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어디로 가나

10. 어떻게 하나

오늘의 쉼터 2014. 8. 26. 12:05

10. 어떻게 하나
 
 
   사장님과 윤양과의 관계가 표면화 되자 미란은 강희에게 다시 접근해 오기 시작했다.
   " 아저씨, 저 가는 데까지만 태워다 주세요."
   " 가는 데까지라니 ? 너의 집은 남부민동이 아니야."
   미란은 기사에게 집으로 들어 가라는 사장님의 전화를 받고 아예 퇴근 준비를 하고 내려와서는 차를 놓아 주지 않았다. 그녀는 강희와 같은 총무과 소속으로 윤양과는 여학교 선후배 관계였다.

올해 21살인 윤양 보다 2년이나 선배로서,

그녀 또한 사내에서 좀 난하게 논다는 쪽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미란은 대연동 친구네 집에 볼 일이 있다고 하면서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강희는 할수 없이 그를 옆에 태우고 차고를 향해 달렸다.
   문현 로타리를 지나 목골 고개를 넘어설 때까지 둘은 마무 말이 없었다.

미란은 한참 동안 멍하니 차창 밖을 바라 보고 있더니

조용히 고개를 떨구고 핸드백 끈을 만지작거리며 깊은 생각에 젖어 있었다.

친구네 집이 어디냐고 물어도 아무대답이 없었다.

   " 어디 쯤 내려줄까 ? 조금만 더 가면 차고데."

   그 말에는 대답도 없이 


   " 아저씨는 제가 그렇게도 미우세요 ?."


   하며, 격한 음성으로 물었다.


   " 밉기는... ?."

   " 그럼, 왜 절 피하려고만 하세요 ?."

   " 오해를 받을 까 봐 겁이 나서 그래."

   " 오해가 겁이 나심 그 반대로 하심 되잖아요."

   " 그 반대라니 ?."


   어느새 자동차는 차고 가까이에 와 있었다.

   " 어디서 내릴거야 ? 차고 안으로 함께 들어갈까 ?"

   " 아니에요. 세워 주세요, 여기."


   " 친구 집이 어디야 ?  내 거기까지 태워다 줄께."


   " 괜찮아요. 여기서 내려 주세요."

   " 그럼, 잘 가."

   그 말에는 대답도 없이 또 작별 인사도 없이 미란은 차고 앞 버스 정유소에서 내렸다.
   강희는 차고에 차를 넣어 두고 경비실에서 잠시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눈 후 집으로 가는

차를 타려고 버스 정유소로 나갔다.

마침 온천장으로 가는 버스가 서 있기에 막 타려고 하는 데 뒤에서


   " 아저씨,"


   하고, 부르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 아니, 친구네 집에 간다더니 ?."
 

  " 없어요. 어디로 가고."

   그러나 미란의 눈치가 좀 이상했다.

친구네 집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그새 갔다 왔을 것같지 않았다.


   " 시내로 들어가는 차는 건너편이야."


   " 알고 있어요." 

   " 그럼 왜 ?.....?."

   " 얘기 하고 싶어요."

   " 미스 정."

   " 네 ?.'

   " 내 심정 알지 ? 요즘."

   " 네, 알아요."

   " 그럼 건너가. 저기 마침 송도로 가는 버스가 오고 있어."

   " 아이 아저씨 정말 왜 그러세요 ?."

   그러다가 미란은 

   " 알았어요. 아저씨가 먼저 가세요. 여기도 마침 차가 오네요. 온천장으로 가는 버스가요."

   " 그래, 오늘은 미안했어 ! 내일 또 봐."


   강희는 미란을 향해 두어 번 손을 흔들고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심사에서 인지. 차가 막 출발을 하려하자

마주 손을 흔들던 미란이 갑자기 차장을 밀치고 차에 올랐다.


   " 또 어딜 가려고 ?."

   " 묻지 말아요."


   조금은 토라진 음성이다.


