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어디로 가나

11. 비 정

오늘의 쉼터 2014. 8. 26. 12:23

11. 비 정
 
 
    " 실례지만 기사님은 어느 회사에서 오셨습니까 ?."
    " xx 클럽의..."
   " 아 네. 죄송합니다. xx 클럽에서 온 기사에게는 식사를 제공하지 말라는 지시가..."
   다른 기사에게 저녁상을 들여다 주고 나가던 종업원의 말이었다.
   " 보소 당신 장사 처음하요 ?."
   옆에서 화투를 치고 있던 한 분이 담배를 꼬나물고 야유조로 물었다.
   " 네, 장사를 요 ?."
   " 그 왜 거지 클럽인가 호롱 말코 클럽인가에 다니시는 오야지를 처음 모시느냐고요 ?"
   " 아 네, 몇 일 전에....."
   강희는 머리를 끍으면서 멋쩍게 웃었다.
   " 그라믄요. 일찌감치 속차리고 나가서 우동이라도 한 그릇 잡숫고 오이소.

그 놈아들은 아마도 불우한 세상 사람들을 돕고 봉사를 하다 보니 돈이 떨어져서

자기 기사 밥사 줄 돈이 없는 기라요."
   그 말에 모두들 화 하고 웃었다.
   그 곳은 부산에서 둘도 없는 최고급 요정인 동래 별장이었다.
   넓은 대기실에는 사장족들의 술 추념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기사들이 한방 가득 들어 앉아 있었다. 한 쪽 그석에서는 화투판이 벌어 졌고, 다른 한쪽 구석에서는 조금 늦게 도착한 패들이

상다리가 무겁도록 불고기에 갖가지 고급 요리와 맥주까지 곁들인 밥상을 받고 있었다.
   요리 집에 가면 손님을 모시고 온 기사에게 식사를 제공해 주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밥을 공짜로 주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러니 웬만한 요정에서는 기사에게 못 가져다 먹여서 안달이었다.

그것은 큰 요정일 수록 더 했다. 그래서 동래 별장에도 타에 지지 않게 기사 대접을

잘 해주는 곳으로도 유명했다.

그런데 유독 xx 회원을 모시고 온 기사에게 밥을 주지 못하게 하니 동료들 보기에 여간 창피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동래 별장에서만 그런 푸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지구 회원은 어떻게 하는 지 모르지만 동 부산  xx 클럽은 가는 곳마다 그러했다.
   xx 크럽은 전 세계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인류의 봉사 단체로서 먹고 사는 데

별 지장이 없는 사람이면 누구나 회원이 되어 보고 싶을 정도로 권위가 있는 단체였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불우한 인류을 구제하려고 가입한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단지 세계에서도 손꼽히게 알아주는 봉사 단체이므로 남 앞에 자기를 과시하려고 들어온 사람이 아니면 대게 돈은 있어도 연줄이 닿지 않아 해외 나들이를 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강희는 대기실 분위기에는 도저히 어울릴 수가 없어서 화장실에 가는 채 슬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거기에 모인 기사들은 한결 같이 듣기 거북한 말투로 자기가 모시고 있는 상사나 사모님들의 헌담을

하지 않으면 바보 같이 스피트를 낸 자랑과 교통순경과 싸운 허풍이 아니면 여자를 고신 이야기들

뿐이었다.
   강희로서는 그들에게 들려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자기하고는 수준이 맞지 않았다.
   그는 3 년간이나 몸 담아 온 해륙실업에서 10 일 간의 면허행정 기간 동안 차를 세워둘 수 없다는

이유로 본의 아니게 권고 사직을 당했다.

표면상으로는 그렇게 되어 있으나 내면으로는 벌써부터 사장님의 눈 밖에 나 있었다.
   그 첫째 이유로는 비서 윤양과의 관계에 대하여 아직도 의심을 버리지 못했고,

또 자리 바꿈을하여 재결합을 한 그들의 관계가 다시 누설 될까 봐 염려스러워서였다.

그보다도 어쩌면 윤양이 강희를 대하기가 민망하여 이 기회에 내 보내라고 종용하였는 지도 몰랐다.
   예로부터 요망한 것이 계집이라고는 하지만 수 많은 종업원을 두고 기업을 경영하는사장님이

그철딱서니 없는 년의 치마폭 속에서 이성을 잃고 헤매는 꼴은 차마 눈 뜨고 볼수는 없었다.
   어쨌든 그는 철없는 남과 여의 사랑 놀음 때문에 실직을 당했다.
   월급쟁이로 해고를 당해보지 안고는 그 비참함과 절망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강희는 고아로 자라 오면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고통과 슬픔을 겪어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별로 당황하지는 않고 살아왔다.

그런데 성인이 되어 가정을 가지고 있는 지금은 전에 없이 실직이라는 것이 그럴 가장 비참하게 했다.

자기 한 몸이라면 최악의 경우 홀연이 이 세상을 떠나면 그 뿐이 겠으나

이제는 그럴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는 아내에게 면허행정 기간이라고 속이고 직장을 구하려 몇 일을 헤매고 다녔다.

그래도 아내는 무슨 행정 기간이 그렇게 기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무슨 눈치라도 채었는 지, 남편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는 것 같았다.

그것이 더욱더 그의 마음을 슬프고 초조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다시 일자리가 주어졌다.
   양복 한 벌 값을 주고 들어 온 효성 산부안과 병원은 부전 역 앞에 있었다.

정문은 큰 도로와 인접해 있어서 사람의 왕래가 많았으나 건물 옆 골목으로 나 있는 후문은

비교적 한적했다.

30 대 이상의 주부들은 정문으로 진료를 받으려 왔으나 20 대의 젊은 여성들은 후문으로 들락거렸다.

그 수는 정문의 수배가 넘었으며 그들은 대게 미혼 여성들이었다.
   원장은 미남풍의 건장한 사나이로서 치마를 두른 동물이면 누구나 함께 자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친료를 받으려는 친구를 따라 왔던 극성파 여성들은 다음 날 혼자 건강한 몸을 가지고 와서

원장을 괴롭혔다.

그것은 강희가 직접 보지는 않아서 잘은 모르지만 동료 의사들과 함께 차를 타고 가면서

이야기 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던 것이다.
   원장은 밤에는 대게 그런 환자를 치료하러 호텔이나 가까운 유원지 같은 곳으로 왕진을 다녔다.

그러면 강희는 밤새도록 차를 대기 시켜 두고 원장님의 물리치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때로는 환자를 자기 집까지 태워다 주기도 하고 호텔에 그냥 버리고 돌아오기도 했다.
   그럴 때면 언제나 원장님은

   " 나 닥터 모임에 갔다고 하게."


   하고, 사모님에게 거짓말을 하게 했다.


   " 네. 염려 마십시요,원장님."

   강희는 그들이 무슨 지랄로 치료를 하건 말건 집으로 돌아 가라는 것이 반가워

얼른 차를 돌려 도망을 쳤다.

언제 마음이 변해서 다시 기디리라고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원장님은 차를 돌려 보냄으로써 사모님에게 의심을 받아 때로는 상당히 고초를 격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돌아 가라고 하였다가 금방 뒤돌아 와서 기다리라고 하였다.

그때처럼 김 새는 일은 없었다.
   박원장이 소속되어 있는 동 부산 xx 클럽은 일본 시모노세끼 클럽과 자매 결연을 맺고 있었고,

오늘은 그 회원 일부가 친선차 한국 관광을 왔기 때문에 기사에게 저녁을 굶겨 가면서

그들에게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우기위하여 일류 요정인 동래 별장에서 소위 말하는

기생파티를 얼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야 그들도 일본 여행을 갔을 때 그런 대우를 받는 지는 모르지만 라면으로 저녁을 때우고

풍악이 들려오는 숲속 바위에 홀로 앉아 있는 강희의 심기는 그리 편치 않았다.

아무리 운전자의 세계이서 사자가 붙은 차주가 짜다고 소문이 나 있기로서니 이럴 수가 있을 까 싶었다.
   다행이 게다짝을 위한 기생 파티는 10 시가 못되어 끝이 났다.

실로 이 곳 어르신네들의 술 추념에 비하면 엄청나게 빨리 끝난 셈이었다.
   일본 손님을 싣고 왔던 관광 버스는 그들을 내려주고 곧 바로 돌아 가고,

갈 때는 이 곳 회원이 타고 온 자가용에 분승하여 숙소로 향했다.
   강희의 차에는 섹스를 위해 술을 적당히 마신 일본 xx 클럽의 회원 둘과

그사이에 한복을 벗어 버리고 다른 옷으로 갈아 입은 기생 둘이 교과서에도 없는

일본 말을 언제 그렇게 배웠는 지 무어라 조잘거리며 노닥거리고 있었다.

앞좌석에 역시 안내 역활을 맡은 박원장이 타고 있었고,

뒤에 앉은 일본 양반들의 손은 기생년들의 젖가슴 속에서 빠져나올 줄을 몰랐다.
   다음 날 동 부산 xx클럽에서는 함안 어느 무의촌에 무료진료를 떠났다.
   회원중 보세공장을 하고 있는 분이 통근 버스 한 대를 내어주어 거기에다

자매 결연의 기념품으로 마을 회관에 걸어 둘 대형 벽시계 하나와 타올 등

여러가지 선물을 가득 싣고 본 역에서 출발을 했다.

회원 대다수가 그 버스에 탔으나 한국의 농촌을 보고 싶다는 일본 회원 세 명과

자기의 볼 일로 좀 늦게 출발을 한 회원 몇 명만이 자기들의 차를 타고 갔다.
   박원장도 환자의 재수술 때문에 예정 시간 30분 늦게 간호원 둘을 데리고 출발을 했으나

강희가 속력을 좀 내는 바람에 도착 시간은 거의 비슷했다.
   자매결연식이 끝나고 조금 쉬었다가 진료가 시작되었다.
   회원 중 병원을 개업하고 있는 사람은 10 명도 넘었으나 무료진료에 참가한 의사는 5 명 뿐이었다.

