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7장 중국손님 (10)

오늘의 쉼터 2014. 9. 2. 15:49

제17장 중국손님 (10)

 

 

 

 

“나는 치도가 이처럼 황폐해진 나라치고 망하지 않은 나라를 전고에 들어본 바가 없어.

5백 년을 내려온 가야제국도 하루아침에 멸망하였고,

중국을 통합한 강국 수나라도 양제 15년 만에 사라졌네.

그나마 지금 신라의 사직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외관과 변방에 몇몇 충직한 장수들이 있고,

또 자네와 같이 국사를 걱정하는 젊은이들이 있기 때문인데 아무리 눈을 닦고 살펴봐도

이들의 우국충정을 한데 모아 스러져가는 사직을 일으켜 세울 만한 큰 인물이 없으니

어찌 안타깝고 답답한 노릇이 아니겠는가?

이제 금왕이 죽고 백반이 보위를 물려받는 때가 온다면 계림의 사직은 끝장일세.

백반의 두 아들 태(泰)와 비담(毗曇)은 일개 현령의 재목도 되지 못하는 자들로

보위가 그렇게 흘러가면 아무 희망이 없다네.

하니 뉘라서 칡넝쿨로 갈포를 짜듯 영걸을 찾고 준사(俊士)를 규합해 흐트러진 치도를 바로세울 것인가?”

청년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방금 나라에 큰 인물이 없다고 하셨는데 혹 부마 용춘공의 인물됨은 어떠하다고 보시는지요?”

그러자 사내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용춘은 정직하고 곧은 사람이야.
그러나 덕이 없지.

게다가 상대등 아들의 목을 칠 만큼 욱하는 성미는 있을지언정

사직을 위해 모욕을 참아낼 인내나 사람을 조종하고 정적을 다스리는 슬기로운 꾀는 없는 사람일세.

그렇다고 나라의 근본이 썩어가는 것을 보고 죽음을 불사할 만치 큰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세상이 어지럽다 보니 초야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대단한 기대를 걸고 있는 모양이지만

나는 그렇게 믿지 않네.

화목과 융화를 기대할 큰 그릇은 아닌 게야.

아무렴, 그는 그저 평범한 범부일 뿐 갈포를 짤 기술자는 아니지.

따지고 보면 나라 꼴이 이렇게 된 데는 그의 책임도 꽤나 있으이.”

“제가 듣기로 그는 이미 20여 년 전에 역모의 누명을 쓰는 바람에 거의 반평생이나

뜻을 펴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라와 은나라가 망한 것은 걸(桀)과 주(紂)의 폭정 때문이요,

간신(干辛)이나 악래(惡來) 같은 자를 등용한 탓이라 들었습니다.

하지만 우(虞)나라가 어찌 궁지기(宮之寄) 때문에 망했으며,

계자(季子)가 노(魯)나라에서 뜻을 펴지 못하고 죽은 것을 어찌 계자의 잘못이라고 하겠습니까?”

청년의 질문을 받자 사내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했다.

“방금 자네 입으로 백룡과 예차의 일을 말하지 않았던가?

백룡이 눈에 작살을 맞은 것은 자신이 물고기로 변했기 때문이지.

호표(虎豹)가 비록 용맹하나 사람들이 고기와 가죽을 탐내는 줄 알면서도

아무 방책 없이 민가로 내려와 잡혔다면 어찌 죽음을 면하겠는가?

덕이 있고 슬기로운 자는 애당초 그런 우를 범하지 않는다네.”

“……용춘공을 잘 아시는지요?”

“남들이 아는 만큼은 알지.”

마치 칼로 무를 잘라내는 듯한 사내의 단언에 청년은 일순 불쾌한 기색을 해보였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는 듯했다.

사내가 그런 청년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나더니 홀연 헛헛, 하고 해괴한 웃음을 터뜨렸다.

“왜, 자네 부친을 속되게 말하여 언짢은 겐가?”

청년은 화들짝 놀라며 크게 당황했다.

“하면 저를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그러나 두두리 거사라는 그 사내는 청년이 묻는 말에 명쾌한 답을 하지 않고 대신 다음과 같이 일렀다.

“남에게 배워 하는 공부는 참공부가 아니야.

그만치 배웠으면 이젠 천하를 주유하며 큰일을 보고 큰 뜻을 세울 때가 되었어.

원광이 비록 유사에 남을 만한 고승대덕이나 그는 본시 중이기 때문에 삼라만상을 불법으로 대하는

한계가 있지.

원광이 보는 천하가 어찌 자네가 보는 천하와 같겠는가?

같은 창공을 날아도 참새는 곡식 열린 데를 보지만 갈매기는 물고기 노는 곳을 보는 법일세.

내 말을 명심하고 서둘러 집으로 가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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