   강희는 한참 가다가 자리가 나서 미란을 앉이며 또 어디에 가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여전히 없었다
   버스가 서면을 지나자 차안은 점점 분비기 시작했다.
   강희는 승객에 떠밀려 미란이가 보이지 않은 곳까지 말려와 있었다.

그는 문득 이 기회에 중도에서 내려 다른 차를 타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미란의 동태를 살피려고 승객들의 어깨 넘으로 그녀를 살펴보았으나 어찌된 것인지

미란은 애기를 업고 있는 아주머니의 엽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지 않았다.
   자기가 너무 냉정하게 대하였기 때문인지,

그렇지 않으면 볼 일이 있어 중도에서 내려 버렸는 지 차안에는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자기의 행동이 떳떳하지 못함을 느끼고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후회도 되었다.
   강희는 늘 하던 데로 금강원 입구에서 내려 기념품 가게가 좌우로 즐비한 공원길을 걸었다.

상가를 지나 차밭골로 올라가는 지름길로 들어 서니 비춰주는 불빛이 없어서 길은 어두웠다.
   계절의 탔인지 오늘은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쓸쓸하고 허전하고 외로워지기까지 했다.

지금까지 이렇다 할 까닭 없이 이처럼 우울해져 보기도 처음이었다.

   " 아저씨."

   강희는 고개를 떨구고 계속 걸었다.

누가 뒤에서 부르는 것도 같았으나 전에 없는 일이라 개의치 않았다.

   " 아저씨 저예요.  저."

   그제서야 그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보았다.


   " 아니 ! 네가 ?."

   "...."

   " 난 안 보이길래 중도에서 내린 줄 알았지."

   " 숨어 있었어요. 아저씨 바로 뒤에."

   미란은 손을 입으로 가져가며 쿡쿡 웃었다.

   강희는 이제 화를 내지 않았다.

장난기 어린 미란의 눈이 샛별처럼 단발머리 속에서 빛났다.

소문과는 달리 청조하고 아름다은 눈동자였다.

갑자기 갖고 싶은 충동까지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그런 마음으로 뒤돌아 서지는 않았다.
떨어진 낙엽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스락 바스락 고요를 깨뜨렸다.

간간히 불어오는 늦가을의 산 바람이 솔밭 사이로 외로운 입새들을 떨어뜨리기도 했고,

떨어진 낙엽을 이리저리 굴리기도 했다.


   " 죄송해요. 아저씨."

   " 뭐가 ?."

   " 제가 밉죠 ?."


   " 배고프지 않아 ?."

   " 아이 묻는 말에 대답은 하지 안구서 ?."

   " 넌 ?."

   " 우리 그럼 차근차근 다시 얘기해요."

   "......."

   " 전 있잖아요. 아저씨가 자꾸만 좋아지니 어떡하지요 ?."

   " 농담 말리고. 난 아내가 있는 몸이야."

   " 에이 결혼을 해 달라고는 안 할테니 제발 제 앞에서는 아내,아내 하지 마세요."

   " 그렇다면 미스 정은 내가 어떻게 해 주기를 바라지 ?."


   " 모르겠어요. 지금은 다만 제 마음이 그렇다는 것만 전해 주고 싶어요."

   " 그게 정말이라면 야단인데 !."

   " 왜 빙그레 웃고 그래요 ? 남은 속이 타 죽겠는 데."

   " 미스 정."

   " 네 ?."

   " 우리 농담 그만하고 저녁이나 먹으려 가자고."


   " 그래요. 하지만 제가 한 말 믿어 주셔야 해요. 농담이 아니라는 걸 말이예요."

   둘은 바위에서 일아났다.

   강희는 또 다시 후회했다.

처음부터 밝은 데로 가지 않고 인적이 없는 산 속으로 데려가서 무드에만 젖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대성관 건너편 한식집에서 저녁을 먹고 나니 시간은 어느덧 10시가 넘어 있었다. 
   미란은 자기가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았아 죄송하다고 하면서 저녁 대접을 받은데 대한 보답으로

술을 사겠으니 딱 한 잔씩만 마시고 헤어지자고 했다.
   강희는 한시 바삐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순순히 그녀가 하자는 데로 따라 갔다.