그래도 다행이 전문 분야가 달라서 진료는 별 불편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몇 일 전에 신문에도 내고 마을에는 미리 연락이 되어 있어서,

심지어 밥을 많이 먹으면 배가 부르고 술을 마시면 소변이 많이 나오는 데

무슨 병이냐고 진찰을 받으려 올 정도로 마을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다는 사람에게는 소화제를 지어 주고,

술을 마시면 변소에 자주 가야 한다는 환자에게는 될 수 있는 대로 따끔하게 아픈 주사를 놓아 주고

약은 마라리아에 먹는 키니네 몇 알을 갈아서 주었다.
   시골 양반들의 속을 훤히 들어다 보고 있는 박사님들이 그들을 빈손으로 돌려 보내지는 않았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약첩을 접는데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의사가 아닌 회원들이 그 일을 맡았다.

관광겸 남편을 따라 온 사모님들은 실크 부라우스를 펄럭이며 환자들의 안내를 맡았고,

접수부에는 몇몇 운전기사도 참석을 했다.
   환자를 따라 온 어린 아이들에게는 미리 준비해 간 과자 한 봉지와 사과 둘을 손에 쥐어 주었다.
   세상에 이 같이 흐뭇하고 보람찬 전경을 적어도 강희는

그가 자가용 운전을 하고 부터 돈 있는 어른들에게 아직 본 적이 없었다.
 
   효성 산부인과 박원장은 고학을 하여 서울 S 의대를 나 온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미동 산꼭대기에서 딸의 집에 얹혀 살고 있는 노모의 말을 들으면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강희가 무의촌 진료를 갔다 온 다음 날 간호원을 태우고 이상한 곳으로 왕진을 간 일이 있었다.
   그 날 원장님은 어디서 걸려온 전화인지 수화기에다 대고 한참 짜증을 부리더니

간호사를 불러 왕진 준비를 시켰다.

   " 미스 문, 내 차를 타고 가서 주사를 좀 놓아 주고 와요. 이 약은 시간 맞추어 드시게 하고."

   " 원장님은 ...?


   " 그래, 혼자 갔다 와요. 난 아무래도 환자 때문에 안 되겠어."

   곧 수술 환자가 오기로 예약이 되어 있다고 했다. 

   " 저어 노인이 아무래도 기력이 없을 테니까

혈압부터 재어 보고, 칼슘과 사르부르는 천천히 놓아 줘요.

아주 천천히 . 그리고 참 ! 그 보다도 먼저 포도당을 놓아 주는게 좋겠구만.

지아민을 하나 섞어서 말이야."

   문 간호사는 약병을 가방에 챙겨 넣으면서

   " 그 보다 페리스톤(고영양재)을 한 병 놓아 드리는 게 ...."

   하려다가 

   " 네, 알겠습니다."

   하고, 말았다.

   " 그래, 얼른 다녀와요. 그리고 이 기사. 자네 옛날 화장을 아는 가 ?."

   " 아미동에 있었던 곳 말씀 입니까 ?."

   " 그래, 지금 그 앞으로 가면 사람이 나와 있을 걸세."

    과연 옛날 화장막이었던 길목에 남루한 옷차림을 한 중년 여인이

올라오는 차마다 두루 살피고 있었다.

   " 아줌마 안녕하세요 ?."

   간호사는 아는 사람인지 차에서 내리며 먼저 인사를 했다.

   " 아이고 또 아가씨가 왔군요. 그래 오빠는 오늘도...."

   " 네, 수술 환자가 밀려서요." 

   " 정말 너무하시는 군요. 모친이 위독하다는 데도."

   " 죄송해요."

   " 아가씨가 죄송할 건 없어요."

   강희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어리둥절 하기만 했다.
   부산에도 아직 이런 토담이 있었나 싶도록 스레이트 지붕마다 비바람에 부서지고

모스리가 날아 간 낡은 토옥에 그 아주머니는 정말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문간호사의 말나따나 주위의 집들은 모두 돼지우리 같이 지저분 하였으나

그래도 토담 사이사이로 잡초가 욱어져 운치가 있었고,

하늘과 맞닿은 듯 낭만이 있었다.

더욱이 눈 아래로 까마득히 내려다 보이는 송도 앞 바다와 그 옆으로 더 멀리 바라보이는

오륙도 위에는 뭉개구름이 솜처럼 피어 있었다.

푸른 물결 위를 나는 갈매기들은 때마침 구름속에서 나타난 햇빛을 받아 은가루를 뿌린 듯

빤짝이고 있었고, 그것은 마치 공중에서 살포한 삐라와도 같았다.
   아미동의 최고 높은 산꼭대기에 자리 잡은 토옥 속은 지붕이 낮아서

그런지 바깥과는 달리 어둠침침하기 이럴데 없었다.

그 흔해 빠진 비닐 장판 한 번 깔아보지 못한 세멘포대 장판 위에 나이 많은 할머니 한 분이

기진맥진하여 누워 있었다.

뼈에다 가죽만 씌워 놓았는 지 살점이라고는 하나 없는 팔에다 혈압을 재려고 하자

   " 저리 가아. 가만 죽게 저리 가아."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힘 없이 팔을 하우적거렸다.

   " 아이 엄마 왜 또 이러세요.

그렇다고 금방 죽어지나요. 얼른 주사나 맞고 일어 나세요.

그래야 아들을 만날께 아니에요. 엄마가 그토록 못 잊어 하시는 외동 아들 말이에요."

   달래는 건지 비꼬는 건지 딸은 허우적대는 할머니의 팔을 잡았다. 

그래서 간호사는 혈압을 재고 주사기를 꽂았다.

   " 나는 죽어야 헌다. 그 놈은 내 자석이 아이다. 내 자석이...."

   주사를 맞는 동안 할머니는 수없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요즘은 아주 죽기로 작정을 하였는 지 미음도 들지 않고 약도 먹지 않는 다고 했다.
꼬불꼬불한 골목을 돌아 쫍고 긴 돌 계단을 내려오면서 문간호사도 강희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 참 이상하지요 ?."


   " 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이....."

   이 한 마디 밖에 주고 받지 않았다.
   문간호사가 효성 산부인과에 들어 올 때만 하더라도 할머니는 아들의 학비를 대주느라고

그 많은 논을 다 팔아 버리고 홀로 시골 움막에서 사셨다고 했다.
그때 할머니는 지나가는 사람마다 붙들고 


   " 우리 효성이가 병원을 채리먼 대리고 갈라 카더라.  그래서 내 이래 안 기다리고 있나."

   하고, 자랑을 했고,

 

서울에서 어떤 부잣집 딸과 결혼을 하여 병원을 차렸다는 소문이 나돌고 부터는 어쩐지

아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결혼을 했는 지 안 했는 지 어머니에게는

물론 고향의 친구들에게도 아무른 연락이 없었다.

그런데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졌다.

부산 어디서 큰 병원을 차렸는 데 환자가 구름처럼 몰려 들어서 도저히 몸을 뺄 수 없어서

자기의 모친을 모셔가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라고 했다.
   그런 소문이 나고 일 년이 지나도록 아들이 나타나지 않자

할머니는 홀로 지팡이를 짚고 늘 동구 밖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할머니는 이제 실성한 사람처럼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 보소, 야아. 우리 효성이 못 봤능기요 ?."

   하고, 아들의 안부를 물었다.
   온 마을에서는 그 불효막심한 놈을 잡아 요절을 내어야 한다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무렵 무역업을 한다는 떠돌이 장사군한테 속아 시집을 갔다가

오래전에 혼자 몸이 된 딸이 나타나서 그 할머니를 데리고 가버렸다.
   그 후 그 할머니는 외아들의 병원인 효성 산부인과 어느 구석진 병실에

환자 아닌 환자로 입원해 있었다.
   명문의 집안에서 일류 대학을 나온 서울 며느리는 어쩐지 꾀죄죄한

시골 어머니를 절대로 친정에서 사 준 고급 맨션에는 들여 놓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아들은 할 수 없이 모친을 병실 모퉁이에 기거하게 했다.
   뒤 늦게 이 사실을 안 딸은 펄쩍 뛰었다.
   원장실 벽에는 각개각층에서 보내 온 수 많은 감사장이 걸려 있었다.

