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강안남자

451. 도망자(7)

오늘의 쉼터 2014. 9. 5. 22:57

451. 도망자(7)

 

 

(1495) 도망자-13

 

 “드십시오.”

하면서 조철봉이 다시 안기준의 잔에 소주를 채웠다.

 

서초동의 일식집 ‘은하’는 비싸기로 소문난 집이지만 그만큼 맛과 서비스도 일품이었다.

 

둘은 다다미방에서 생선회에다 소주를 마셨는데 상에는 안주가 가득했다.

 

안기준이 소주를 한 모금 삼켰다. 절주해왔지만 오늘 같은 경우까지 마시지 않는 것은 아니다.

 

고통을 잊으려고 술 기운을 빌리지 않는다는 의도였기 때문이다.

 

소주를 두 병째 비울 때까지 딴 이야기만 하던 조철봉이 정색하고 안기준에게 말했다.

“선배님, 제가 이야기 들었습니다.”

안기준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희미하게 웃었다.

“어음 막은 이야기 말입니다.”

“어음 막다니?”

“부도나기 사흘 전에 어음 막으신 것 말씀입니다.”

그러자 안기준이 쓴웃음을 지었다.

 

잔에 남은 소주를 입 안에 털어 넣은 안기준이 조철봉을 보았다.

“그게 어떻다고? 당연한 일인데.”

“그 이야기를 듣고 선배님을 뵙고 싶더라니까요.”

“봐서 뭐 하려고?”

하면서 안기준이 회를 집어 먹었다.

 

부도나기 사흘 전에 안기준은 베트남에 판 자동차 부속대금 5억원을 네고했다.

 

네고란 물품을 선적하고 나서 서류를 갖춰 은행으로 가서 신용장에 명시된 금액을 찾는 것을 말한다.

 

그때는 자금 사정이 급박했던 때여서 오전에 5억원을 네고했는데 그날 어음 막을 금액이

 

4억6000만원이나 되었다.

 

어음 막고 나면 잔금이 4000만원밖에 남지 않는 것이다.

 

그날 오후 5시경이 되었을 때 안기준은 대한은행 지점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안 사장님, 전데요.”

지점장의 목소리가 다급했으므로 안기준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요즘은 자꾸 그랬다.

“웬일입니까?”

안기준이 묻자 지점장이 서둘러 말했다.

“저기, 한 상무가 오전에 국제 은행에서 5억을 네고했다는데 우리 은행에서

 

오늘자로 만기가 되는 어음 4억6000을 지금까지 막지 않네요.

 

이거 어떻게 된 일입니까?”

“…….”

“한 상무는 사무실에 없다고 하는데, 연락도 안 되고 말입니다.”

“…….”

“사장님, 듣고 계십니까?”

“예, 듣고 있어요.”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해놓고는 안기준이 심호흡을 했다.

“내가 확인 해보고 연락 드리지요.”

“꼭 연락해주셔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안기준은 지점장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었다.

 

한용수 상무는 자금담당으로 성실한 성품이다.

 

안기준과는 10년 동안 한솥밥을 먹어온 처지라 눈빛만 봐도 속을 읽는다.

 

자리에서 일어선 안기준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반년 전부터 자금 사정이 악화되어 온 터라

 

은행은 대출을 해 주지도 않았고 오히려 회수해가는 상황이었다.

 

세상사는 다 그렇다.

 

그것을 모르고 서운해 한다면 사업을 할 자격이 없다.

 

안기준은 한용수가 네고한 돈을 갖고 도망쳤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점장이 말하는 분위기는 딱 두 가지 경우를 예상하는 것 같았다.

 

하나는 한용수가 돈을 들고 튄 경우고,

 

또 하나는 사장하고 둘이 짜고 돈을 갖고 있는 경우다.

 

그 외에는 없다.

 

회사가 망하기 직전인 것이다.

 

 

 

(1496) 도망자-14 

 

 가한용수의 전화가 왔을 때는 5시반이었고 그때는 이미 난리가 났다.

 

대한은행에서 전화를 해대는 통에 바깥 사무실의 뒤숭숭한 분위기가 사장실까지 전해졌다.

“사장님, 접니다.”

한용수가 그렇게 말했을 때 안기준은 가만있었다.

 

그때 한용수의 말이 이어졌다.

“사장님, 저, 술 한잔 마셨습니다.”

“뭐? 술?”

평소에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한용수였다.

 

그래서 접대할 일이 있으면 경리부장이 대신 나갔다.

 

골프는 좋아해서 일주일에 한번은 꼭 필드에 나간다.

 

다시 안기준이 입을 다물었을 때 한용수가 술기운이 번진 목소리로 말했다.

“사장님.”

“말해. 왜 그러는 거야?”

“희망이 없습니다.”

“…….”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안기준은 소리죽여 숨을 뱉었다.

 

다 내 책임인 것이다. 일을 너무 벌렸다.

 

베트남과 태국, 중국에까지 투자를 했다가 반도 건지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적자로라도 수출 물량을 늘려 자금을 회전시켜야 했다.

 

그러다 물량이 줄어들면서 자금 압박이 시작된 것이다.

“사장님.”

다시 안기준을 부른 한용수의 목이 메어 있었다.

 

이만 악물고 있는 안기준의 귀에 한용수의 말이 울렸다.

“오늘 부도 내십시다.”

“…….”

“제가 5억을 잔 수표로 찾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라도 갖고 도망치시지요.”

“…….”

“그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

“오늘 어음 막고 나면 사흘 후에 또 2억이 돌아옵니다.

 

그리고 월말에 3억.”

“…….”

“대한은행에서 3억 대출해준다고 했지만 믿을 수가 없습니다.”

“…….”

“사장님.”

그러더니 한용수가 짧게 흐느껴 울었다.

 

술 못마시는 인간이 좀 많이 마신 모양이었다.

 

한용수가 말을 이었다.

“사장님. 이걸 갖고 튀시지요. 뒷정리는 제가 알아서 할테니까요.”

거지다.

 

그때 안기준의 머리에 떠오른 단어는 딱 두 자, 거지였다.

 

거지가 될 것이었다.

 

아파트도, 공장도, 선산까지 다 은행에 담보로 들어가 있어서 부도를 내면 대번에 거지가 된다.

 

꼬불쳐 놓을 생각도 못했고 여유도 없었다.

 

이윽고 안기준이 입을 열었다.

“한상무. 대한은행 어음 막아.”

한용수는 가만있었고 이제는 안기준의 목이 메었다.

 

헛기침을 한 안기준이 말을 이었다.

“그냥 끝까지 갈거야.”

“…….”

“한상무가 내 생각해준 것, 잊지 않을게. 내가 죽을 때까지.”

“…….”

“고마워.”

그때 전화가 끊겼다.

 

그리고 그날 저녁 6시경에 한용수는 대한은행 어음을 막았다.

 

그리고 대한은행도 대출 3억을 일으켜주지 않았다.

 

서류가 미비하다는 이유였는데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사흘 후에 대한은행에서 2억 부도를 냈고 줄줄이 터져버린 것이다.

 

부도 액수는 당좌, 약속어음 합해서 50억. 담보로 들어간 부동산을 제외한 금액이었다.

 

그때 조철봉의 목소리가 안기준의 생각을 깨뜨렸다.

 

조철봉이 정색하고 안기준을 보았다.

“제가 선배님을 뵙자고 한 건 다름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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