그래서 들어간 것이 맥주 한 잔이 두 잔으로, 한 병이 두병 세 병으로 비워지자,

진로 두 병이 자기의 주량이라고 떠들어 대던 미란은 기어이 먼저 따운이 되고 말았다.
   강희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실로 그녀가 마신 술은 맥주 한 병이 채 못되었다.

나머지는 자기가 마셔 버렸던 것이다.

통금이 오기 전에 그녀를 돌려 보내기 위하여 빠른 속도로 연그퍼 마신 것은 이편인데

어디서 줏어 들은 풍월인지,

거품(맥주) 정도야 화장실만 가까이 있으면 끝이 없다던 아가씨가 여걸 답지 않게

먼저 뻗어 버렸던 것이다.
   강희는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비틀거리며 몸을 가누지 못하는 아가씨를 부축하여

걷기도 남 보기에 창피한 노릇인데, 이건 아예 축 늘어져 제발로 걸을 수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래도 처음 술집을 나섰을 때는 그렇게 취한 것 같지는 않았는 데 바깥으로 나와

그가 택시를 잡아오는 동안 미란은 창피도 잊은 채 길 바닥에  주저 앉아 있었다.

그 꼴을 보자 택시 기사는 무어라 욕설을 하며 총알 같이 달아나 버렸다.
   미란은 그래도 본 정신은 좀 있는 지 이런 상태로는 도저히 집으로 돌아 갈 수 없으니

술이 깰 때까지 여관 같은 데라도 좀 데려다 달라고 했다.

   " 무슨 소리야. 지금 택시를 탄대도 통금 안에 집까지 도착할까 말까야."

   " 그럼 잘 됐네요. 아예 여관에서 자고 가죠 뭐."

   그렇지 않아도 그러는 도리 밖에 없어서 강희는 미란을 추술려 업다 싶이 하여

가까운 여관으로 들어갔다.

   " 내 약 사 올께 잠깐 누워 있어."


   약방 문은 이미 닫았는 지도 모른다. 


   "그럴 것 없어요, 아저씨. 목욕을 하면 좋아 질거예요."

   " 참 그렇기도 하겠구나 ! 약이라고 술이 금방 깨는 것은 아니니까.

그럼 목욕이나 하고 푹 한 숨 자. 난 시간이 없어서 그만 가봐야 겠어."

   " 아이 아저씨 저 혼자 두고 가면 어떻 해요."

   " 미안해. 통금이 10분 밖에 남지 않았서."

   " 그럼 목욕물 털어주고, 절 거기까지만 부축해 주실래요."

    별로 혀가 고부러진 음성은 아니었다. 

   " 그래, 그럼 그렇게 하지."

   강희는 무엇에 쫓긴 사람처럼 초조한 얼굴로 황급히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온천지대라 그런지 더운 물은 힘차게 쏟아졌다.

그는 꼭지를 열어두고 재빨리 방으로 들어왔다. 

   " 자 물 털어 놨어. 어서 들어 가."

   " 죄송하지만 옷 좀 벗겨 주실래요 ?  술이 취해서 그런지 팔을 가누지 못하겠군요."

   갈 수록 태산이라더니, 이건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명색이 처녀의 몸으로 유뷰남에게 옷을 벗겨 달라니,

아무리 술에 취했기로서니 그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 설마 등을 밀어 달라고는 않겠지.)


   그러면서도 그는 차마 몸에 찰싹 달라 붙은 검정색 원피스의 지프에 손을 대지 못했다.

   " 아이 뭘 그러구 있어요 ? 집에 돌아 가기 바쁘시다면서요."

   미란은 강희 앞으로 바짝 등을 돌려 대고 재촉했다.


   " 응, 그래."


   강희는 응급결에 한 발자욱 뒤로 물러서며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헤치고 목털미를 더듬었다.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지프를 찾아 아래로 내리자,

몸에 터질듯이 팽팽하던 옷은 바나나 꺼질처럼 좌우로 갈라지며 흘러 내리다 팔꿈치에 걸렸다.

