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7장 중국손님 (11)

오늘의 쉼터 2014. 9. 2. 15:57

제17장 중국손님 (11)

 

 

 

 

사내는 자신이 할말을 다 했다는 듯 한쪽으로 밀쳐두었던 가야금을 끌어당겼다.

청년이 황급히 그 앞을 나서며,

“거사께서는 신라의 우환만을 말씀하셨을 뿐 그를 해결할 방도를 일러주지 않으셨으니

이는 마치 죽어가는 병자를 대하고도 약을 짓지 않는 의원과 같습니다.

중국에서 최고의 현신으로 일컫는 이윤(伊尹)은 유신씨(有莘氏)의 여자가 시집갈 때

데려간 남자 종으로 그 근본이 요리사였으나 탕임금을 만나 천하를 다스렸고,

관중(管仲)은 성음의 개도둑으로 용렬하기 짝이 없는 자였지만 환공이 이를 발탁하여

제(齊)나라의 중부로 삼았습니다.

백리해(百里奚)는 죄를 짓고 도망갔던 자로 다섯 마리 양가죽에 팔렸지만

진나라 목공이 그에게 정사를 맡겼으며, 태공망(강태공)은 너무 가난하여 아내가

조가의 푸줏간에서 일하고 극진(棘津) 나루터에서는 여관의 손님이나 맞이하는

심부름꾼이었으나 나이 일흔에 주(周) 나라의 재상이 되었고 아흔에는 제후에 봉해졌습니다.”

하고 연하여,

“계림은 예로부터 수많은 영웅호걸과 출중한 현사들을 배출한 영험한 땅입니다.

어찌 나라에 왕업을 보필하여 스러져가는 사직을 일으켜 세울 인물이 없겠습니까?

감히 청하거니와 제게 나라를 구할 밝은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제가 비록 어리고 힘은 없지만 다행히 대궐을 상시 출입할 수 있는 남다른 권한이 있습니다.

거사께서 천거하는 인물이라면 필경 세상을 크게 바꿀 만한 기재가 틀림없을 터,

일러주시면 나라를 구하는 심정으로 따르고 받들겠습니다.”

하며 간청하였다.

“지금 세상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네. 그건 자네 또한 마찬가지야.”

사내는 시선을 가야금 줄에 맞춘 채 웃는 낯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한 세대는 이렇게 흘러가는 게고, 자네가 힘써 행할 일은 다음 세상을 착실히 준비하는 것뿐이지. 젊은이는 젊은이의 할 일이 따로 있어. 씨를 심고 뿌리를 내려야지. 그래서 줄기가 자라고,

가지가 나와야 돼.

그래야 잎이 달리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힐 것 아닌가?

씨를 심을 때 벌써 꽃과 열매를 논할 수야 있겠는가?

엄밀히 말하면 작금의 우환은 자네의 일이 아님세.

다만 나라 꼴이 그렇다는 게지.

그러니 더욱 분발하여 다음 세대를 준비하라는 게구.”

“하지만 그럴 만한 여유가 없지 않습니까?

방금 전에 거사께서도 7백 년 사직이 하루아침에 망할 것을 염려하지 않으셨는지요?”

“그랬지.”

사내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위엄이 서린 눈빛으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어찌할 건가?

사직이 망하는 일은 운명에 맡길 뿐 현재로선 달리 방도가 없네.

허나 후대를 준비하는 것은 자네와 같은 젊은 사람들의 몫이야.

나라가 어지럽다고 준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되네.

미처 다음 세대가 오기 전에 나라가 망하면 그거야 하늘의 뜻이니 도리가 없는 게고,

요행 망국지란을 비켜 가기만 하면 다음 세대에선 희망이 있는 것 아닌가?

우리 계림의 농사짓는 말에 이런 게 있어.

팽나무 당목의 일찍 핀 꽃이 좋으면 일찍 모를 내고 늦게 핀 꽃이 좋으면 늦게 모를 내야 풍년이 든다고. 세상사나 정사도 그런 게야. 봄날의 일기가 불순하다고 농사를 아예 아니 지을 수야 있나.”

“하면 어떻게 하는 것이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것인지요? 그것만이라도 좀 일러주십시오.”

“허허.”

사내는 허공을 향해 한차례 크게 웃고 나더니,

“아까 말하지 않았나? 어서 집으로 가보게. 자네가 집에 가보면 길이 보일 걸세.”

말을 마치자 가야금 줄을 튕기며 다시금 초연한 자세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스러지는 사직을 다시 세울 자 누구인가
아서라 농부들아 팽나무꽃이 늦게 피면 늦게 모를 낼 뿐이라네

그 대목만을 반복해 노래하는 사이에 청년은 몇 번이나 더 말을 붙여보려고 했지만

사내는 청년을 향해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청년은 완연히 한참을 더 앉았다가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눈길조차 주지 않는 사내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한 다음

초막을 물러나 바깥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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