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3. 도망자(9)
(1499) 도망자-17
회의가 끝난 조철봉과 통화 연결이 되었을 때는 오전 11시가 되어갈 무렵이었다.
“아이구, 선배님.”
조철봉이 반갑게 받았으므로 안기준은 가늘게 숨을 뱉었다.
예민한 상태여서 상대방의 응답 한마디만 들어도 상황을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일이 잘된 것 같다.
그때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잘 되었습니다. 출입국관리소쪽에 다시 한번 확인을 했더니 선배님은 이상이 없습니다.
안심하고 출국하셔도 되겠어요.
기소중지가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출국금지가 다 되는 건 아니라고 하더구만요.”
“그런가?”
“하지만 좀 서둘러야겠습니다. 언제 출국금지가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렇지.”
“그럼 제가 최갑중이를 보낼 테니까 상의하시고 나서 곧 출국하시지요.”
“고마워. 내가 이 은혜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거야.”
“제가 선배님같은 경영자가 필요해서 그런 겁니다. 잘 부탁합니다.”
“최선을 다하겠네.”
“그럼 최갑중이하고 약속을 정하시지요.”
그래서 안기준은 조철봉의 심복 최갑중과 오후 2시에 시내에서 만났다.
갑중은 비행기표에다 여비로 3천달러나 가져왔으므로 안기준은 감격했다.
“호찌민공항에 내리시면 저희 직원이 나와 있을 겁니다.”
갑중이 말했다.
“숙소는 교외의 단독주택을 준비해 놓았는데 가정부는 베트남 여자지만 한국요리도 잘 합니다.”
“그, 그렇게까지.”
“부품 공장은 건물은 다 준비 해놓았으니까 설비만 하면 됩니다.
사장님을 도와서 같이 일하게 될 직원들도 베트남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갑중이 탁자 위에 서류 뭉치를 내려놓았다.
“부품공장 계획안이니까 검토하시고 직원들하고 상의하시지요.”
“열심히 하겠다고 조사장께 전해주게.”
“예, 사장님.”
“최사장도 고맙네.”
“아닙니다. 저는.”
그러고는 갑중이 멋쩍은 얼굴로 안기준을 보았다.
“다 조사장님이 결정하신 일입니다.”
하마터면 또 눈물을 쏟을 뻔했으므로 안기준은 머리를 돌렸다.
베트남으로의 출국 일자는 일요일 오전이었다.
토요일에 성규와 민규를 만나기로 했으므로 그 다음날에 떠날 작정이었다.
오늘이 목요일이니 사흘 후가 된다.
갑중과 커피숍 앞에서 헤어진 안기준은 어깨를 펴고 심호흡을 했다.
시계를 보니 오후 4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배가 고파졌으므로 식당을 찾으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안기준의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잠깐 저 좀 보시지요.”
몸을 돌린 안기준은 앞에 서 있는 두 사내를 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저, 신분증 좀 보여 주시지요.”
하고 그중 나이든 사내가 손을 내밀며 말했지만 안기준은 가만있었다.
“저, 경찰입니다.”
사내가 다시 말했다.
평범한 인상이다.
싸구려 점퍼 차림에다 발에 편한 캐주얼화를 신었다.
안기준은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으므로 이를 악물었다.
이들은 우연히 불심검문을 한 것 같다.
옆을 지나가다 불쑥 검문을 했을지도 모른다.
미행했다면 커피숍에 있을 때 했겠지.
그런데 그 우연으로 내 인생이 다 끝나 버렸다는 것을 이들은 알까?
그때 사내가 손을 내민 채 바짝 다가섰다.
(1500) 도망자-18
부모와 자식 중에서 누가 더 소중하냐고 묻는다면 대부분 웃고 넘기거나 무시한다.
그것이 가장 무난한 방법이다.
구구절절 이유를 붙이고 선후를 따져 어느 한 쪽을 택해서 분란을 자초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낳아주신 부모, 그리고 낳은 자식들 사이에 낀 입장을 말하고 있다.
지금,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된 처지가 된 안기준이 그렇다.
머리에 부모와 자식이 번갈아 떠오르고 있다.
보통 사람들의 인생사에 있어서 수감되었다는 사실은 가장 큰 사건 중의 하나에 속할 것이다.
이 절박하고 절망적인 때에 떠오르는 것은 결국 위쪽 부모, 아래쪽 자식이었다.
목요일 저녁에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된 안기준이 제일 먼저 연락을 한 곳이 대구의 어머니한테였다.
그야말로 피눈물이 났지만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70 가까운 나이의 어머니가 놀라 명이 단축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했다.
동생이나 친구, 또는 은혜를 베풀어 주었던 조철봉한테도 연락을 안 했다.
상황을 변동시킬 수 없는 바에야 가만두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기도 했다.
어머니한테는 다음날인 금요일 아침에 연락을 했는데 어머니는 점심 무렵에 도착했다.
연락을 받자마자 달려온 것이다.
“아이고, 이놈아.”
면회실의 쇠창살 밖에서 안기준의 모습을 본 어머니가 흐느꼈다.
마치 쇠창살이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놓은 것처럼 끔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머니를 안심시키려고 얼굴에 웃음을 띠었던 안기준이 어금니를 물었다.
“이놈아, 밥은?”
어머니는 일제시대부터 6·25, 보릿고개를 다 겪었다.
그래서 언제나 첫마디가 밥이었는데 지금은 오죽하겠는가?
안기준은 대답해야만 했다.
“먹었어요, 어머니.”
“이놈아, 그럼 이제는….”
어머니는 어떻게 될 것이냐고 묻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유치장 안에 갇혀 있는 자식한테
그렇게 묻는 것이 선후가 거꾸로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그때 안기준이 정색하고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
어머니가 눈을 크게 뜨고 창살에 바짝 붙었으므로 안기준은 차분하게 말했다.
“어머니가 해 주셔야 할 일이 있어요.”
“뭔데, 말해라.”
어머니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해줄 일이 없는 것이다.
능력이 있었다면 진즉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돈, 돈뿐이다.
어머니의 시선을 받은 안기준이 말을 이었다.
“어머니, 내일 오후 3시에 제가 애들 만나기로 했어요.”
어머니는 눈만 크게 떴고 안기준은 또박또박 말했다.
“애들 아파트 옆에 비디오가게가 있거든요? 그 옆에 골목이 있어요.”
“… ….”
“그 골목에서 성규하고 민규를 만나기로 했단 말입니다. 오후 3시에요.”
“… ….”
“어머니가 내일 제 대신 거기로 나가주세요.
걔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 ….”
“걔들한테 아빠가 베트남에 사업하러 나갔다고 전해주세요.
일년쯤 후에 돌아온다고 하시고 용돈을 좀 주세요.”
그러고는 안기준이 창살 틈으로 돈과 메모지를 어머니한테 내밀었다.
“그리고, 어머니, 여기 오피스텔 열쇠하고 약도가 있어요.
거기에 경희가 있는데 어머니가 데려가세요.
경희는 어머니가 꼭 데리고 계셔야 합니다.
제가 나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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