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중국손님 (12)
그가 바로 김춘추(金春秋), 용춘과 천명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아들이었다.
춘추는 나이 예닐곱에 벌써 글을 죄다 깨쳐 왕이 왕실에서 불세출의 기재(奇才)가 났다며
크게 기뻐하고 곧 중신들 가운데 스승을 구하여 공부를 시켰는데,
이때 춘추의 스승으로 정한 이가 내마 설담날이었다.
담날이 춘추를 맡아 가르친 지 채 5년이 못 되어 왕에게 말하기를,
“춘추 도령의 공부가 나날이 일취월장하여 유자의 어려운 책은 말할 것도 없고
《이아》19편을 무릇 달포 만에 읽어 마치는데,
비록 가르치는 것은 얕고 속되어도 받아들여 아는 것은 깊고 원대하여
신의 학문과 재주로는 더 가르칠 밑천이 없습니다.
다른 스승을 찾아보시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하여 왕이 근심스러운 낯으로,
“본조에 공의 학문이 으뜸인데 어디서 누구를 찾아 다시 스승으로 삼는단 말인가?”
하자 담날이 미리 생각해온 듯이,
“신의 소료에 춘추 도령을 가르칠 만한 사람으로는 오직 원광 스님이 있을 뿐이올시다.”
하였다.
왕이 담날의 말을 옳게 여기고 수나라에서 돌아온 뒤 황룡사에 주석하던 원광을 대궐로 청해
강론을 맡기니 춘추가 원광에게서 여러 가지 다양한 학문을 배우고 익혔다.
그 뒤 원광이 무슨 마음에선지 인적이 드문 험산을 찾아다니다가 하루는 가실사에 이르게 되었다.
가실사는 추화군 운문산 기슭에 있는 대찰이었는데,
진흥왕조에 가야국 출신의 한 신승(神僧)이 나라가 망할 것을 미리 알고 난리를 피해
산의 깊은 골짜기로 들어왔다.
그로부터 3년 동안 초암을 짓고 수도하던 중에 어느 날 문득 산과 골이 진동하며 새와 짐승이
우는 소리를 듣고 그곳이 5령이 숨어 사는 신비로운 곳임을 알게 되었다.
이에 오령의 비기가 서린 곳마다 절을 짓기 시작해 대작갑사(大鵲岬寺)를 본당으로 삼고
동서남북 사방으로 가슬갑사(嘉瑟岬寺), 소작갑사(小鵲岬寺), 천문갑사(天門岬寺),
소보갑사(所寶岬寺)를 각각 앉혔는데, 역사를 시작한 지 꼭 10년 만에 완공하였다.
원광이 운문산에 든 것은 그로부터 30여 년 뒤의 일이다.
가실사에 이르러 사방을 둘러보니
산세도 기험하고 수목도 울창하여 아는 사람이 아니고는 좀처럼 찾아오기 어렵거니와,
세월은 무상하여 절을 지은 신승은 이미 간 곳이 없고 다섯 갑사의 웅장한 당우와
넓은 마당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이를 본 원광이 돌연 크게 무릎을 치면서,
“내가 일념으로 찾아 헤매던 곳이 바로 운문산에 있었구나!”
하며 좋아하고는 곧 그 허허롭고 황폐한 곳에 머물며 절의 여기저기를 손보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이 평소에 주석하던 황룡사며 각지의 명산대찰을 두루 다니면서 백고좌와 점찰법회를 열고
불법을 전파하느라 나라를 통틀어 제일 바쁜 중이었음에도 겨울철만 되면 어김없이 몇몇 시자들을
데리고 가실사를 찾아와 틈틈이 낡은 당우를 고쳐 마침내는 절을 번듯하게 중창하였다.
하루는 원광의 행적을 궁금하게 여긴 황룡사의 한 노승이,
“법사께서는 남모르게 미인을 숨겨두고 살림을 차리셨소? 어째 겨울철만 당하면 운문산에는 가시오?”
하고 농삼아 묻자 원광이 껄껄 웃으며,
“살림도 아주 큰 살림을 차렸지요.”
하고서,
“미인보다 더 중한 것이 운문산에 있으나 아직은 말할 때가 아닙니다.”
하여 묻는 사람의 마음을 더욱 궁금하게 만들었다.
어쨌거나 이 바람에 춘추는 겨울철만 되면 원광을 따라와 가실사에 머물다가
봄빛이 짙어져서야 금성으로 되돌아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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