그에 못지 않게 넓고 호화로운 책상 위에는 자개로 수놓은 감사패들이 박원장의 관록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여기저기 얹혀져 있었고 책상 옆으로는 유리곽 속에 우승컵들이 버섯처럼 나란히 줄을 서 있었다.
   " 오빠, 사람의 탈을 쓰고 그럴 수가 있어요. 자기 부모 하나 제대로 모시지 않은 주제에 봉사활동을 해요. 저 감사패는 얼마를 주고 샀죠 ? 거기에 던진 돈을 아깝지도 않던 모양이죠."
   " 야가 미첬나 ? 왜 떠들고 야단이야. 여기가 어디라고."
   " 그래 미첬어요. 그러니 나도 엄마처럼 입원을 시키시죠.  그 학덕 높은 올깨 언니가  그러더군요. 어머니가 정신이 이상한 것 같아서 입원을 시켰다구요."
   " ........"
   " 오빠, 여기가 정신 병원인가요 ? 그렇다면 간판부터 고치셔야죠."
   그 날로 딸은 자기가 살고 있는 아미도 별동내로 어머니를 모시고 갔다.
   딸은 부모 형제를 닮아서 원래는 미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가난에 찌들어 형편없는 몰골이 되었다. 부모님은 오직 외아들의 뒷바라지에만 몰두하여 온 재산을 다 털어 넣었기 때문에 딸은 겨우 국민학교 밖에 나오지 못했다.
  아들이 의과 대학을 졸업할 무렵 집안은 빈털틀리가 되었고, 딸은 결혼 정년기를 넘어 서고 말았다. 그런데 업친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마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인물 하나만 보고 장가를 오겠다는 사람은 모두가 별 볼일 없는 사내들 뿐이었다.
   어머니의 한숨은 날이 갈 수록 더했다. 그래서 보다 못한 딸은 어머니의 근심을 들어주기 위해 아무렇게나 시집을 갔다. 무역업을 한다는 작자가 나중에 보니 장돌뱅이 건달이었다.  그는 끝내 세 살 박이 딸 아이 하나를 아내에게 남겨두고 간다온다 말 한 마디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소식이 없었다.
  어버이 날이 되어도 박원장 내외는 병석에 누우신 노모를 찾아 가 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가슴에는 카네이션 한 송이씩 꽂혀져 있었다. 유치원에 다니는 딸 아이가 꽂아준 것이었다. 중학에 다니는 사내 녀석은 벌써 애비를 닮아 가는 지 새벽 같이 야구방망이를 들고 나간 후 한 나절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강희는 구청 부녀회장으로 있는 사모님과 몇 부녀회원들을 태우고 벌써 두 번째 양로원을 돌고 있었다. 떡과 의류 등 많은 선물을 들고 가는 곳마다 노인들을 극진히 대접하고 위로를 했다. 그러면서도 양로원 보다 시설이 형편 없는 토옥속에 누워 계시는 시어머니에게는 콧배기도 내어 보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강희는 양로원에다 폭신한 카시미론 이불을 내려줄 때 문득 아미동 산꼭대기에서 아직도 두터운 겨울 이불을 덮고 있는 할머니의 생각이 났다.
   ( 차라리 자식이 없었더라면 배신의 슬픔 같은 것을 느끼지 않고 양로원에서 죽는 날까지 채념속에서 조용히 사실텐데 !.)
   강희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차에서 내려 트링크을 열었다. 부녀회원들이 양로원을 들어가 노인들을 위로하고 있는 틈을 이용해서 차에 실린 물건을 한 가지씩 빼냈다.
   여자용 춘추 내의 한 벌과 양말 두 컬레, 그리고 떡과 과자를 조금씩 꺼내어 신문지에다 싸서 스페어 타이야 뒤에다 감추었다. 그러고 나니 또 때국이 질질 흐르는 할머니의 누더기가 마음에 걸렸다.
   ( 에라 모르겠다. 이왕 도둑질을 하는 김에.)
   무엇보다도 부피가 크고 숫자가 적어 한 장만 꺼내어도 금방 들통이 날 것 같아서 여러 번 망설이다가 이윽고 이불보에 손을 넣고 말았다. 정말 도둑질을 하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렸다. 그는 스페어 타아야의 덮게를 들어 올리고 그 밑에다 신문지를 깔고 카시미롱 이불을 넣었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선물 보따리를 실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 이까짓 돈으로 처보아야 몇 푼 되지도 않을 텐데, 차라리 도로 넣어두고 내 돈으로 사서 드릴까.)
   그는 여러번 그렇게 망설이면서 트렁크를 열었다 닸았다 하였다. 영 마음이 불안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자기의 몫을 도둑질 당한 양로원 노인들을 생각하니 또 다른 괴로움이 겹쳐왔다. 그래서 도로 제 자리에 넣어 놓으려고 트렁크에다 열쇠를 꼽느데 사모님패들이 세상에서 자기들 보다 착하고 선한 사람은 없다는 듯 스스로 인자한 얼굴이 되어 양로원을 나오고 있었다. 할 수없이 강희는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그런데 실상 따지고 보면 그렇게 지독한 도둑질도 아닌데 다리가 후들거려 악세레타가 잘 밟혀지지 않았다. 그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 미숙 엄마. 우리 이러다가 오늘 다 못돌겠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대강대강 준비해간 물건만 내려주고 인사만 하고 나오자."
   그래서 그런 지는 몰라도 시내에서 구석진 곳에 떨어져 있는 양로원을 네 군데 돌고나서 서면 천우장에 내릴 때까지 부녀회원들의 입에서는 부족품에 대한 말은 없었다.
   병원으로 돌아오니 원장님은 퇴근을 했는 지 외출을 하였는 지 병원에는 없었다. 그래서 강희는 퇴근 시간이 벌써 넘었기 때문에 얼른 차를 넣고 온다 간다는 말 없이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가 짐을 맡겨둔 병원 옆 구멍가게 쪽으로 막 돌아 서려는 데 등 뒤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는 데 옆 골목에서 난데없이 미란이 방그레 웃는 얼굴로 뛰어 나왔다.
   "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 봐. 휘파람을 다 부시고."
   " 난 또 누구라고."
   " 근데 왜 그리 급하시죠 ? 불러도 모르시고. 누굴 만나려 가는 길인가 봐."
   " 아니야."
   둘은 구멍가게 앞까지 나란히 걸었다.
   " 잠깐 여기 서 있어."
   강희는 얼른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커다란 종이 뭉치를 들고 나왔다.
   " 그게 뭐예요 ?."
   " 응, 어디 좀 전해 주려고. 근데 참 어쩐 일이지 ? 어디 가던 길인가 ?."
   " 아뇨."
   " 그럼 일부려 날 찾아온 거야 ?."
   미란은 말없이 고개만 두어 번 끄덕였다. 힘없이 축 처진 나약한 어깨가 웬지 오늘은 좀 가엾게 보였다. 그래서 강희는 좀 더 독한 마음을 먹고 냉정해지려고 애를 썼다. 그는 언제나 미란의 그런 술수에 넘어가서 절교를 선언했다가도 다시 관계를 이어왔던 것이다.
   " 저 할 말이 있는 데요."
   저 불쌍한 음성에 동정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웬일인지 또 마음이 문어지는 것 같았다.
   " 어떡하지. 난 좀 갈데가 있는 데 ?."
   " 설마 절 따돌리려고 ?."
   " 물론 관계가 끝난 사람끼리 따돌리고 자시고 할 거야 없겠지."
   " 왜 자꾸 끝났다는 소리를 하세요 ? 전 지금 심각해요."
   "네 마음대로 다른 남자품에 안겨 있을 대는 아무렇지도 않다가 ?."
   " 아이 왜 자꾸 있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서..."
   " 그래, 할 말이란 ?."
   " 여기선 할 수 없어요. 참 아까 어디 간다고 하셨죠. 저도 가면 안 되나요 ?."
   그러자 강희는 대뜸
   " 너 물건 잘 깍지 ?."
   " 갑자기 그건 왜요 ?."
   " 깍어, 못 깍어 ?."
   " 저 그런 거 자신 없어요."
   " 그럼 가 봐."
   그러자 미란은 바싹 달라 붙어서 매달리 듯
   " 해 볼께요. 하는 데까지요."
   이럴 때 미란은 매력이 있었다.
   " 그런데 무얼 사려고 그래요 ?."
  " 무얼 사든지. 넌 내가 고른 걸 깍기만 하면 돼."
   둘은 팡짱을 끼고 나란히 걸었다.부전역 옆에 있는 의류가게에서 강희는 미란에게 눈짓을 했다. 값을 깍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미란은 골이 난 얼굴로 강희를 흘키고만 있었다.
   " 왜 그러고 있어 ?."
   " 아저씬 너무 잔인해요."
   " 그건 또 무슨 소리야 ? 시킨 일은 하지 않고. "
   " 그건 언니 옷이 아니에요 ?."
   " 생각하는 거 하고는 !.그래 이것이 젊은 여자가 입을 수 있는 스웨터라고 생각해 ? 이런 회색을 말이야."
   " 그럼 뭐예요 ?."이건 어떤 할머니를 드리려는 거야. 오늘이 어버이 날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 우리 할머니는 아니지만."
  허리에 고무줄을 넣은 흰 치마 한 벌을 포함해서 부르는 금액의 반을 짤라 5천 원을 주고 스웨타를 샀다.
   둘은 산복 도로로 가는 마이크로 버스를 타고 아미동 산꼭대기에 도착하니 날은 어둑어둑하였으나 딸은 행상을 갔갓는 지그때까지 돌아오지 않았고 할머니만 전등도 켜져 있지 않은 방구석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기력이 떨어져서인지 잠이라도 들었는 지 눈을 감은 채 그들이 들어가도 아무른 반응이 없었다.
   딸의 것일까. 할머니에게는 별로 어울리지도 않은 노란 계통의 스웨터 앞에는 그래도 종이로 만든 카네이숀 한 송이가 반쯤 찌그러진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강희는 준비해 간 생화 카네이숀을 그 옆에 나란히 달아주고 가지고 온 보따리를 풀어 카시미롱 이불을 꺼내었다. 그것은 대학출신 며느리와 부녀 봉사원이 공동으로 투자하여 구입한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할머니에게 덮어 주고 행여나 잠이 깰세라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미란이 지꾸만 누구냐고 물어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 우리 여기 좀 앉았다 가요. 어지러워요."
   " 왜, 어디 아픈가 ?."
   " 조금 있으면 나아질 거예요."
   미란은 머리를  강희의 무릎에 기대여왔다.
   그녀는 아예 돌계단에 주저앉아 있었다. 얼굴이 창백한 걸 보니 엄살은 아닌 듯 했다.
   하늘에는 별이 쏟아지고 멀리 눈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송도 앞 바다에는 배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휘황찰란 했다.
   " 강희씨 ?."
   " 왜 그래 ? 갑자기."
   "......."
   " 본래대로 불러. 아저씨라고."
   " 전 어떡하지요 ?."
   " 어떡하다니 ?."
   " 낳고 싶어요 ! 애기를 요."
   " 애기라니 ?."
   " 저 임신했어요."
   " 뭐 ?."
   강희는 미란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 지금 뭐라고 했지 ?."
   "........"
   " 말해 봐. 임신이라고 했어 ?."
   " 네."
   미란은 강희의 무릎에 고개를 묻은 채 모기 소리만큼 가늘게 대답했다.
   " 왜 그런 말을 나한테 하지 ?."
   " 그럼 누구한테 그런 말을 해요 ?."
   " 그렇다면 그 애기 아빠가 나란 말인가 ?."
   " ........."
   " 왜 말을 못하지 ?."
   " 삼 개월 째래요."
  " 자신할 수 있느냐고 ? 애기 아빠가 나라고 ?."
   미란은 울고만 있었다.
   " 너무해요. 아저씬 !."
   " 너무하다니. 그 동안 네가 나에게 보여준 행동을 생각해 보구서 하는 소리야 ?."
   " 그 동안은 죄송했어요."
   " 그래. 지금 내게 와 와서 어쩌자는 거야. 내가 너에게 어떻게 해 주기를 바라느냐구 ?."
   "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전 다만 애기를 낳고 싶다는 말만 전해 주고 싶어요."
   " 안 되. 그건 비록 네 뱃속의 아기가 내 것이라도 말이야."
   " 전 낳을 거에요. 무슨 일이 있어도."
   미란은 강희를 잡고 애원을 했다.
   " 의사 선생님이 그러는 데, 이 번에 수술을 하면 다시는 애기를 낳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잖아요."
   강희에게 애기를 가젔다고 한 말은 이 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의사가 했다는 말을 들으면 그간 소파수수을 받은 경험이 몇 번 있다는 뜻이다.
   ( 다른 남자에게도 이런 짓을.....?.)
   별난 그녀의 기교에 그런 생각이 들때가 가끔 있었다. 그래서 일이 끝난 후 영 기분이 좋지 않아, 다시는 만나지 않으려고 수없이 맹세를 하였지만 지금까지 딱 뿔어지게 관계를 끊어 오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미란에게는 아내 보다 나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녀를 버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남들에게 빼았기고 싶지 않은 소유욕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는 고아로 자라오면서 항상 남들 보다 가난하다는 것을 의식했고 그만치 소유욕이 강했다. 그래서 자기에게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이라도 있으면 가져다 모았고, 그것 때문에 소영과 입 다툼도 했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거지 혼신인지도 몰랐다.
   만약 아내가 배운데 없는 여자라면 서슴치 않고 남편에게
   " 거지 출신은 할 수 없어 !."
   하고 핀잔을 주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남편을 이해하고 오히려 제편에서 먼저 사과를 하고 병적인 버릇을 고쳐주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미란은 그 약점을 이용하여 오히려 그를 고통속에 몰아 넣었다. 그녀는 본의로는 물론 절교를 당한 강희를 다시 사로 잡기 위해 그가 보는 앞에서 다른 남자와 만났고, 그래서 사나이의 질투심을 충동질하여 관심을 끌게 했다.
   " 나 말고도 다른 사람과 관계를 해 온 네가 나를 찾아 왔을 때는 어느 정도 짐작은 했겠지. 그러나 나로서는 그 오염된 아기의 아버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두고 싶어. 그러니 이걸 가지고 다시 병원을 찾아가 봐."
   강희는 지갑을 떨어 미란에게 내밀었다.
   " 싫어요. 전 절대로 그럴 수는 없어요. 이 번에 아기를 지우면 전 영원히 애기를 가질 수 없다 잖아요."
   미란은 빨딱 자리에서 일어나 총총 걸음으로 계단 아래로 넘어질 듯 뛰어 내려갔다.
   " 야 그렇다고 처녀의 몸으로 애기를 낳아 어쩌겠다는 거야 ?."
   " 앞으로 일어 날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지금은 오직 낳아야 겠다는 일념 뿐이에요."
   산복도로까지 뛰어 내려온 미란은 계속 달리고 있었다.
   " 야, 이걸 가져가. 이걸 가져가라고."
   돌뿌리에 채여 넘어지려는 미란을 강희는 간신히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미란은 몸을 돌려 사나이의 품에 안겨오며
   " 제발 소원이에요. 오빠한텐 아빠 의 위치를 지켜 달라고는 하지 않을 게요 네."
   " 그럼 무슨 이유로 나를 찾아 왔지 ?."
   " 모르겠어요. 지금은 그것을 후회하고 있어요."
   " 어쨌든 이 돈을 갖고 가. 그렇지 않으면 난 너를 죽일지도 놀라."
   강희의 눈에는 살기가 돌았다.
   미란의 원망스러운 얼굴에 흘러내리는 두 줄기의 눈물이 자꾸만 눈 앞에 어른거려 그는 대학병원 옆 버스 정유소까지 오는 동안 몇 번인가 넘어질 뻔 했다.
   ( 내가 아내 아닌 여인의 배에 아기를 가지게 하다니 !.)
   그는 지금까지도 미란과의 관계에 대하여 뻔뻔스러울 정도로 아내에게는 아무른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처음 그녀와 관계를 가졌을 때는어디까지나 그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동물적인 욕구로 교접을 했을 뿐이라고 뇌까렸고. 그녀에게 애정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지금에 왔어도 남의 변소에 잠간 실례하는 기분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미란의 몸에 자기의 애기가 자라고 있다니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무엇 보다도 그것이 자기의 씨라고 믿어지지 않았고, 그래서 더욱더 알 수없는 골이 났다.
   " 아저씨 차비 주셔야지요."
   " 응, 그래."
   그러나 아무리 포켓을 뒤저도 동전 한 잎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 빈 지갑인 줄 알면서도 그는 또 패스포드를 꺼내어 이리저리 뒤져 보았다. 역시 면허증과 주민등록증 하나만이 들어 있을 뿐이었다.
   차장은 여전히 물러나지 않고 야유가 섞인 매서운 눈길을 강희에게 보내고 있었다. 그것이 보기에 딱했던지 옆에 타고 서 있던 학생풍의 아가씨가 핸드백을 열고 토큰 하나를 꺼내어 차장 앞으로 내밀었다.
   차장은 그것을 받아
   " 흥."
   하고 돌아섰다.
   " 죄송합니다. 아가씨 !."
   " 아니에요."
   아가씨가 수집어서 자리를 피했는 지 승객에 뜨밀려서인지는 몰라도 둘의 사이에는 어느새 다른 사람이 가로 막고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강희는 그 여학생이 꿈에도 그리던 자기의 누이 동생 순영인 줄 알아 보지 못했고, 순영 또한 수줍어서 토큰 하나로 도움을 준 자기의 친오빠를 똑 바로 처다보지 못했다. 그래서 두 오누이는 같은 방향의 버스 속에서 17년만에 만나 대화 한 마디씩만 주고 받은 채 그대로 헤어졌다.
 
