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5. 열정(12)
(1581) 열정-23
보신탕은 무슨, 조철봉과 이재영이 저녁을 먹은 곳은 한식당이었다.
식당 이름은 전주집, 맛있다고 소문이 난 곳이다.
예약을 해놓아서 방으로 들어가 앉았을 때 곧 종업원 둘이 상을 들고 왔다.
상 위에 찬이 가득 놓여 있었는데 마치 전주에서 한정식 상을 받는 것 같았다.
따라온 50대쯤의 주인 여자가 말했다.
“찬 대부분은 전주에서 공수해온 겁니다.
이런 젓갈류는 여기서 만들 수가 없죠.”
주인 여자가 상에 놓인 찬을 가리켰다.
“좀 비싸지만 노인들이 아주 좋아하시니깐요.”
그럴 것이다.
만리타향에서 어릴 적에 먹던 음식을 맛보는 것보다 더 즐거운 게 있겠는가?
조철봉은 찬 몇가지의 맛을 보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얼마 전에 전주에서 먹었던 것과 맛이 비슷했다.
방에 다시 둘이 남게 되었을 때 재영이 입을 열었다.
“저기, 사장님한테는 진행 과정을 보고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머리를 든 조철봉이 잠자코 시선만 주었고 재영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 내용은 보고하지 않았어요.”
그런 내용이란 보먼이나 더글러스, 그리고 명일전자의 배경호에 대한 작업을 말하는 것이다.
조철봉이 풀석 웃었다.
“그런가? 알아도 상관 없는 일이긴 한데.”
“내일 골드먼과 만나기로 한 것도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재영이 조철봉을 똑바로 보았다.
눈이 또렷했고 반짝였다.
“나중에 결과만 보고할 예정입니다.”
“이 사장은 나하고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지.”
찬을 집어 먹으면서 조철봉이 말했다.
“정의감이나 책임감이 강하고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야.
친구들 사이에서 법 없이도 살 인간이라고 소문이 났지.”
“저도 존경하고 있습니다.”
“난, 아냐.”
밥을 먹으면서 조철봉이 머리를 저었다.
시선은 상에 놓인 찬 위에서 이리저리 옮아갔다.
“난 사기꾼이야, 아주 사기성이 강하지. 목표를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아.
이기는 것이 곧 선이고 지면 악이야. 지면 끝장이 나서 사라지게 되는 것이 경쟁사회의 생리야.
신사적으로 행동했다가 지면 누가 알아줘?
저 혼자라면 몰라. 처자식, 수백명의 직원, 수천명의 직원 가족한테 물어봐.
신사적으로 놀다가 없어지자고.”
찬을 집어 입에 넣은 조철봉이 맛있게 씹어 삼키고 나서 말을 이었다.
“이대건이가 나한테 이 일을 부탁 한 것도 대단한 의미가 있어.
대건이도 곧 큰 사업가가 될 소질이 보여.”
그러고는 조철봉이 머리를 들고 재영을 보았다.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라 있다.
“이 사장이 나에 대해서 무슨 말 했지요?”
“네? 무슨 말씀을.”
놀란 재영이 눈을 끄게 뜨고는 입 안에 든 음식을 서둘러 삼켰다.
그러자 조철봉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웃음띤 얼굴이다.
“나, 조심하라고 안 합디까?”
“네, 무슨….”
했지만 재영의 눈밑이 조금 후끈거렸다.
조철봉한테서 시선을 떼고 싶었지만
그때는 상황이 더 악화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으므로 재영은 기를 쓰고 눈을 치켜떴다.
그때 조철봉이 말했다.
“내 여자관계, 혹시 추근거릴지도 모르니까 단단히 대비하라고 안 합디까?”
“전, 전혀.”
말까지 더듬고 난 재영이 마침내 시선을 내렸다.
그러고는 어금니를 물었다.
도대체 자신이 왜 이렇게 당황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1582) 열정-24
“난 섹스를 좋아해요.”
하고 불쑥 조철봉이 말했을 때 재영은 막 젓가락으로 집었던 계란부침을 떨어뜨렸다.
그래서 다시 집으려는 시늉을 했을 때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즐기는 편이라고 할까?
난 섹스가 본능이나 욕구 배설의 용도보다 기쁨을 나누는 잔치,
또는 즐거움의 추구, 내 개인적인 입장으로 보면 내 가치의 확인 따위로 의미를 두는데.”
그러더니 그제서야 시선을 든 재영의 얼굴을 향해 빙그레 웃었다.
그 순간 재영은 심장이 또 뚝 내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조철봉의 말은 알쏭달쏭했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실감이 나지는 않았다.
조철봉이 평상시에 사용하는 말투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용에 문자를 많이 썼고 비유도 넣은 것은 그만큼 연구를 해서 머릿속에
박아놓고 있었다는 증거인 것 같다.
어쨌거나 이대건이 경고한 내용이 있는 터라 재영은 긴장하고 있었다.
대건의 말은 앞뒤 딱 자르고 표현하면 조철봉이 여자를 밝힌다는 것이었다.
가치의 확인이네, 즐거움의 추구네 하는 따위는 그쪽 사정이다.
그러나 재영은 자신의 얼굴이 어느새 달아오른 것을 느끼고 숨을 삼켰다.
두 다리를 비스듬히 꼬고 앉아서 다리 사이가 압박되어 있었는데
거기가 근지러운 느낌도 들었다.
긁고 싶다. 왜 이럴까? 그때 조철봉이 말했다.
“어때요? 이 부장, 난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나하고 약속을 하지 않겠어?”
“네? 무슨.”
재영이 조철봉을 보았다.
이제 거기가 근지러운 느낌은 사라졌지만 얼굴은 더 더워졌다.
조철봉은 반말과 존댓말을 번갈아 쓰고 있었는데 그것이 아주 효율적이었다.
대하기가 어중간해서 번갈아 쓰는 것이 아니다.
반말을 쓸 곳과 안 쓸 곳을 가려서 쓰는 것이다.
분위기에 맞춰서 내놓는다.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나하고의 접촉.”
이제는 온몸이 굳은 재영을 향해 조철봉이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서로 자신의 감정에 정직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서 말이지.”
“…….”
“상대방한테 제의하는 거요.
예를 들면 난 지금 이 부장한테 키스를 하고 싶다.”
“…….”
“내가 그렇게 표현하면 이 부장은 감정 그대로 싫으면 싫다고 말하면 되는 거지.
그럼 나는 두말 않고 물러나고.”
“…….”
“이 부장한테서 그런 감정이 일어나면 먼저 나한테 제의를 하는 것이고.
나, 섹스를 하고 싶어요 하고.”
“…….”
“지금까지는 나한테서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는 걸 알지. 오늘 이전에는.”
그러더니 조철봉이 다시 빙그레 웃었다.
“그런데 오늘 나는 이 부장의 표정에서 여러번 그 가능성을 보았어.”
“…….”
“내가 요구하면 들어줄 것 같은….”
“…….”
“물론 이 부장이 자신의 감정에 정직해야 성사가 되는 일이지만.”
그때 재영이 입을 열었다.
“그래요.”
이제는 조철봉이 긴장한 듯 눈을 가늘게 떴고 재영의 말이 이어졌다.
“정직하게 표현할게요. 약속할게요.”
그러더니 덧붙였다.
“오늘, 맞아요. 회장님한테서 남자를 느꼈어요. 강한 남자.”
“지금은?”
그 표정 그대로 조철봉이 묻자 재영이 대답했다.
“지금도 그래요. 몸이 뜨겁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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