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4. 도망자(10)
(1501) 도망자-19
조철봉이 안기준의 소식을 들은 것은 월요일 오전이었다.
출발하기로 했던 안기준이 종적을 감추자 최갑중이 수소문을 해서 알아낸 것이다.
“그것 참.”
갑중의 보고를 받은 조철봉이 난감한 표정을 짓고 물었다.
“지금 안기준씨는 어디에 있다구?”
“강남경찰서 유치장에 있습니다.”
“방법이 없을까?”
“없습니다.”
그렇게 물을 줄 알았다는 듯이 금방 대답한 갑중이 덧붙였다.
“당좌가 25억이나 되니까요.”
“몇명인데?”
“17, 18명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조철봉은 입맛을 다셨다.
채권자가 많을수록 합의가 아려운 것이다.
“너하고 커피숍에서 헤어지고 나서 바로 잡힌 거야?”
정색한 조철봉이 묻자 갑중은 머리까지 저었다.
“헤어지고 나서 바로가 아닙니다. 한참 있다가 불심검문에 걸린 것 같습니다.”
그런 말은 듣지 않았지만 갑중이 열심히 말했다. 거짓말은 말이 긴 법이다.
“저녁 때 숙소 근처에서 잡힌 모양입니다.”
“변호사는 선임되었나?”
“그건 아직 모릅니다.”
“지금 면회할 수는 있겠지?”
하고 조철봉이 손목시계를 보는 시늉을 했으므로 갑중은 입맛부터 다셨다.
그러나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알아보지요.”
그리고 그로부터 두시간쯤 후인 오전 11시경에 조철봉과 갑중은
강남경찰서 조사실 안에서 안기준과 마주앉아 있었다.
조철봉은 변호사를 선임해서 동행했기 때문에 안기준이 유치장 밖으로 나온 것이다.
“조사장, 면목 없네.”
차분한 표정의 안기준이 조철봉에게 말했다.
변호사 이덕만은 이른바 거물급이다.
조철봉으로부터 사전 설명을 듣더니 두말 않고 맡았다.
둘의 인사가 건성으로 끝났을 때 이덕만이 안기준에게 말했다.
“상황은 대충 알고 왔지만 어디 안사장님의 직접 설명을 들읍시다.”
이덕만이 자리를 고쳐 앉으며 말했으므로 조철봉과 갑중은 양해를 구하고 조사실을 나왔다.
복도의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온 갑중을 향해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인마, 그런 말도 있지 않아? 주려면….”
“주려면 홀랑 벗어 주라는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갑중이 떫은 표정으로 물었다.
조철봉이 경찰서로 오기 전에 변호사 선임을 하자 갑중은 반대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끌려 들어가는 것 같다는 눈치를 대놓고 보이고 있다.
갑중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낮게 말했다.
“인마, 내가 어떻게 해서 재산을 모았는지 네가 제일 잘 알지 않아?”
갑중은 눈만 껌벅였고 조철봉은 한모금 커피를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사기 치고 강도질까지 해서 모은 돈이다.
물론 나쁜 놈만 골라서 빼앗아 왔지만 난 내 재산이 내것 같지가 않아.
실감이 나지 않는단 말야.”
“… ….”
“돈 싸 짊어지고 무덤으로 갖고 갈거야?
난 악착같이 돈 모아 놓고만 있는 놈들을 보면 한심하더라.”
그러더니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모은 돈 쓸 거다. 저기 안기준씨 같은 인간한테 쓰는 돈은 아깝지가 않아.
앞으로는 쓰면서 살거다.”
어깨를 편 조철봉이 갑중을 보았다.
“너도 써, 인마. 여자한테라도.”
(1502) 도망자-20
안기준은 구치소로 옮겨진 지 보름 만에 출소했다.
변호사 이덕만의 역량도 작용을 했지만 조철봉이 어음을 발행하여 채권자들과 합의를 한 것이다.
이른바 빚잔치를 한 것인데 25억4천만원 채무를 9억5천만원으로 막았다.
채권자 사정이야 다 딱하고 절박하지만 조철봉 입장으로는 나 모른다 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화나면 다 때려치우겠다면서 몇번 자리를 차고 일어났더니 그렇게 깎였던 것이다.
어쨌든 안기준은 어음이 걸려 있었지만 일은 할 수가 있게 되었다.
부도가 난 사업가가 재기하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도무지 주변에 그런 인사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안기준은 저녁 무렵에 출소했는데 구치소 앞에는 소문을 들은 친구 여러명과 부하 직원들
그리고 조철봉과 최갑중, 거기에다 대구에서 상경한 어머니까지 오셨다.
출소한 안기준은 먼저 조철봉의 손을 움켜쥐고 몇번이나 인사를 했다.
그에게 조철봉은 생명의 은인이나 같을 것이다.
황토 침대의 리베이트만 주는 바람에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도록 만들었던 조철봉이다.
그날 다 같이 식당으로 몰려가 저녁 식사를 하고 나서 헤어졌다.
안기준과 어머니 둘만 남겨놓고 흩어진 것이다.
모두 부모 자식이 있는 처지라 두 모자에게 시간을 내주려는 의도였다.
“성규는 성남으로 이사를 갔다.”
둘이 남았을 때 어머니가 말했다.
어머니는 안기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내가 너 오늘 나온다고 그집에다는 말하지 않았어.”
그집이란 김수정을 말한다.
어머니는 회사가 부도나기 전부터 김수정을 며느리로 대하지 않았다.
고부간 갈등이 심해서 일년에 한두번 얼굴을 볼 정도였다.
택시 정류장으로 나란히 걸으면서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성규, 민규한테는 네가 시킨 대로 베트남에 갔다고 했는데 어떻게 할 거냐? 만날테냐?”
안기준이 눈만 껌벅였으므로 어머니는 길게 숨을 뱉었다.
“자식도 크면 다 너처럼 된다. 다 제자식부터 챙기게 되는 거지. 부모 맘은 몰라.”
“… ….”
“내리사랑이란다, 그것이.”
“… ….”
“경희는 내가 데리고 있다.”
안기준이 시선을 들었고 어머니는 지친 표정으로 웃었다.
“그래. 난 밤차로 내려갈 테니까 넌 애들 만나고 내려 오려무나.”
“어머니.”
“내가 경희를 데리고 있으니까 내려오기는 하겠구나.”
“어머니.”
“불쌍한 놈.”
그러더니 멈춰선 어머니가 손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았다.
밤이어서 어머니의 눈물은 보이지 않았다.
“난 네 놈이 그 좁은 오피스텔에서 경희하고 같이 지냈던 걸 생각하면서 매일 울었다.”
“… ….”
“지지리도 못난 놈.”
“어머니, 내일 내려갈게요.”
그러자 어머니가 손가방에서 쪽지를 꺼내 내밀었다.
“성규, 민규 학교를 찾아서 적어놨다. 네가 집으로 찾아가지는 못할 것 같아서.”
“고마워요, 어머니.”
“네 아버지도 기다리고 계실 테니까.”
다시 발을 뗀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애들 만나고 바로 내려와.”
그러고서 어머니는 다가온 택시를 잡더니 탔다.
택시 안에서 어머니가 다시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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