그러자 미란은 다시 돌아 서며 두 팔소매를 강희 앞으로 내밀었다.
   제법 쌀쌀한 날씨인데도 그녀의 몸에는 속이 훤히 들어다 보이는 브라자 하나만 덮혀 있었다.
   그는 또 다시 놀란 시선으로 여인의 소매 끝에 있는 단추를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더듬어 풀고

옷소매를 벗겼다.

   ( 이래서 뭇 사나이들이  꿀벌처럼 이 육체의 주위를 맴돌았든가 ?.)

   눈 속 같이 흰 삼각 팬티에 까만 브라자만 걸처져 있는 미란의 몸매는

과연 소문대로 돌부처라도 아랫도리가 스물거릴 정도로 육감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얼른 눈길을 돌렸다.

그 아름다운 육체 위로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지나갔을 까 하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그녀가 천하게 비쳐왔기 때문이었다. 


   " 자 어서 들어 가."

   강희는 외면을 한 채 뒤돌아 보지도 않고 욕실 문을 열었다.


   " 아이 이러고 어떻게 들어가요. 마자 벗겨 주셔야지."

   강희는 초조한 얼굴로 생각난 듯 후딱 시계를 보았다.

이미 12시가 지나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술이 확 깨면서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그래서 미란을 번쩍 들어 안고 씩씩거리며 안으로 들어가서 사정 없이 그녀를 욕탕 속에 던져 버렸다.


   " 어머머 !"


   그 다음 첨벙 하는 물 소리는 탕 안에서 났다.

거러니 집어 던진 사람도 더운 물을 험벅 뒤집어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꼴을 보고 미란은 고소해 죽겠다는 듯 물속에서 깔깔대며 배꼽을 쥐고 웃었다.


   " 그것 보세요. 숙녀를 그렇게 다루다간 금방 벌을 받잖아요."

   그러더니 미란은 또 갑자기 죽는 시늉을 했다. 

   " 아이 아저씨 엉덩이에 멍이 들었나 봐요 ! 꼼짝 못하겠어요. 


   그러면서 아픈 자리를 보려고 일어나다 도로 미끄러져 제 자리에 주져 앉았다.


   " 아이 아저씨 정말 큰 일 났어요. 이젠 영 일어나지 못하겠어요."


   그러니 옷을 벗고 들어와서 아픈 자리를 보아 주던지 만져 달라고 했다.
   강희는 들은 채 만 채 화가 난 얼굴로 욕탕 밖으로 나와 버렸다.

이제는 통금도 통금이지만 이렇게 함박 젖은 옷을 입고 집으로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애궂은 담배만 빨고 있었다.
   탕 안에서는 요란게 물  끼었는 소리가 났다.

처음에는 술이 취해 몸을 가눌 수가 없다고 하였다가,

나중에는 엉덩이를 다쳐서 곰짝할 수도 없다고 엄살을 부리던 그녀가 스스로 목욕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래서 방 안으로 들어 온 그녀는 대담하게 알몸을 가지고 사나이의 등 뒤에 머리를 기대오며


   " 아저씨 오늘은 정말 죄송해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너무 속상해 하지 마세요.

저기 옷을 말려 드릴께 얼른 벗어세요, 네."

   그러나 이 날 밤 미란은 강희를 정복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정말 뜻 밖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숱한 남자를 거쳐오면서 유흑을 당해 보기도 하고

제 스스로 몸을 맡겨 보기도 하였지만 아직 한 번도 자기의 육체를 보고 등을 돌린 사내는 없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유독 이 사나이만은 최후의 수단을 쓴 것 같은 데도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더욱더 화도 나고 물어뜯고 싶도록 그를 사랑하고 싶어 지기도 했다.


   ( 그 때는 왜 그랬을 까 ?  단순히 무드 때문이었을 까 ?.)

   오래 전, 어느날 둘은 우연히 송정 달맞이 고개로 드라이브를 하다가 차 속에서 포응을 한 일이 있었다.
   그 날 미란은 달맞이 고개에서 달을 보지 않고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때를 썼다.

