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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장 중국손님 (17)

오늘의 쉼터 2014. 9. 2. 17:02

제17장 중국손님 (17)

 

 

 

 

그는 한동안 묵묵히 앉았다가 주안상을 옆으로 치우고 가만히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춘추야.”

“네.”

“너도 짐작은 하고 있겠지만 아버지는 평생 가슴에 한을 품고 살아온 사람이다.

젊어서는 부왕이신 너의 조부께서 7백 년 나라 역사에 전대미문의 폐임금이 되어

대궐에서 쫓겨나는 것을 지켜보았고, 아울러 집안이 몰락하는 비통함과 그 과정에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여러 가지 추악하고 굴욕스러운 일들을 몸소 보고 겪게 되었다.

너의 할아버지는 왕위를 조카에게 빼앗기고 바로 이 방에 거처하시다가 불과 몇 달 만에

석연찮게 돌아가셨는데,

그때 나는 지금의 너보다 어린 나이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면서 기필코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원통함을 풀고 반드시 원수를 갚겠다고 하늘에 대고 맹세하였다.

그러자면 어떻게든 내가 세상의 인심을 얻어 보위에 오르는 길밖에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세상 일이란 게 어디 뜻대로만 되는 것이더냐.

나는 한낱 세도를 잃은 폐왕의 아들일 뿐이요,

나라의 모든 권능은 금왕 형제에게 있으니 내가 독기를 품으면 품을수록 형편은 점점 더 어려워져서

결국에는 동해 갯가로 유배도 갔고, 취산 암자에서 여러 해를 숨어 지내기도 하였다.

그런 중에 너의 외조부이신 금왕께서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를 금성으로 청하여

벼슬길을 열어주셨고, 그분의 간곡한 부탁으로 나랏일을 보게 되었던 것인데,

너의 어머니와 혼인을 한 후 내 존재를 두려워하는 자들의 모함으로 나 역시 관직에서 쫓겨나

여태까지 이렇게 살아오고 있으니 어찌 그 한이 작다고 할 것이냐.”

용춘은 난생 처음으로 자신이 살아온 얘기를,

그것도 자식 앞에서 털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춘추로선 이미 소문으로 들어 거의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그러나 춘추는 잠자코 아버지가 하는 얘기를 다소곳이 경청하였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아버지 대에서 모두 끝이 나야 한다.

원한은 사람을 망치기 쉽지만 뜻을 세우는 자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개들은 한 토막의 고기를 놓고 서로 이를 드러내며 다투다가도 범이 나타나면

꼬리를 감추고 도망가는 법이다.

장부로 세상에 났으면 큰 뜻을 품은 범이 되어야지 개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아비는 가슴속에 맺힌 한을 풀지 못해 오늘과 같은 지경에 이르렀거늘,

간곡히 부탁하거니와 너는 절대로 아비가 걸어온 어리석은 전철을 밟지 말아라.

전대의 모든 악연은 오로지 아비의 몫이다.

그렇게 알고 너는 앞으로 조정의 중신들과도 격의 없이 지내고, 백반이나 그의 자식들과도

허물없이 어울리거라.

황종과 대려는 번잡한 춤에 맞춰 연주할 수가 없다.

이는 그 음이 맞지 않은 탓이다.

장차 큰일을 할 사람은 작은 일도 능히 다스리고,

큰 공을 세울 자는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는 법이라 했다.

너는 지나간 과거지사나 자질구레한 범사에 연연하지 말고 가히 천하를 아우를 만한

원대함을 가슴에 품도록 해라.

이것이 아비의 유일한 바람이다.”

그것은 자식에게 당부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그렇게 살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는 소리이기도 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춘추는 용춘의 말을 귀담아듣고 나서 문득 운문산 기슭에서 만났던 두두리 거사를 떠올렸다.

그러자 황종과 대려가 언제쯤 울 것이냐던 그의 노랫소리가 실제로 들리는 듯 귓전에 가깝게 맴돌았다. 용춘이 춘추의 앞으로 무릎을 당겨 앉더니 아들의 손을 덥석 쥐고서 손등을 두어 차례 쓰다듬었다.

“원로에 몸조심하거라.”

“네, 아버지.”

“전날 집에 왔던 구칠의 집 약도를 받아둔 게 있으니 가져가거라.

낯선 고장에 가서 아는 사람이 있고 없고는 천양지차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용춘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고서 살그머니 춘추의 손을 놓았다.

“그래, 그만 물러가 쉬도록 해라.”

“시각이 야심합니다. 아버지도 그만 침소에 드십시오.”

“오냐, 알었다.”

춘추가 방을 나가고 나자 용춘은 밀쳐두었던 주안상을 다시 끌어당기고

자작으로 두어 잔 술을 거푸 들이켰다.

그리곤 심란한 표정으로 허공을 향해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

 

“녀석이 벌써 저렇게 자랐구나!

아, 내 어쩌자고 금쪽 같은 자식이 스스로 목숨을 걱정해야 하는

이런 한심한 지경에까지 왔더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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