   유달리 내리던 비가 거치자 금방 가을이 왔고 금강원 기슭에 낙엽이 쌓이는가 했더니 어느덧 그 위에 찬 서리가 하얗게 덮혀 있었다. 다가오는 하루하루는 지겹고 허망하여도 뒤돌아 보면 언제 그렇게 많은 날들이 흘러갔나 싶게 세월은 빨랐다.
   지난 초여름 아미동 산복도로에서 헤어진 후 미란으로 부터는 더 이상 소식이 없었다. 종전 같으면 헤어 졌어도 일 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전화질을 해 대던 그녀가 어쩐 일인지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도 영영 소식이 없었다. 이제 정말 그의 수첩에서 강희라는 사나이의 이름을 지워버리기로 작정을 한 것인지. 연락이 닫지 않으면 곧잘 병원앞까지 찾아와서
   " 아저씨."
   하고, 옆 골목에서 튀어나와 퇴근을 하는 강희의 앞 길을 가로 막는 일이 허다 했다. 그도 처음에는 다시 그녀가 나타날까 봐 지래 급을 먹고 병원 뒷문으로 내빼기도 하고, 교환양에게 여자한테 전화가 오면 무조건 없다고만 하라고 부탁까지 해 두었다. 그러나 예상 외로 미란에게서 연락이 없자 그녀를 피하는것이 싱거워졌고, 이제는 응근히 다시 찾아오지 않은 그녀가 야속하고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래서 전에없이 통제구역인 교환실에도 들락거려 보았지만 이렇다 할 정보를 구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껌까지 사다주며 여자한테서 온 전화를 차단해 달라고 부탁을 한 교황양에게 전화가 온데가 없느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싱겁게 나와 버리기가 일쑤였다. 퇴근을 할 때도 행여나 옆 골목에서 뛰어 나오지나 않을 까 하여 다른 곳에 들릴 일이 있어도 일부려 그 골목 앞을 지났고, 그러다가 또 뒤돌아 보기도 하였지만 역시
   " 아저씨."
   하고, 방그레 웃으며 나비처럼 나타나는 미란은 영영 없었다.
 
