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 도망자(6)
(1493) 도망자-11
맨정신으로 견디겠다고 작정한 후부터 안기준은 술을 끊었다.
생각이야 수시로 났지만 참을 수 있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있다면 두 가지. 비관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맨정신일 때 가장 죽음과 가깝게 다가서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고 이것이 조금 더 계속되면 목을 매거나 창밖으로 몸을 던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떨렸다. 맨정신으로 죽어야 그래도 인생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도 들었다.
또 하나는 긍정적인 관점. 맨정신으로 견디고 견디고 견디어 내서 마침내 극복할지도 모른다는
기대. 재기할 가능성은 없다손치더라도 극복해 낸다는 고집. 이 시련, 이 외로움과 고통을
짓밟아 버리고 싶다는 오기. 그러자 아플수록 그것을 지근지근 씹으면서 즐기겠다는 가학성
욕망까지 일어났다.
다시 오피스텔로 돌아온 지 사흘째 되는 날 오전. 벽에 기대고 앉아 있던 안기준은 노크 소리에
머리를 들었다.
“누구요?”
문 쪽으로 다가가면서 묻자 누군가 대답했다.
“사장님, 접니다.”
귀에 익숙한 목소리. 문을 연 안기준은 웃고 서 있는 최경일을 보았다.
“사장님.”
웃고는 있었지만 최경일의 얼굴은 상기되었다.
“들어와.”
안기준이 비켜서자 최경일은 안으로 들어섰다.
최경일은 동화산업의 영업이사로 안기준의 심복이었다.
“여기 계셨구먼요.”
방 안에 엉거주춤 선 최경일이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면서 말했다.
최경일과는 15년 가깝게 같이 일했다.
이번에 부도가 났을 때 최경일은 외국 출장 중이어서 오늘 처음 만나는 것이다.
최경일에게 딱 하나밖에 없는 의자를 권한 안기준은 침대 끝에 앉았다.
“여기 어떻게 찾았어?”
안기준이 묻자 최경일은 정신을 차린 듯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았다.
“박 사장님이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자 안기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박 사장이란 황토침대의 총판으로 안기준과 같은 골프 회원이어서 아는 사이였을 뿐이다.
최경일은 안기준 주변의 모든 친지에게 접촉했던 것이 분명했다.
“나, 황토침대 그만뒀다. 원체 가격이 턱도 없이 비싸서.”
안기준이 웃음 띤 얼굴로 말하자 최경일은 머리를 끄덕였다. 여전히 정색하고 있다.
“예, 들었습니다.”
“하나도 못 팔았어.”
“예, 압니다.”
“외국으로 가고 싶지만 기소중지가 되어 있어서 그것도 틀렸어.”
“…….”
“외국에서는 노동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말야. 여기서는 어디.”
머리를 돌렸던 최경일의 시선이 화장품 케이스에 닿았다.
안기준은 최경일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때 화장터에서 경희를 화장시키고 나서 안기준은 유골 박스를 들고 내달려
최경일이 시동을 걸어 놓고 있는 차에 올라탄 것이다.
그러고는 화장장을 도망쳐 나왔다.
이 케이스도 최경일이 시내에서 사 갖고 온 것이다.
“사장님.”
케이스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최경일이 입술만 달싹이며 말했다.
“저, 그, 케이스를 가지고 오셨군요.”
“아, 당연하지.”
안기준이 떠들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1494) 도망자-12
가최경일은 만원권 지폐로 5백만원을 놓고 돌아갔다.
아직 직장을 잡지 못한 상태인데다 넉넉지 못한 살림의 최경일에게는 거금이었다.
아마 와이프 모르게 마련했을 것이었다.
안기준은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사양해도 기어코 두고 갈 테지만 받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주고도 싶었기 때문이다.
최경일에게는 체면 차리지 않아도 되는 사이였다.
놈은 다 안다.
그리고 이것이 놈과의 마지막 인연이 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었다.
최경일이 다녀간 다음날 안기준은 짐을 꾸려서 오피스텔을 나왔다.
이제 위치가 알려진 이상 최경일의 안내로 찾아올 놈들이 많을 것이었다.
와서 위로와 함께 봉투를 내놓고 홀가분한 표정으로 돌아가겠지.
그리고 얼마 후에는 다시 왕래가 뜸해진다. 안기준은 고속버스를 타기 전에
오피스텔을 빌려준 친구 유정규에게 전화를 했다.
“야, 고맙다. 오늘부터 오피스텔 비운다.”
그러자 놀란 유정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얀마, 너, 어디 가려고?”
“시골.”
“대구?”
“아니, 거기도 빚쟁이들이 찾아와서 못가겠어.”
“그럼 어딜 간다는 거야?”
“그냥. 산속에 빈집이 많다고 해서. 빈농가 말야.”
그러자 유정규가 가만있었다.
유정규는 안기준과 고등학교 동창으로 학원 영어선생이다.
안기준이 바쁜 척 서두르며 말했다.
“야, 출발시간 되었어. 내가 자리잡고 다시 전화할게.”
“너 인마, 꼭 연락할 거지?”
“글쎄, 한다니까.”
“애들 생각해, 인마.”
“전화 끊는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안기준은 길게 숨을 뱉었다.
오후 3시반이다.
대전까지 표는 끊었지만 연고가 있는 곳도 아니다.
대구는 부모 옆이라 거북했기 때문에 중간 지점을 택했을 뿐이다.
버스 시간이 한시간이나 남아 있었으므로 대합실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있던
안기준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에 전화를 해서 애들 목소리라도 듣고 싶은 욕심이 굴뚝처럼 솟아올랐다가
곧 마누라 김수정의 차가운 반응을 떠올리고는 심호흡을 했다.
공중전화 부스로 다가간 안기준은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세번 울린 후에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철봉이다.
“여보세요.”
“조사장, 나야, 안기준.”
“아이구, 선배님. 반갑습니다.”
전화를 받은 조철봉이 놀란 듯 목소리가 높아졌다.
상대방 분위기는 그 응답소리만 들어도 안다.
조철봉은 반기고 있다.
“지난 번에 제가 실례를 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선배님.”
조철봉이 열심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제가 술이나 한잔 사고 싶은데요. 오늘 시간 있으십니까?”
“오늘?”
예상 밖이었으므로 안기준은 난감했다.
고속버스 표까지 끊어 놓았지만 대전에서 누가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대전에서 다시 옥천쪽으로 가서 하룻밤 자고 시골의 버려진 농가를 찾아볼 작정이었던 것이다.
“선배님, 오늘 저녁 7시에 뵙지요.”
안기준이 망설이자 조철봉은 더 밀어붙였다.
이놈을 사기꾼이라고 부르는 동문들도 있지만 안기준이 보기에는 아니다.
지금은 이런 놈이 성공한다.
이윽도 안기준이 입을 열었다.
“그러지. 술 한잔 하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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