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3. 언제나 꿈을 꾼다(12)
(1557) 언제나 꿈을 꾼다-23
그로부터 20분쯤 후에 조철봉과 이애진은
화랑에서 사거리 하나 건넌 곳에 위치한 찻집에 앉아 있었다.
경택은 따라오지 않았으므로 둘이다.
“미안해요.”
마주 보고 앉았을 때 애진이 먼저 그렇게 말했다.
“아저씨가 자꾸 중매를 하신다고 해서.”
“아니, 난 괜찮은데.”
조철봉이 웃음띤 얼굴로 애진을 보았다.
그러자 애진은 서둘러 시선을 내렸다.
남녀간에 이른바 몸을 섞게 되면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친밀감 정도가 아니다.
물론 좋은 감정일 때의 경우지만 남녀관계의 정점에 올랐다고 표현해도 될 것이다.
물론 쾌락 위주로 섹스를 즐기는 경우는 포함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조철봉은 쾌락을 즐기려고 섹스하지는 않았다.
섹스는 남녀관계의 정점이자 결론이며 새로운 시작이다.
그 시작이란 끝내는 것이냐 또는 완전한 연인으로 다시 시작하느냐의 두가지
선택밖에 없는 것이 문제이긴 하다.
조철봉은 시선을 내린 애진의 콧잔등을 보며 잠깐 생각했다.
가슴이 가볍게 고동쳤고 열기가 조금 올랐다.
이 정도의 들뜬 기분에서는 만사가 낙관적으로 펼쳐진다.
조철봉의 머릿속에 바로 어젯밤 오목대의 벤치에서 잠깐 나눴던 사랑의 행위가 펼쳐졌다.
몸 위에 올라 격렬하게 흔들던 그 여자가 바로 눈 앞에 있는 것이다.
애진도 아까 화랑에서 조철봉을 본 순간부터 그것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조철봉은 애진의 드러난 두 귀가 붉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애진씨.”
조철봉이 불렀지만 애진은 머리를 들지 않았다.
대신 앞에 놓인 물잔을 쥔 두손을 웅크렸다.
손가락도 다 펼쳐 보이기가 부끄럽다는 무의식적 반응이다.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마침 그렇게 잘 말해 주었어. 애진씨만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
애진이 퍼뜩 머리를 들었지만 시선은 비껴갔다.
예상했던 대로 얼굴이 잔뜩 붉어져 있었다.
“그럼 애진씨가 서울로 올라와야겠지.”
그러자 그때서야 애진이 조철봉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직 입을 열지는 않는다.
조철봉이 정색했다.
“내 애인이 되는 거야.
일주일에 한번,
열흘에 한번 만나도 돼.
난 그것으로도 만족해.”
“… ….”
“난 당신을 좋아해.
솔직히 애진씨를 안기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도 치르겠어.”
가라앉아 가던 애진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고 시선도 내려졌다가 기를 쓰듯이 올라왔다.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나한테 주겠다는 약속, 지금도 유효한 거지?”
그러자 애진이 붉어진 얼굴로 눈을 흘겼지만 대답하지는 않았다.
“좋아. 그럼 결정했다.”
조철봉이 다시 정색하더니 애진을 똑바로 보았다.
“국제병원에다 명현이 수술 수속까지 다 마쳐 놓았어.
여기 전주병원에서 기록을 빼내 보냈고 그쪽은 병실까지 이미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어.”
조철봉이 애진의 앞에다 서류를 내려놓았다.
국제병원 영수증이다.
“그리고 명현이 입원할 동안 할머니도 올라가실 테니까 집도 하나 준비했어.
물론 석달 동안 사실 집이야.”
다시 애진의 앞에다 부동산 서류를 내려놓은 조철봉이 이번에는 봉투 하나를 얹어놓았다.
“이건 3억원이야. 병원비는 다 냈으니까 앞으로 당분간 살 생활비지.”
(1558) 언제나 꿈을 꾼다-24
이애진이 이런 상황을 꿈이라도 꾸었겠는가?
세상을 오래 살수록 인간관계가 타산으로 엮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긴 그래야 제대로 된 사회가 영위되기도 하지만 자신과 상관없는 일에 나서거나
희생하는 인간은 점점 드물어진다.
조철봉도 막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기 전에 서울 시내에서 버글대는 수백만 인파를 보고
기가 질린 적이 있었다.
도대체 저 많은 인간들이 어떻게 다 먹고 살지?
하는 의문이 떠올랐고 바로 기가 죽었다.
가끔 시골에도 다녀봤지만 거기에서 이뤄지는 벼농사로는 저 많은 군상을 먹이기에
턱도 없이 부족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 시간이 지나고 나서 인간들을 찬찬히 보니까 다 바쁘게 오갔다.
밥 굶고 다니는 인간은 없는 것 같았다.
철물점, 안경점, 가구점, 양장점, 신발가게, 전자제품가게.
그 수많은 가게들 중 쌀가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다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쌀가게 주인은 신발도 사고 가구도 사야 되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신발가게 주인은 신발을 팔아서 쌀을 사 먹는다.
어느 것 하나 거저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
다 대가가 있는 것이다.
그때 애진이 입을 열었다.
“이게 도대체 뭐야?”
애진의 목소리는 떨렸다.
얼굴은 이제 하얗게 굳어졌고,
애진은 앞에 놓인 서류에 시선도 주지 않으려고 했다.
“나한테 왜?”
하고 애진이 다시 물었을 때 조철봉이 정색했다.
“그냥 받아.”
그러고는 덧붙였다.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러니까.”
애진이 다시 입을 벌리려고 했으므로 조철봉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유를 꼭 대라면 좋은 일 한번 해보려고 그러는 거야.”
“…….”
“마침 상대가 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되었고.”
“…….”
“네가 그런 꿈을 꾸었을 리는 없지만 그냥 꿈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해버려.”
“…….”
“그렇다고 내가 미친 놈이나 바보는 아냐. 아주 철저한 놈이지. 본래 사….”
사기꾼 출신이라고 말할 뻔했다가 멈춘 조철봉이 심호흡을 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
“그냥 받아. 그리고 고맙다고 인사나 자연스럽게 해주라.”
“…….”
“아까 네 몸을 담보로 하는 것처럼 말했는데 그건 네가 황당하게 생각할까 봐서 그런 거야.
네가 주기 싫으면 말아.”
그러자 애진이 시선을 내렸다가 들었다.
“줄게.”
그러더니 덧붙였다.
“이거 아니라도 내가 준다고 했잖아?”
“그럼 됐어.”
“명현이 기록을 다 보냈다고?”
하면서 그제서야 서류를 들춘 애진이 국제병원 영수증을 들더니 바로 주르르 눈물을 쏟았다.
“고마워. 자기야.”
“천만에.”
“수술비가 3천만원이 나온다고 해서 내가 신장이나 눈을 팔아 보려는 생각까지 했어.”
“그럼 안 되지.”
정색한 조철봉이 눈을 크게 떴다.
“네가 섹스할 때 그 눈이 얼마나 섹시한데. 어젯밤에도….”
“고마워.”
조철봉의 말을 자른 애진이 손등으로 눈물을 닦더니 딸꾹질을 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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