   그날도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까운을 벗어 던진 원장님이 차에 오르더니 해운대 쪽으로 가자고 했다. 강희는 또 운전 교습을 받으려 가는 줄 알았다. 그러나 자동차가 수영 다리를 건너고 있어도 원장님은 아무 말이 없었다.
   자동차 운전 교습소는 수영다리를 건너자 마자 바로 우측에 있었다. 그 곳을 말없이 통과하는 걸 보면 오늘은 아무래도 운전 교습을 받으려 가는 것이 아니라 열병을 앓고 있는 여성을 물리 치료를 하려가는 모양이었다.
   해가 있을 때 극동호텔에 내리면서 잠간 들어 갔다 나오겠다던 원장님은 밤 10시가 훨씬 지나서야 혼자 나타나 차에 올랐다. 그렇게 비틀거리는 것 같지는 않아도 창문이 닫혀서인지 역겨운 술 냄새가 차안에 확 풍겼다.
   차가 수영비행장 앞을 지나 자동차 교습소가 보이자 원장님은 생각이 난 듯 차를 세우라고 했다.
   " 내 오늘은 운전 연습을 못했단 말이야."
   " 학원은 벌써 문을 닫았는 데요."
   " 그래, 알고 있어."
   원장님은 차에서 내려 운전대 쪽으로 걸어오며
   " 자네는 옆으로 타게."
   " 안 됩니다, 박사님. 무면허자에게 운전을 하게한 자는 벌금 만 원에다 면허행정 10 일입니다. 물론 운전을 한 사람은 형사 입건이고요."
   " 이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자네만 면허증이 있는 줄 아나. 나도 있네. 나도 있어. 자 보라고."
   원장님은 언제 면허증을 땄는 지 안 주머니에서 파란수첩을 꺼내어 강희의 코 앞에다 내밀었다.
   " 그렀습니까. 하지만..."
   " 하지만 뭔가 ? 시장님께서 운전을 해도 좋다는 데, 자네는 안 된다는 건가, 뭔가 ?."
   " 저 오늘은 아무래도 술이 좀....더욱이 밤이라."
   " 웬 잔소리가 그리 많아. 자네가 교통순경인가 ? 되지 못하게."
   원장님은 정말 취했는 지, 병아리운전사라 얕잡아 보느냐고 호통을 치기도 했고. 나중에는 내차로 내가 운전을 하겠다는 데무슨 상관이냐고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그래서 강희는 할 수 없이 차에서 내렸다.
   " 어어이 이 기사 안 타고 뭐하는 거야 ? 설마 잘란 그 목숨이 아까워서 그러구 서 있는 건 아니겠지."
   원장은 강희를 끌어 내다 싶이 하여 운전대에 올라 앉아 조수대 문까지 열어두고 소리쳤다.
   강희는 그렇게 야유를 받으면서도 차마 버스 정유소로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고 조수대에 올라 앉았다.
   11시가 가까운 수영로는 지나가는 차도 오가는 사람도 없었다.
   원장님은 스타트를 하다가 두 번이나 시동르 껐다.
   " 어이 차가 왜 이래 ?.'
   " 싸이드를..."
   " 이 사람아 평지에서 싸이드를 체우면 어떻게 해."
   그러나 핸드 부레이크를 풀고도 차는 전진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크랏치를 너무 빨리 떼었기 때문에 시동이 꺼진 것이다. 그렇게 몇 번인가 울커대다가 푹 하고 앞으로 나갔다. 차가 일단 전진하자 기아 변속도 순조롭고 속력도 점점 빨라졌다.
   박원장은 정말 신이 났다. 어두운 망망 대해를 헤트라이트 불빛이 쫙 갈라 주었고 그 불빛을 따라 자동차는 기를 쓰고 달렸다.
   " 박사님 제발 속력을 좀 낮추어 주십시요.."
   순식간에 수영 삼 거리가 눈 앞에 다가왔다. 거기에는 제법 많은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뒤엉켰다 사라졌다 하였다.
    " 이 사람아 운전은 운전사한테 맡겨. 무슨 잔소리가 그리 많은가."
   농담인지 핀잔인지, 박원장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차를 몰았다.
   " 박사님 차를 우측으로 붙이셔야지요. 망미동으로 넘어가시려면요."
   " 응, 그래."
   신호대기선이 눈 앞에 다가왔기 때문에 차는 급히 1차선에서 우회전 선에 꺽어 들었다. 그 통에 강희의 어깨가 조수대 문짝에 와서 부딛쳤다.
   " 어어어...'
   만약을 대비해서 강희가 잡고 있었던 핸드부레이크가 절로 당겨졌다. 갑자기 속력이 떨어지자 박원장의 이마가 앞 유리를 박으려다 다시 뒤통수가 시트베개에 와서 부딪쳤다. 강희가 급히 핸드 부레이크를 풀었기 때문이었다.
   한 동안 S자로 요동을 치던 자동차는 간신히 제 진로를 찾았다.
   " 박사님 이제 그만..."
   " 괜찮네 .도로가 넓어서 좋구만 ! 허허."
   원장님은 술이 과한 것인지 실성한 것도 같아서 강희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금방 무슨 일이 일어 날 것 같았다.
   " 박사님 제발 차를 좀 세워 주십시요. 이러다간...."
   " 그 사람 되게 말이 많구만 !."
   차는 어느새 망미도 고개를 오르고 있었다.
   강희는 다시 손으로 핸드 부레이크 레바를 잡았다.
   고개를 넘어서 100M가까운 지점에 버스정유소가 있고 거기엔 막 도착한 버스 한대가 정차해 있었다.
   술 취한 레코드 로얄이 오육 미터를 앞 두고 그 버스 옆을 통과하려는 찰라에 버스에서 내린 승객 한 분이 그 버스 앞을 지나 도로를 횡단하려고 뛰어 나오고 있었다.
   " 스톱, 스톱."
   강희는 있는 힘을 다하여 핸드 브레이크를 잡아 당겼다. 그러나 내리막 길에 내달리는 탈력에 핸드 브레이크는 당기나 마나였다.
   순간 검은 물체가 둔탁하게 앞 반바에 부딪치는 것 같더니 금방 앞 유리가 탁 하고 운전대 안으로 밀려왔다.
   자동차는 사고 지점에서 50M지나서, 그것도 순전히 강희가 잡아 당긴 싸이드 부레이크에 의해 세워졌다.
   " 원장님 사고가 났습니다 . 앞으로 타십시요."
   강희는 원장님을 조수대로 밀어 붙이고 운전대에 올라 앉아 급히 후진을 했다.
   통금에 쫓긴 버스가 떠나 버린 길 바닥에는 피투성이가 된 환자가 내버린 마네킹처럼 나딩굴어져 있었다.
   강희는 얼른 차에서 내려 웅성거리고 서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가 환자를 들쳐 안았다. 덩치는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는 않은 데 천 근 같이 무거워 혼자서는 도저히 들 수가 없었다. 피투성이가 되어서 그런지 아무도 나서서 도와주지 않았다. 그는 할 수없이 환자를 추술려 안고 질질 끌었다. 그러자 어떤 야간 여학생이 책가방을 땅에 놓아 두고 끌려가는 두 다리를 들어 주었다. 달아나던 아가씨가 되돌아 와서 자동차 문을 열어 두고 발을 동동 굴었다.
   그 때까지 박원장은 찌그려진 앞 유리에 머리를 쥐어 밖고 죽은 듯이 꼼작하지 않고 엎드려 있었다. 연산동 시립병원 앞에 차가 멎자, 그제야 정신이 돌아 왔는 지 황급히 내려 혼자 병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병원 복도는 그믐달 밤의 공동 묘지처럼 음산하고, 어느 제약회사에서 선전용으로 만들어 가져다 놓은 길다란 나무의자는 얼음 속 같이 차가웠다.
   강희는 바지에 배어 든 피가 굳어서인지, 그렇지 않으면 얼어 붙어서인지 옷이 뻣뻣하여 오줌을 싼 것처럼 아주 기분이 찝찝했다.
   " 이 기사. 자네 살기가 딱하지 ?."
   응급실에서 나온 박원장은 덥석 강희의 손을 잡고
   " 자네 살기가 딱하지 않는 가 ?."
   하고, 재차 물었다.
   " 염려 마십시요, 박사님. 운전자의 인적사항은 제가 말씀 드렸습니다."
   " 뭐라구 ? 인적 사항을..."
   원장님은 붙들었던 손을 놓고 절망적인 어조로 물었다.
   " 네. 저의 면허증을 제시해 보였습니다."
   " 뭐 ! 자네가...?."
   강희는 그것이 모두가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 정말 잘 했네 ! 내 자네의 은공은 평생 잊지 않겠네. 뒷 수습은 내가 책임지고 할테니까 자네가 대신 고생을 좀 해 주게. 일이 잘만 해결되면 내 자네가 살만치....."
   그 때 병원으로 부터 신고를 받고 달려 온 경찰관 두 명이 급히 응급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대화는 거기서 잠시 중단되었다.
   " 박사님."
   " 응. 그래 ?."
   " 제가 박사님 대신 나선 의도가..."
   그때 응급실 문이 열리면서 경찰관 한 명이 이 편을 걸어 오고 있었다. 그래서 대화는 다시 중단되었다.
  경찰관은 사고를 낸 운전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강희는 말없이 나무의자에서 일어나 경찰관 앞으로 걸어갔다.
   " 당신이 사고를 냈소 ?."
   " 네."
   " 날 따라 오시요."
   동래경찰서 페트롤카가 시동이 걸린 채 병원 현관 앞에 서 있었다.
   " 어서 타라고."
   먼저 경찰관이 운전대에 올라 앉았다.
   " 어디로 가는 거니까 ?."
   " 어디로 가다니 사고를 냈으면 조서를 받아야지."
   경찰관은 이런 일이 처음이냐고 물었다.
   " 네."
   차 안은 히타를 틀어서 그런지 따뜻했다.
   " 아 잠간만..."
   원장님에게 전할 말이 있다고 하니 경찰관은 몇 바퀴 굴러가던 차를 세워 주었다. 그래서 차에서 내려 병원 안으로 뛰어가던 강희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현관에 나와 자기 대신 잡혀가는 기사를 바라보던 원장과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 원장님 저의 집에는 이 일을 알리지 말아 주십시요."
   " 그래. 내 내일 사람을 보내서 자네 부인한테는 적당한 구실을 붙혀 말해 둘테니. 그 점은 염려말고 몸 조심이나 하게."
   차는 동래결찰서를 향해 붉은 불빛을 번떡이면서 떠났다.
   " 어이 너거 사장님 정말 좋은 사람인데 !."
   페트롤카를 운전하고 있는 경찰관의 말이었다.
 