   " 달은 아무데서나 볼 수 있어."


   " 싫어요 ! 다 같은 달이 아니라고 자기 입으로 말해 놓구서."

   " 그럼 할 수 없지. 달이 뜰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는 수 밖에."

   " 아이  자기만 혼자 누우면 어떡해요."

   그래서 시트를 뒤로 제끼고 팔베개를 하고 누웠던 강희가 몸을 일으켜,

미란이 앉은 조수대 우측에 붙은 레바를 잡으려고 하니

 자연히 그녀의 무릎에 상체를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자 몸을 앞으로 약간 일으켜 봐."

   그러자 너무 앞으로 몸을 이르킨 바람에 미란의 젖가슴이 뭉클 하고 강희의 머리에 와 닿았다.

   " 자 이제 뒤로 기대어 봐."

   " 어머나 !..."

   갑자기 시트가 뒤로 넘어지자

미란은 응급결에 강희의 목을 잡고 늘어지며 뒤로 벌렁 나자빠 졌다.

포응을 하기 위해 고의로 그렇게 유도를 한 것인줄 았았던지

미란은 강희의 목을 잡고 한참 동안 놓아 주지 않았다.

강희도 그러한 그녀가 무안해 할까 봐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키스에 응하고 말았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미란은 그가 자기의 애인이라도 된 것처럼 눈 웃음을 흘리면서

더욱더 다정하게 굴었다.

일을 하다 말고 몰래 차고에까지 내려와서 요구르트도 사주고 껌도 까서 입에 넣어 주기도 했다.
   강희는 그러한 그녀가 과히 싫지는 않았으나 때로는 천하게도 보였다.

그것은 남자 관계가 복잡하고 좀 난하게 놀았다는 소문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었는 지도 몰랐다.
 
   누가 이들의 사랑을 불륜이라 욕하겠는 가.
   강희는 김해 벌판의 어느 수문 옆에 차를 세워두고

사장님과 여비서와의 사랑의 유희를 물끄럼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 갓 여고를 나 온 20대 초반의 윤양은 청조하고 가냘픈 들국화 한 송이를 꺾어

단발 머리에 꽂고 뚝 위를 한없이 달아나고, 그 뒤를 60대의 노장은 자기 머리처럼

허옇게 활짝 피어버린 억새풀을 꺾어 프로펠러 같이 휘휘 내 돌리며 천진난만한 소년처럼

쫓아 달려가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불륜이 가엽고 숭고하게도 보였다.
   사장님은 여전히 사내의 분위를 의식하지 않고 윤양이 하자는 대로 했다.

그의 기분은 윤양의 서비스 여하에 달렸고,

어려운 결재를 받으려 갈 때면 먼저 여비서의 눈치부터 살펴볼 정도가 되었다.

일이 그렇게 되다 보니 윤양의 세도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회사의 기강은 점점 문어져 갔고 사원들 간에 불평도 늘어만 갔다.

그래도 사장님은 애욕의 포로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대외적으로 노랭이라 이름이 나 있는 것과는 달리 윤양에게 만은 아끼는 것이 없었다.
   언젠가 강희가 회사의 차고와 가까운 곳으로 셋방을 얻으려고 모자라는 돈 20만원을

가불 해 달라고 하였다가 꾸중을 들은 일이 있었다.

   " 이 사람아 회사에는 돈을 쌓아 두고 있는 줄 아나.

자네도 알다 싶이 직원들 급료도 제때에 못 주고 있는 형편이 아닌가."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이 회사에서는 급료를 제때에 주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가 보기엔 아마 경영주측에서 무슨 정책적으로 그렇게 하는 지는 몰라도

월급 날이 이삼 일 지나서야 어음을 할인 하느라 은행으로 어디로 쫓아 다니니 말이다.
   일년에 추석과 구정으로 나누어 주는 보너스도 다른 회사에서 지불하고 한참 있을 때까지

결재를 미루어 오다가 타사에서 지불한 그액 보다 조금 칼질을 하여 내어 주었다.
   그렇게 나가는 돈에 대해서는 무조건 인색하는 사장님이 윤양에게만은 자기의 구좌에서

강희의 손으로 찾아 준것만 하더라도 5백만 원과 3백만 원이 두 번이나 있었다.

