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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장 중국손님 (15)

오늘의 쉼터 2014. 9. 2. 16:37

제17장 중국손님 (15)

 

 

 

 

하루는 해거름에 혼자 대궐을 찾아온 춘추가 왕에게 눈물을 글썽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손이 비록 전생의 은덕으로 할아버지의 외손이 되어 세상에 났지만 나라에 큰 공을 세우지 않으면

앞날은 실로 막막하기 그지없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나라의 임금으로 계실 동안에야 감히 누가 소손을 깔보고 능멸하겠습니까마는

먼 훗날 만세후를 내다보면 밤에 베개를 베고 누워도 잠이 오지 않을 때가 허다합니다.

소손의 처지를 진실로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기신다면 부디 장래를 생각해 온나라 사람들이

다 칭찬하는 위국지공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것만이 소손을 살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소손은 앞으로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옵고,

저의 아비처럼 평생을 울안에 갇혀 살거나, 그게 싫으면 머리를 깎고 중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살기는 정말 싫습니다, 할아버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손자가 난생 처음으로 눈물까지 흘리며 애틋하게 간청하자

왕의 마음은 몹시 쓰리고 심란해졌다.

“도대체 누가 너를 능멸한단 말이냐!”

기굴한 덩치로 성큼성큼 춘추에게 다가가서 어깨를 끌어안으며 흘러내린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었지만

내심으론 자신이 죽고 없는 세상에서 춘추의 앞날을 짚어보지 않을 수 없었고,

그때까지 막연하게만 여겨왔던 후사 문제도 비로소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이 죽고 나면 다음 보위를 이을 사람은 십중팔구 백반이요,

신라의 사직은 으레 그의 자손들에게로 흘러갈 것이었다.

춘추는 왕의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할아버지께서는 종제이자 사위인 저의 아비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하셨습니다.

그런데 진정왕 백반 어른은 소손에게는 종백부요,

그 자손들과 소손은 친가로는 재종간이지만 외가로 치면 더욱 거리가 멉니다.

어찌 소손이 앞날을 근심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왕은 춘추의 예리한 지적에 그만 말문이 막혔다.

자신의 욕심만 같아서는 다른 누구보다도 춘추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지만

젊어서부터 아우 백반의 괄괄한 성미와 거벽스런 위세에 짓눌려 마음대로 정사를 펴지 못한

왕으로서 그런 일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형편이었다.

백반은 나이가 들수록 왕에게 점점 더 노골적으로 자신의 야심을 드러내면서,

“제가 아니었다면 형님께서 어찌 보위에 오를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훗날 다른 것은 몰라도 옥황상제에게서 받은 황금 요대만큼은 기필코 저에게 물려주셔야 합니다.”

하고 말한 일까지 있었다.

그것은 왕의 등극에 얽힌 떳떳치 못한 비화를 일깨워 심기를 자극하면서 동시에 왕위만큼은

반드시 자신에게 물려주어야 한다는 은근한 협박이었다.

선화 공주를 내쫓은 직후 한때는 그런 아우를 제압할 엄두도 낸 적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백반을 감싸고 도는 만호 태후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결국은 아우의 위세를 한평생 넘어서지 못하는 꼴이 되고 만 셈이었다.

왕은 이미 오래전부터 아우가 부담스러운 단계를 지나 내심으론 어떤 두려움마저

느껴오고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춘추가 돌아가고 나서 왕은 밤잠을 설쳐가며 번민에 휩싸였다.

그리고 며칠 뒤 춘추를 궐로 불러들여 말하기를,

“내 너를 혼자 보낼 수는 없고, 우정 가려면 도비의 아들 눌최를 데려가도록 해라.

최근에 내마 눌최를 유심히 지켜보니 그 절개와 충성스러움이 도비를 꼭 닮아 만조에서 으뜸이요,

헌걸스런 풍채와 낭도를 따라다니며 익힌 무예는 대궐의 호위병들을 가르칠 정도다.

중국의 정세가 아직 어지러우므로 불의의 재난을 당할 위험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고,

설혹 그렇지 않더라도 너와는 나이가 엇비슷하니 원로에 말벗을 삼아도 족할 것이다.

눌최를 데려간다면 내가 그나마 안심을 하겠다.”

하고 마지못해 승낙을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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