   오늘도 늦는 것일까.
   소영은 교정이 끝난 강희의 원고를 설합 속에 넣어 두고 부엌으로 나가 찌개 냄비를 내려두고 대문 밖으로 나갔다. 어느 때 같으면 남편이 돌아 왔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여태 돌아오지 않은 걸 보면 오늘도 12시를 체울 모양이었다.
   소나무 숲에 부딛치는 바람소리와는 달리 대문 밖에는 겨우 머리카락을 날릴 정도로 약한 바람이 불었다. 그래도 한겨울 밤바람이라 살을 애듯 차가웠다.
   그녀는 돌각담 아래로 꼬불꼬불 하다가 기어이 어둠속으로 묻혀버린 오솔길를 내려다 보며 한참 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그래도 남편은 소나무 가지가 늘어진 바위 옆 길로 올라 오지는 않았다.
   소영은 한숨을 푹 쉬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서 윗목에 놓여 있는 실 바구니를 들고 이부자리가 깔린 아랫목으로 내려왔다. 바구니 안에는 조금만 더 짜면 입을 수 있는 남편의 쪼끼 스웨타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초가을 어느 날 시장 근방에 있는 수예점 쇼윈드에서 발견하고 하도 색갈이 곱고 감촉이 부드러워 보이기에 남편의 쉐타를 짜주려고 사온 것이었다.
   처음부터 실이 좀 모자랄 것 같았으나 수예점에서 충분하다고 하기에 구입한 것인데, 짜다 보니 역시 자기의 예상대로 팔소매 하나가 조금 모자랐다. 그래서 다시 점포에 가서 말을 했더니 미안하다는 말은 없고, 오히려 이편에서 욕심을 내어 뚜껍게 짰기 때문이라고 했다.
   " 그럼 어쩌지요 ? 주먹만큼 더 있으면 되겠는 데."
   실은 보세공장에서 흘러 나온 것이라 더 이상 없다고 했다. 그래서 소영은 할 수 없이 그것을 디시 풀어서 소매가 없는 쪼기를 짜고 있는 것이다.
   이불 속에 발을 넣고 뜨개질을 하던 그녀는 밤이 깊어서인지 차가운 벽에 등을 기덴 채 깜박 잠이 들었다.
   100M 남짓한 곳에 건너가는 다리를 두고도 남편은 갈대가 듬성듬성 돋아 난 늪지대를 가로질러 차를 몰고 있었다.
   " 안 돼요.여보. 제발 저기로 돌러서...."
  짙은 구름과 억수 같이 퍼붓는 비 때문일까, 벌판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 여보 제발...."
   그러나 순식간에 자동차의 빨간 후미등 불빛마져 물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사방은 칠흑 속에 묻혀 버렸다.
   " 오오 이럴 수가 ? 이럴 수가....."
   빗줄기는 더욱더 거세였고 물은 점점 더 불었다. 그래도 소영은 남편을 애타게 부르며 불빛이 사라진 어둠 속을 달렸다.
   그런데 갑자기 환해지며 앞으로 길다란 자기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뛰던 걸음을 멈추고 반사적으로 획 뒤돌아 보았다. 멀리 신작로에 서 있는 자동차에서 두 줄기 강한 헤드라이트가 그를 향해 비추고 있었다. 그 불빛속으로 누군가가 물을 첨벙이며 이 편을 달려오고 있었다.
   " 아가씨. 소영 아가씨."
   숨을 흘덕이고 팔을 내져으며 달려오는 부관을 소영은 멍청한 얼굴로 뒤돌아 서서 보고만 있었다.
   " 아가씨 가십시다. 어머님이 기다리 십니다."
   " 네, 엄마가요 ?."
   " 그렀습니다. 장군님의 차에서..."
   " 하지만 안 돼요. 전 그이를 찾아야 해요."
   소영은 부관이 잡은 손을 뿌리쳤다. 그러자 부관은 그녀를 강제로 끌고 짚차가 있는 쪽으로 데리고 갔다.
   차 속에는 꿈에도 그리워했던 어머니가 두 손을 합장한 채 눈을 깜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가까이에 와 보니 와락 품에 안기고 싶은 충동은 사라지고 어쩐지 싸늘한 거리감이 왔다.
   " 사모님. 아가씨를 모셔왔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눈을 뜨지 않았다.
   " 타시지요."
   " 안 돼요. 그일 찾아야 해요."
  소영은 차를 타지 않으려고 팔을 내저었다.
   " 부관."
   " 네, 사모님."
   " 그 애를 얼른 태우게."
   " 네 사모님."
   부관은 소영을 보고 정중히 차 안으로 손짓을 했다. 그래도 소영이 차에 오르지 않고 되돌아 가려고 하자 부관은 운전병과 합세하여 강제로 그 녀를 짚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소영은 달리는 차 속에서 남편의 이름을 부르면서 발버둥치다가 기어이 문을 박차고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 아아 꿈이었구나 !."
   차에서 떨어지며 놀라 깨어 보니 꿈이었다.
   차가운 벽에 기대어 잠이 든 그녀는 모로 넘어졌다. 어깨가 뻐근하고 팔은 움직일 수없을 정도로 뻣뻣했다. 그러나 소영은 남편과의 슬픈 이별이 현실 아닌 꿈이었기에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그러다가도 꿈 치고는 너무나 괴상한 악몽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가슴이 뛰고 불안하기 시작했다.
   어디서인가 괘종소리가 은은히 세 번이나 들려왔다. 그 후 그녀는 다시 눈을 붙이지 못한 채 병원에서 사람이 올 때까지 얼마나 대문 밖을 들락거렸는 지 모른다.
   " 네에, 그런 일 같으면 천천히 연락을 하셔도 될 텐데. 정말 죄송해요. 이른 새벽에."
   남편을 어제 밤 갑자기 원장님의 장모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사모님을 태우고 서울로 출장을 갔다고 했다.
   " 실로 저도 그럴려고 했는 데, 원장님이 여러 번 당부하셨어요. 언니가 걱정을 하실테니 통금 해제와 동시에 택시를 타고 가서 연락을 하라구요."
   " 정말 자상하고 고마우신 분이군요 ! 아가씨에겐 미안하지만요. 근데 그건.... ?."
   " 돈이애요. 몇 일이나 걸릴지 모른다고, 그간 생활비에 보태 쓰라고 하던데요."
   간호사는 두툼한 봉투 하나를 내밀고 돌아갔다.
   빨리 가야한다는 간호사 아가씨을 배응하고 돌아 와 소영은 봉투속에 있는 것을 꺼내었다. 5천 원짜리 한 다발이 들어 있었다. 세어 보지 않아도 50만 원은 될 것 같았다.
   소영은 어리둥절하여 어쩔 줄 몰랐다.
   ( 무슨 일일까 ? )
   급료를 받은지도 얼마되지 않았는 데, 추석 명절이 되어도 떡 값은 고사하고 양말 한 쪽 주지 않던 원장님이 아무리 자기 장모님의 병환 때문에 출장을 보냈기로서니 그 많은 돈을 줄 까닭이 없지 않은가. 그녀는 지난 밤의 악몽이 생각 나 자꾸만 불안해졌다.
   삼 일이 지나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병원에서도 더 이상 아무른 연락이 없었다. 그렇다고 남편의 근무처에 전화로 물어 볼 수도 없었다. 아내란 모름지게 어떻한 경우에도 남펴의 직장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또 다시 불안하고 초조한 가운데 이틀 밤이 비몽사몽으로 지나갔다.
   소영은 아무래도 더 이상 가슴만 태우고 있을 수 없어서 이침 일찍 서둘러서 집을 나섰다. 남편의 친구 만길씨의 도움을 청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막 대문을 나서려는 데, 어떤 아가씨가 담 넘으로 기웃거리다 깜짝 놀라며 돌아 서서 머뭇거렸다. 어제 해질 무렵에도 그 아가씨는 그렇게 서성대고 있었다.그 때는 등에 업힌 애기를 잠 재우느라고 그러는 지 몸을 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 다급한 소영은 그저 이웃에 새로 이사 온 새댁이러니하고 가볍게 목례를 하며 지나치려는 데
   " 저어...."
   하고, 더듬거리며 말을 걸어 왔다.
   " 혹시 이 댁에 이강희씨라는 분이....? "
   " 네, 제가 바로 그 분의 아내되는 사람인데요."
   " 네에, 역시 그렇군요 ! 근데 집에 계시나요 ?."
   서을 출장 중이라고 했다.
   " 네 역시 그랬군요 !."
   " 대관절 무슨 일로 그일 찾으시나요 ?.'
   " 조용히 말씀 드리고 싶은 데요.'
   " 그럼 안으로 들어 오세요.'
   " 이나에요. 언닌 지금 외출중이신가 본데, 저어 제가 묵고 있는 여관으로 잠깐 들려가시면 안 되겠어요 ?."
   " 여관 이라고요 ?."
   " 네 여관요. 바로 요 아래 금강원 입구에 있어요."
   소영은 마치 여우에라도 홀린 것처럼 멍멍한 가슴이 되어 그 여인을 따라갔다.
   여인숙의 구석진 방 아랫목엔 포대기에 싸인 갓난 애기가 잠이 들어 있었다.
   " 누추하지만 잠간 들어 오세요."
 
