던 길을 슬그머니 터주며 달아나라는 눈짓을 보냈다.
순간 무은은 치욕스러움을 느꼈지만 이것저것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자신의 목숨보다는 이웃 현과 삼년산군 전체의 안위가 걱정스러울 따름이었다.
무은이 가까스로 추격군을 따돌리고 허겁지겁 살매현으로 도망쳐 와서 보니
살아남은 군사는 채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무예가 시원찮던 태수 녹부도 부상을 입고 부하 장수들에게 업혀와 있었다.
무은은 병중에 있던 살매현 현령에게 말하여 시급히 원군을 청하는 봉화를 올리도록 하였다.
그런데 봉화가 오르고 불과 한식경 남짓 지났을 때 금성에서 출발한 원군 5천 명이 당도했다.
원군을 이끌고 온 장수는 놀랍게도 파랑(罷郞)이었다.
용춘의 낭도이자 귀산, 찬덕과 절친한 벗이었던 파랑은 용춘이 역모 혐의를 쓰고 벼슬길에서
물러날 때 함께 관직을 버렸던 인물인데, 이때는 출각한 용춘의 천거로 다시 급찬 벼슬을
제수받아 병부의 일을 보고 있었다.
무은은 죽은 아들의 친구인 파랑을 보자 크게 반가워했다.
“자네를 대하니 마치 귀산이 살아서 온 듯이 반갑구먼!”
말에서 내린 파랑은 무은에게 공손히 큰절을 올리고 입을 열었다.
“늑노현의 봉화를 보고 용춘공께서 원군을 내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전하의 윤허를 받았는데
어른께서 이곳에 계시는 줄 알고 제가 자청하여 왔습니다.”
“그러셨는가. 허허, 고마우이.”
노장 무은의 눈에 설핏 물기가 배었다.
“그런데 늑노현은 어찌 되었습니까?”
무은은 파랑을 데리고 앉아 저간의 사정을 간략히 설명했다.
얘기를 듣고 난 파랑이 눈에 핏발을 세우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부여장이란 놈은 생각할수록 교활하고 괘씸한 놈입니다.
신라의 공주를 데려다 왕비로 삼았으면서 어찌 번번이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놈은 자신의 처지를 편의에 따라 적절히 이용하여 궁극에는
우리나라를 망하게 할 놈이 틀림없습니다!”
“어찌 부여장을 탓하겠는가?
그 자의 간악한 술수에 번번이 속아넘어간 우리나라의 신하들이 그르고 한심한 게지.”
무은이 자조 섞인 탄식을 터뜨리자 파랑은 잠시 궁리에 잠겼다가 말했다.
“저쪽의 군사가 2천이라면 이제 늑노현은 찾은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군사를 내어 일시에 공격한다면 무슨 수로 갑절이 넘는 아군을 상대하겠습니까?
어르신께서는 심신을 편히 하시고 예서 기다립시오.”
“내 명색이 일선주의 군주로 늑노현을 찾는 일에 어찌 구경만 하겠는가?
자네가 선군을 맡아 앞장을 서신다면 후군은 내가 맡겠네.”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무렴. 먼길을 오시느라 고단할 테니 일찌감치 쉬시게나.”
파랑은 살매현에 군막을 치고 군사들에게 밥을 배불리 지어 먹게 한 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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