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중국손님 (16)
임금의 윤허를 얻은 날 밤,
춘추는 비로소 아버지 용춘의 거소를 찾아갔다.
밤이 깊었음에도 내당의 등촉은 환하게 켜져 있었고,
들어오라는 허락을 얻고 문을 열어보니 용춘이 술상을 앞에 놓고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무슨 근심이 있으십니까, 아버님?”
춘추가 무릎을 꿇어앉으며 조심스레 묻자
용춘은 손에 들었던 잔을 내려놓고 아들을 바라보았다.
“중국에 가겠다고?”
이때까지도 춘추는 중국으로 가는 문제에 대해 용춘과 단 한 마디도 상의하거나
허락을 구한 일이 없었다.
이제 왕의 윤허를 얻었으니 아버지의 승낙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용춘이 미리 알고 물어온 것이었다.
“네, 아버지.”
춘추가 다소 겸연쩍은 듯이 대답하자
용춘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물었다.
“대륙은 지금 자고만 나면 칭제건원하는 무리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 제위를 넘보는 격변기다.
굳이 이러할 때 중국을 가고자 하는 이유를 세 가지만 말해보아라.”
그러자 춘추는 별로 머뭇거리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제일 큰 이유는 창업하는 나라를 구경해두고 싶습니다.
지난번 집에 오신 손님들의 얘기도 그러하지만 역선을 타고 중국을 다녀온 동시(東市)의 장사치들
얘기로도 이연이 세운 당의 세력이 꽤나 창성한 데가 있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굳이 당이 아니더라도 수나라의 뒤를 이을 세력이 언젠가는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나라든 집안이든 낡은 것이 쓰러지고 새로운 기운이 창성할 때는 반드시 그럴 만한 연유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에 반해 지금 우리 계림은 시조대왕께서 나라를 여실 때와 사정이 같지 않아서 산곡간에
농사짓는 촌부들조차도 공공연히 사직위허(社稷爲墟)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눈을 밝혀 새로이 일어나는 세력의 제도와 문물을 살피고
그 창성함의 근원을 헤아릴 수만 있다면 필경 나라에 큰 보탬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춘추의 대답은 물 흐르듯이 이어졌다.
“또한 저 개인으로서도 학문과 서책 속에서 접하지 못한 것들을 넓고 깊이 배우고 싶습니다.
세상을 읽는 눈과 살아가는 지혜가 어찌 반드시 글 속에만 있겠습니까.
일찍이 스승님들께서 말씀하시기를 백 권의 책에서 접하지 못한 바가 때로는
시정의 번잡함 가운데 있기도 하고, 한 수레의 경서가 말하지 못하는 것을
산천경개의 명미한 풍광 중에서 찾을 수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더군다나 장부는 젊어서 집 바깥을 많이 떠돌아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울안에 있으면 찾아오는 사람밖에 사귈 수가 없지만 스스로 울 밖을 나돌면
천하의 기재들을 두루 만나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서 춘추는 잠시 침묵한 끝에 약간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듯 말했다.
“아뢰기 민망하오나 소자는 만세후의 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라의 사신이 되어 중국 땅에 머물며 그곳 사람들과 두루 교분을 쌓아두고자 합니다.
만일 당이 수나라의 뒤를 이어 대륙을 다스리게 된다면 우리는 백제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한사코 당과 수교를 맺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일찍부터 당나라 조정과 친분을 쌓고 벗바리를 든든하게 해둔다면
다음에 누가 보위를 잇더라도 저를 함부로 대하지는 못할 것이 아닙니까.
이는 저의 불안한 장래를 확실하게 해두려는 포석입니다.
대륙을 토평하는 조정으로부터 미관말직이라도 받아만 둔다면
천군만마의 호위를 받는 것보다 오히려 안전하리라고 봅니다.”
춘추의 말이 끝나자 용춘은 짐짓 자세를 고쳐 앉으며 새삼스런 눈길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춘추의 나이 어느덧 스물. 5척 반의 단구에 대식가(大食家)로 살찌고 벌어진 어깨,
잘생긴 곳이라곤 미끈하게 뻗어 내린 콧날밖에 없는 용모였지만 영특한 머리와 차분하고
깊은 속은 어머니인 천명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평소 용춘은 춘추의 품성이 욱기와 과격함으로 가득 찼던 젊은 날의 자신을 닮지 않은 것에
퍽 다행스러워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신도 생각하지 못한 앞일까지 내다보는 것이
기특하다 못해 탄복스러울 지경이었다.
자식은 어느 날 갑자기 어른이 된다더니 과연 그렇구나 싶기도 하고,
일변으론 앞길을 닦아 호강은 시켜주지 못할망정 자식이 제 목숨까지 걱정하는 것을 보고
부모로서 가슴 한편이 말할 수 없이 아려오기도 했다.
“그런 일까지도 걱정을 하고 있었더란 말이냐……”
용춘이 참담한 어투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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