   소영은 눈 앞이 캄캄했다.
   한참 지나고 나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조금 전 여인이 자기의 입에 물을 먹이고 있었다.
   " 죄송해요. 언니. 어떻게 하던 저 혼자 키워 보려고 했는 데...."
   " 아가씨, 그럴 것 없어요. 그이하고 함께 사세요. 제가 떠나겠어요."
   " 언니, 아니에요."
   " 미안해 할 것 없어요. 어차피 일은 저질러진 거니까요."
   " 아니에요. 저어.....전 사실 강희씨를 사랑하지 않아요."
   " 그럼 새 사람이라도 생겼단 말인가요 ?."
   소영은 언성을 높혔다.
   " 그럼 어째서 사랑하지도 않은 사람의 애기를..... ?."
   "...."
   "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본의에서 든 타이에서 든 지금은 어쩔 수 없잖아요."
   " 전 다른 뜻으로 강희씨를 찾아 온게 아니에요. 조금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처음에는 혼자 키워 보려고 했는 데, 막상 산달이 가까워 집을 나오고 보니...."
   여인은 울고 있었다. 그간 얼마나 고생을 하였던지 아직도 애티가 가시지 않는 얼굴이 누렇게 뜨서 부석부석했다.
   ( 못쓸 사람 ! 철없는 아가씨에게 이처럼 가혹한 고통을 안겨 주고도 뻔뻔스럽게 여태 말 한 마디 없다니.)
   소영은 배신의 분노와 뼈에 사무치는 고독이 밀물처럼 몰려 왔다.
   " 아가씨 저로서는 당장 그 애기를 받을 수가 없군요. 그러니 그이가 돌아오거든 상의해 보세요. 죄송해요. 될 수 있는 대로 하루 속히 돌아오도록 노력해 보겠어요."
   소영은 여인숙을 뛰쳐나오면서 수없이
   " 이럴 수가 ! 이럴 수가 !."
   하고 ,되뇌였다.
   하루 종일 물 한 방울 넘기지 않고 어디를 어떻게 헤매고 다녔는 지. 만길이 아파트로 들어가는 입구 화단에 멍청히 앉아 있는 소영을 발견한 것은 밤 10시가 훨씬 지나서였다.
   " 아니 볼 일이 있으면 관리실에 가서 열쇠를 받아방에 들어가서 기다리지 않고 이 추운 날에...."
   " 아니에요. 우리 그이에 대해서 몇 마디 물어 볼 일이 있어서...."
   소영은 입이 얼었는 지 말이 잘 되지 않았다.
   " 그래도 그렇지요. 어쨌든 들어가서 애기 합시다."
   " 아니에요."
   " 허허 참 !."
   만길은 소영의 등을 떠밀다 싶이 하여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갔다.
   " 그래 이군한테 무슨 일이 있습니까, 재수씨 ?."
   입술이 파랗게 얼어서 소영은 턱을 들들 떨었다.
   " 죄 죄송합니다."
   " 아 !. 잠간 기다리십시요. 내 차를 따끈하게 끓여 오겠습니다. 그리고 우선 이걸 한 잔 마셔 보십시요."
   만길은 먹다 남은 소주 한 잠을 부어서 안주 없이 내밀었다. 소영은 손을 내져었다.
   " 그러지 마시고 한 모금만."
   갑자기 들어대는 바람에 소주 몇 방울이 목구멍으로 넘어 갔다. 빈 속이라 그런지 창자가 찌르르 하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소영은 만길이 맥주잔에다 가득 부어 주는 따끈한 우유를 두어 모금 마시고 나서 한참 있다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만길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 다는 듯 계속
   " 그럴리가 ? 그럴리가 없는 데."
   라고 중얼거렸다.
   " 나에게도 통 그런 눈치를 보이지 않았는 데, 혹시 그 여자가 사람을 잘 못 알고...."
   " 그렇지 않을 거에요. 지금 가만히 생각하니 지난 일 년 간 행동이 좀 이상했어요. 하지만 전 그이가 애정 문제로 저를 속이리라고는 꿈에도 상상 못했어요."
   " 어쨌든 그놈의 입으로 직접 말을 들어 보고 이야기 합시다. 난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라 놔서...내가 내일 병원으로 찾아가서 출장이고 나팔이고 다 때리치우고 당장 내려오라고 하지요."
   " 정말 그래 주시겠어요. 그 출장이라는 것도 이상해요."
   소영은 병원에서 돈 50만 원을 보내 왔더라는 말도 했다.
   " 아니 뭐라구요 ? 돈을 50만 원이나 !."
   만길은 여자 문제 보다도 거기에 더 큰 의혹이 갔다.
   " 어쨌든 내가 내일 찾아가서 알아 보겠습니다."
   만길은 혹시 지금 쯤 남편이 돌아와 있을 지도 모르니 집으로 돌아 가겠다는 소영을 붙들지는 않았다.
   다음 날 기사의 아내가 갑자기 위독하여 입원을 하였다는 말에 박원장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 그러니 원장님. 죄송하지만 강희를 좀 내려오게 했으면 좋겠는 데요.'
   박원장은 심히 난처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 원장님도 알고 계시는 지 모르지만 강희는 물론 그의 부인에게도 일가 친척이라고는 없거든요."
   "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떻겠소 ?."
   어느 병원인지는 모르지만 보호자가 없어서 수술을 못한다면 자기가 보증을 서 주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 원장님 단순이 병원에서 필요로 하는 보호자 때문만은 이닙니다. 환자가 남편을 몹시 찾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만약 남편이 부재중에 불행한 일이라도 당한다면 그 원망을 어떻게 감당하시겠습니까 ?.'
   " 정말 난처하군 !."
   " 원장님 원장님의 처가에 강희가 없어서 불편한 점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다 같은 인간의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십시요. 이 편에는 직계 가족의 생사가 걸려 있는 문제입니다."
   " 내가 왜 그걸 모르겠소  일이 이렇게 된 바에야 내 솔직히 애기하리다. 이 기사는 지금 경찰서 유치장에 있소."
   " 네, 유치장에요 ?."
   " 그렇소. 집 사람이 놀랄까 봐 비밀을 지켜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하길래."
   " 물론 인사 사고 겠지요 ? 피해자가 얼마나 다쳤나요 ?."
   "죽었소."
   처음에는 죽지 않아서 빨리 해결이 날 줄 알고 그랬다고 했다.
   " 이거 정말 큰일 났군요. 우리는 그런 줄도 모르고 사실 원장님을 원망까지 하였답니다. 용서 하십시요."
   " 뭘요. 오해를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요.'
   피해자가 젊은 사람인데다 1급 건축기사라 보상금을 어마어마하게 요구해 온다고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자기가 책임지고 해결을 할테니 강희의 아내에게는 계속 비밀을 지켜주면 좋겠다고 했다.
   " 환자의 건강을 위해 당부 드리는 겁니다."
   " 감사합니다. 원장님 ! 정말 감사합니다."
   박원장은 친절하게도기사의 아내가 입원한 병원이 어디냐고 물었다.
   자기가 직접 찾아 가지는 못하더라도 전화로 담당 의사한테 부탁이라도 하고 싶다고 했다.
   " 아닙니다 원장님. 그 일은 염려마십시요. 제가 어떻게 하든 잘 되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효성 산부인과를 물어 나온 만길은 동래 경찰서로 차를 몰았다. 그러나 강희는 경찰서 유치장에는 없었다. 이틀 전에 법원 구치소로 넘어 갔다고 했다.
   만길은 경찰서를 나와 교도소를 향해 달리면서 이상한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모든 것이 박원장의 말대로라면 강희의 집에 그 많은 돈을 보내 줄까닭이 없지 않는가.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종일 교도서 앞에 차를 세워두고 면허를  한 결과 강희의 입에서도 별 신통한 말이 흘러나오지 않았다.그놈의 행동에는 수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말은 억지로라도 박원장과 일치했다.
   그는 자꾸 피해자 측과의 합의가 어떻게 되어가는 것 같더냐고 물었고, 죄를 지은 놈 치고 뻔뻔스러울 정도로 태연했다. 어떻게 보면 자기가 무슨 독립운동 같은 것을 하다가 잡혀와서 앉아 있는 놈 같이 당당하기 까지 했다.
   " 너 눈두덩이 많이 상했구나 ! 사고 때 다친거니 ?."
   처음에는 아니라고 했다가 금방 또 고개를 끄덕이며
   " 응 그래. 핸들에 조금....."
   하고 , 얼버무렸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 입감신고 때 당한 부상이었다. 그런 곳은 처음이라 문지방을 밝고 넘었기 때문에 신고는 배로 가중되어 호된 고통을 당했던 것이다.
   "근데 참 ! 내 너한테 한 가지 물어 볼게 있는데, 깜박 잊을 번 했구나."
   " 물어 볼 말이라니 ?."
   " 너 혹시, 미 뭐라더라 ? 그래 미란이라는 아가씨를 알고 있나 ?."
   " 미란이라고 ?."
   " 그래, 미란. 네가 전에 있었던 회사에 다녔다 더군."
   " 그래서 ?.'
   " 깊은 관계였나 ?."
   " 그건  갑자기 왜 ? "
   " 임마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 한 때 조금......."
   " 나쁜 놈 ! 아니 그런 아내를 두고 네가 감히..."
   "  할 말 없네. 처음에는 그러려고 그런 것은 아니었는 데....."
   " 임신을 한 건 알았냐 ?."
   " 돈을 주었는 데. 병원에 가라고."
   " 나쁜 인간 ! 애기를 업고 왔네. 네 놈의...."
   " 뭐라고 ? 아이를...."
   강희는 뒤로 주춤 물러 나다 다시 가끼이 오며
   " 그래. 여기 함께 왔단 말이야 ?."
   하고, 신음처럼 물었다.
   " 왜, 보고 싶은 가 ? 니놈의 새끼를."
