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9. 도망자(5)
(1491) 도망자-9
다음날 오후 안기준과 아버지 안영규는 금호강가에 서 있었다.
12월 중순이어서 강바람은 찼고 살얼음이 언 강가에는 그들 둘뿐이었다.
아버지는 등산용 지팡이를 쥐고 강가의 얼음을 사정없이 깨뜨렸다.
“에이, 더럽군.”
아버지가 깨진 얼음 사이로 떠다니는 라면 봉지와 플라스틱 병, 종잇조각을 흘겨보며 말했다.
“저쪽으로 가자.”
다시 발을 뗀 아버지의 뒤를 따라 안기준은 잠자코 걸었다.
손에는 케이스를 쥐었다. 경희를 강물에 뿌리려는 것이다.
어제부터 경희를 강물에 뿌리자던 아버지는 아침이 되자 서둘렀다.
금호강이 가장 적당하다면서 위치까지 잡고 온 것인데 안기준은 굳이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날씨가 좀 춥다면서 미적거려 보았지만 아버지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어제 저녁 경희를 잘 먹였던 어머니는 오늘 한마디도 거들지 않았다.
안기준이 케이스를 들고 나갈 때 잠깐 이리 내라고 하더니
3초쯤 품에 안았다가 도로 내주었을 뿐이다.
울지도 않았다.
“어디.”
하면서 다시 발을 멈춘 아버지가 지팡이로 얼음을 깨었다.
얼음 깨지는 소리가 마치 가슴 터지는 소리처럼 들렸으므로 안기준은 가슴에 손을 붙여 보았다.
그러고는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머리만 돌린 아버지에게 안기준이 말했다.
“날씨가 너무 추운데요, 꼭 이렇게 추운날….”
아버지가 다시 몸을 돌리더니 이번에는 더 세게 얼음을 깨뜨렸다.
그 등에 대고 안기준이 말을 이었다.
“아버지, 제가 2년이나 데리고 있었는데요.
웃으시겠지만 경희가 꼭 같이 있는 것 같았거든요.”
“누가 웃어?”
하면서 아버지가 몸을 돌려 안기준을 보았다.
그 순간 안기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던 것이다.
“이 못난 놈.”
아버지가 눈을 치켜뜨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버지가 이렇게 눈물을 보인 것은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보고 처음이다.
이 양반은 자식 앞에서 화장실 출입도 안 했고 옷도 벗지 않았다.
자식을 똑바로 보면서 눈물을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그때 아버지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강이 너무 더럽다.”
“예, 아버지.”
아버지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더니 몸을 돌렸다.
“다음에 깨끗한 강을 찾아 뿌리자.”
“예, 아버지.”
안기준은 강기슭으로 향하는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이제는 바람이 등에 닿았으므로 춥지 않았다.
둘은 버스를 타고 집에 닿을 때까지 한마디도 주고 받지 않았다.
서로 외면했지만 안기준의 마음은 포근했다.
“아이고, 왜 이제 와?”
집안으로 들어섰을 때 어머니가 나무라듯 말했다.
그러고는 안기준이 들고 있는 케이스를 보더니 물었다.
“보냈니?”
“아니.”
안기준이 케이스를 들어 보였다.
“날씨가 춥고, 강이 너무 더러워서.”
그러자 어머니가 서둘러 케이스를 받아 안았다.
어머니의 얼굴에 생기가 떠올랐다.
“아이고 내 새끼.”
어머니가 케이스를 가슴에 품었다.
“오늘 얼마나 추웠을꼬. 내 새끼가.”
(1492) 도망자-10
또 도망, 안기준은 아버지께 인사도 못하고 도망을 나왔다.
밤 9시반, 빚쟁이가 그 시간에 대구의 본가까지 찾아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계십니까?”
문밖에서 떠들썩한 목소리로 부르는 소리를 들은 순간 안기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동작은 민첩했다. 벽에 걸어 놓은 옷을 입고 가방을 정리하는 데 2분도 안 걸렸다.
그 사이에 아버지, 어머니가 교대로 문 쪽으로 나가 누구냐고 확인하면서 시간을 벌어 주었다.
어머니가 현관에 놓인 신발을 집어다 주면서 눈물이 고인 눈으로 보기만 할 뿐 입술을 떨며
말은 뱉지 못했다.
“어머니, 또 올게요.”
안기준이 그렇게만 말했다.
“아니, 도대체 댁이 누군데?”
그때 아버지는 버럭 문 안에서 소리쳤다.
“이 시간에 여기 와서 누굴 찾아?”
“안기준씨 아버님 되시지요?”
밖에서 그렇게 묻는 소리도 들렸다.
“저, 장동철이라고 합니다. 잠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장동철?”
장동철, 안다. 부자재 업체 사장으로 어음 1억7000만원이 걸려 있다.
장동철은 어음을 은행에다 내지 않고 갖고 다니면서 안기준을 만나려고 기를 썼다.
안기준이 꼬불쳐 둔 재산이 있는 것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사람은 다 제 기준으로 타인을 본다.
제가 그렇게 살아왔으니 남도 그런 줄 안다.
장동철은 알부자였다.
사무실 직원까지 합쳐 10명도 안 되는 아웃박스 공장을 운영하면서
지방에 건물이 4동이나 있었고 마누라 명의로 임야도 사 놓았다고 자랑했었다.
“어머니, 그럼.”
건넌방 유리창 문을 열고 창문을 통해 빠져나가면서 안기준이 말했다.
“기준아, 여기.”
어머니는 어느새 준비 해놓은 모양이었다.
안기준이 창밖으로 나가 섰을 때 손에 쥔 지폐를 내밀었다.
“받아, 어서.”
“아, 글쎄. 아버님, 문이나 열어 주십쇼!”
하고 장동철이 버럭 소리쳤으므로 안기준은 돈을 받았다.
그러고는 한 손에는 옷가방, 또 한 손에는 경희가 든 케이스를 쥐고 뒷문으로 나갔다.
뒷문 밖은 산이었고 밑은 축대였다.
그래서 장동철은 뒤로 나갈 구멍이 없는 줄로 알았을 것이다.
산으로 뛰어 내린 안기준은 낙엽을 헤치고 걸었다.
산비탈을 돌자 시야가 탁 트이더니 어둠에 덮인 논 건너편으로 도시의 불빛이 보였다.
“경희야, 아빠하고 같이 있을까?”
논길을 걸으면서 안기준이 경희에게 물었다.
바람이 세어서 옷자락이 펄럭였다.
“아빠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몰라?”
“…….”
“아빠도 네 옆으로 가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
“아빠하고 둘이서 바람 타고 이쪽 저쪽 날아 다닐까?”
추웠다.
그래서 안기준은 서둘러 논길을 걸어 동네 길로 들어섰고 마음이 급한 터라
지나가는 택시를 잡았다.
“어디로 모실까요?”
운전사가 백미러로 뒤를 보며 물었으므로 안기준은 헛기침부터 했다.
갈 곳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기, 역으로 가십시다.”
“예, 동대구역으로.”
운전사가 차에 속력을 내면서 말했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습니다.”
안기준은 주머니에서 어머니가 준 돈을 꺼내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10만원쯤 된다.
'소설방 > 강안남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451. 도망자(7) (0) | 2014.09.05 |
---|---|
450. 도망자(6) (0) | 2014.09.05 |
448. 도망자(4) (0) | 2014.09.05 |
447. 도망자(3) (0) | 2014.09.05 |
446. 도망자(2) (0) | 2014.09.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