   그 때 간수가 시간이 넘었다고 해서 면회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만길은 다시 차를 돌려 강희의 집으로 달리면서 그의 부인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몰랐다. 박원장의 말대로 계속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그렇지 않으면 사실대로 이야기를 하고 주어진 운명에 대처해 나갈 준비를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만길은 여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강희의 직장으로 그를 만날 구실을 만들어서 갔다가 엉뚱하게도 그 일을 해결할 장본인이 사고를 내고 영어의 몸이 되었다는 대는 아연하지 않을 수가 없었었다. 이제는 그까짓 여자 하나가 아이를 낳아온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소영은 눈이 뚱뚱 부은 채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 원장님을 만나셨나요 ?."
   거기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만길은 소주 한 병을 사오라고 했다.  그래서 순영이 사 온 것을 연거퍼 두 잔을 마시고 나서  
   " 제수씨. 당분간 그 놈을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 네, 그렇게 심각한가요 ? 그 쪽 일이."
   "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일이 빨리 끝날 것 같지 않아서 마냥 속이고 있을 문제가 이니였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손으로 또 한 잔을 부어 마시고 나서
   " 제수씨 놀라지 마십시요. 그 놈은 지금 큰 집에 들어가 있습니다.'
   " 네, 큰 집이라니요 ?."
   " 사고를 냈다는 군요."
   소영은 얼굴에 핏기를 잃어가며 오들오들 몸을 떨었다. 냉정을 찾으러고 그러는 지 잇빨 깨무는 소리가 뿌드득 들렸다.
   " 너무 걱정 하지 마십시요."
  " 네, 피해자가 죽었다는 데두요 ?."
   " 그런데 석연 찮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두고 보십시요. 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꼭 흑막을 밝히고야 말겠습니다.
   그러면서 만길은 처음 목적한 여자 문제에 대해서는 일언방구 하나 없이 집으로 돌아 가버렸다.
   다음 날 그는 다시 교도소로 강희의 면회를 갔다.
   " 너의 원장님이 운전을 배우려 다닌다더니 면허증을 땄니 ?."
   만길은 흘러버리는 이야기처럼 물었다.
   " 그건 갑자기 왜 ?."
   " 응, 전에 그런 말이 들리기에 물어본 것 뿐이야. 요즘 기사가 없어서 많이 불편하겠구만."
   "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할 줄만 알면 아무한테나 내주는 걸 박사님이라고 못 따라는 법은 없겠지.'
   " 그래. 낸 것이 분명하구나 ! 그런데 말이야. 너도 생각을 좀 달리 해야 겠더라."
   " 그건 또 무슨 소리야 ?."
   " 아무래도 원장님이 합의를 서두러지 않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러면서 만길은 슬쩍 강희의 눈치를 살폈다. 분명히 배신의 분노 같은 것이 그의 얼굴에 떠오르고 있었다.
   " 너 의리도 좋고 돈도 좋지만, 의란 그것을 진실로 받아 드리는 데 가치가 있고, 돈을 순리대고 일 원에서 부터 쌓아 올려야문어지지 않는 법이다."
   " 너 오늘 정말 이상한 말만 하는 구나 !."
   강희는 참다 못하여 미란의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사고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쓸 문제가 아니라는 투다.
   " 임마. 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그건 네 놈이 나가서 해결할 문제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풀려날 궁리나 해.'
   " 들어 앉아 있는 놈이 무슨 수로 ?."
   " 이 멍청아, 네 놈이 택한 앞길은 끝없는 수렁이다. 그래도 남의 총대를 매겠다는 거냐, 이 등신아 ?."
  그러자 찌그러진 나무책상의 서랍에 못질을 하고 있던 간수가
   " 어어이 젊은 친구. 핏대만 올리지 말고 말을 좀 크게해. 통 뭤이 들려야지."
   " 네 죄송합니다. 이놈이 자꾸 공초라도 하나 달라기에..."
   만길은 어색한 얼굴로 씩 웃고 나서 또 다시 나지막한 음성으로
   " 어어이 시간 없다. 내 딱 한 가지만 물어 보겠는 데, 네가 한 일이 아니지 ?."
   "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
  " 좋아. 네 놈이 정 입을 열지 않는 다면 다른 방도를 쓰는 수 밖에. 그럼 실컨 고생이나 해라 이 먹통아."
   그러면서 돌아서려는 데
   " 야 제발 조용히 좀 있어 주라 응."
   하고, 애원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래서 만길은 더욱더 심중을 굳히고 다시 병원으로 달려갔다.
   " 여보 젊은 양반. 듣자니까 나에게 보상 문제를 빨리 해결해 주지 않는다고 따지려 온 것 같은 데 ?."
   " 그럼 언제까지 죄 없는 사람을 옥살이 시키겠다는 겁니까 ?."
   만길이도 지지 않고 음성을 높혔다.
   그러자 박원장은 훔짓 놀라는 것 같더니 얼른 태연을 가장하며
   " 아니 죄가 없다니 ? 사람을 치어 죽였는 데도."
   " 물론 치어 죽인 사람이야 죄가 있겠지요.'
   " 그런데 ?."
   " 왜 이러십니까 박사님. 하루를 살아도 의리를 의리로 받아주는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까 ?."
   " 그건 또 무슨 소리요 ?."
   박원장의 이마에는 진땀이 흐르고 있었다. 기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느냐는 눈치다.
   " 바보는 바보답게 입을 다물고 있더군요. 그런데 원장님! 원장님은 그 바보의 충절이 불쌍하지도 않습니까 ?."
   입을 다물고 있더라는 말에 원장은 용기를 얻어 크게 소리를 질렀다.
   " 여보 젊은 친구 ! 당신이야 말로 의리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요. 물론 법적으로 보상 문제는 차주에게 있지만, 그렇다고 나에게 그런 무례한 짓을 할 수 있는 가 말이요 ?."
   박원장은 만길에게 앞으로 한 번만 더 허튼 수작을 하면 명예회손과 공갈 협박 죄로 고발하겠다고 얼음장을 놓았다.
   박원장이 그렇게 세게 나오니 만길은 또 다시 어리둥절 했다.어느 놈이 숫까마귄지 암까마귄지 분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굽실거리거나 사죄를 하지 않고 조근 풀이 꺾인 얼굴로 병원을 나섰다.
   잠시 후 그는 동래 경찰서에 와 있었다. 혹시 거기에서 무슨 단서를 잡을 수 있지 않을 까 해서였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별 하자를 발견하지 못했다. 경찰 조서에는 물론 현장 검증 때도 역시 가해자의 자백과 일치되어 있었다.
   " 젠장 !."
   만길은 몹시 실망한 얼굴로 머리를 갸우둥거리며 조사과를 물러나와 경찰서 마당에 세워둔 자기의 개인택시에 몸을 실었다.
   " 아 잠깐만 !."
   차가 출발을 하려는 데 수사과에서 뛰어나온 신사 한 분이 도어를 열고 그의 옆으로 올라 앉았다.
   " 죄송합니다. 일이 좀 있어서 손님을 모실 수가 없는 데요."
   " 좀 바빠서 그러는 데, 당신 가는데까지만 좀 태워다 주시요."
   " 전 온천장으로 가는 데요."
   " 아 나도 그쪽으로 가는 길이요."
   만길은 강희의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 기사양반 뭐 골치 아픈 일이라도 있소 ? 기분이 좋지 않은 얼굴인데."
   신사는 차창 밖을 내다보며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 아 네, 친구가 교통사고를 냈는데 좀 미심쩍은 데가 있어서..."
   " 미심쩍은 ?..... 그렇다면 교통사고를 가장한 야바위꾼한테....?"
   " 그건 아닙니다. 피해자가 죽었거든요."
   " 그럼....?"
   만길은 무심코 사건의 전말을 투들대며 시부렸다. 신사는 별 뜻이 없다는 듯 가끔가다 고개를 끄덕이더니 원예 고등학교 앞에서 차를 좀 세워달라고 했다.
   형식적으로 꺾은 메타에는 기본요금 그대로였다.
   " 처음부터 영업은 하지 않는 다고 했는데요. 그냥 내리십시요."
   " 그럼 메타는 ?."
   " 손님을 태우고 그것을 꺾지 않으면 메타 불사용으로 걸리는 데요. 벌금에다 차량 행정까지요."
   " 네 그렇군요 ! 그럼 택시에 요금을 줘도 안 받는 것은 위반이 아닙니까 ?."
   " 글쎄요. 법인택시라면 사규에 걸리는지는 모르겠네요."
   손님은 씩 웃고 나서 억지로 돈을 시트에 던져주고 가버렸다.
   이날 밤 만길은 아파트로 배달 된 석간 신문을 보고 기겁을 하고 놀랐다.

   ( 이럴 수가 !  그게 아니였는 데 !.)


   신문에는 대문 짝만한 활자로 < 의리를 악용한 병원장 >이라는 제하의 기사에 사건 전모가

세세히 파해쳐져 있었고, 박원장의 비 인도적 사생활과 기사의 슬픈 과거까지 상세하게 나 있었다.
   만길은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몰랐다.

모든 것이 짐작대로 였지만, 일이 이렇게 엉뚱한 방향으로 터질 줄은 몰랐다.

그가 사건의 내막을 알고자 한 것은 박원장의 약점을 충동질 하여 하루 속히 피해자 측과

합의를 봄으로 해서 강희를 빨리 풀려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놈의 신문기자 때문에 일을 이렇게 망쳐 놓았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모두가 한꺼번에 망하는 골이 아닌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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