그러니 도합 천백인 셈이었다.
   기사가 전세방을 옮기는 데 모자라는 돈 20만원을 가불해 달라고 할때는 돈을 쌓아 두고

기업을 하는 줄 아느냐고 핀잔을 주더니,

무려 그 돈의 오십다섯 배나 되는 거금을 여비서에게는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통째로,

그것도 하필이면 기사의 손으로 찾아 주라고 하니

아무리 요술구멍에 녹아 났기로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럴 수가 있을 까 싶었다.
   그런 것을 보면 확실히 있는 사람의 심장은 서민의 그것과 판이하게 다른 모양이었다.

부끄러워해야 할 곳에 오히려 떳떳해지는 것이 그들의 배짱인 듯 했다.
   강희는 요즘 정말 이해할 수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이번 해운의 날에 정부에서 상패와 하사품으로 내린 팔목시계를 사장님이 받아 온 것이다.
   감사패를 읽어 보지 않아서 국가에서 무슨 은혜를 사장님으로 부터 입었는 지는 모르지만

좀 모호한 점이 많았다.

물론 수재민 돕기라든가 불우 이웃돕기 같은데 돈을 조금 내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 여비에게 던져준 돈의 오십 분의 일에도 해당되지 않은,

별로 이렇다 하게 사회에 봉사한 일이 없는 것 같은데 그런 어마어마한 상을 받다니.

강희는 여태 사장님을 잘못 보아 온 것같은 죄책감이 들기도 하여 무엇이 무엇인지

어리둥절 하기만 했다.
   그는 이 번에 그런 상을 받았다는 말은 들었으나 실제 눈으로 보지 않아서 설마했는 데,

어느 날 골프채를 가져 온 캐디가 이차의 사장님이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어마어마한 이름이 새겨진 팔목시계를 보여 주더라는 것이다.


   " 그래, 그럼 사장님에게 직접 물어보지. 어떻게 상을 탔느냐고 ?."
   " 그렇지 않아도 물어 봤어요."
   " 그랬더니 ?."
   " 저도 사회에 좋은 일을 많이 하면 탈수 있다고만 하든데요."
   그러면서 사장님의 인품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캐디로서도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사장님은 사원들의 대우에는 타사의 하위에 돌면서도 모든 일에는 추월을 강요했다. 심지어 그것을 기사에게도 적용 시켰다.
   강희가 해륙실업에 입사를 하고 처음으로 서울로 출장을 갈 때였다.
   그 날은 몹시 비가 왔다. 그래도 그는 법정 속도를 조금 초과하여 고속도로를 달렸다.  그런데 대구를 지나서 잠에서 깨어 난 사장님이 여기가 어디 쯤이냐고 물었다.
   " 뭐라고, 이제 겨우 대구를 지났다고 ? 이 봐. 좀 달리게. 이래서야 원 제시간에 도착하겠는 가 ?."
   " 사장님 이것도 무립니다.  특히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은 노면에 스마크 현상이..."
   " 이 사람아, 나는 스파크인지 스마트인지가 무언지 모르지만 전에 있던 황기사는 레코드를 가지고도 잘만 달렸네."
   강희는 약이 올랐다. 운전기사로서 가장 듣기 거북한 것은 승객으로부터 달릴 줄 모른다는 소리다. 그것은 무능과 직결되는 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기사들은 자기의 기술을 과시하 듯 달리기를 좋아 했고, 어리석게도 그것을 자랑으로 알았다.
   강희는 그렇게 생각을 하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아 악세레타에 지긋이 힘을주었다. 스피트 메타가 백사십으로 올라서자 차 안은 놀라울 정도로 조용해졌다. 엔진 소리가 안으로 들어올 새도 없이 뒤로 빠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차창을 두드리는 비바람 소리만이 그래도 폭풍 전야 같은 정막을 깨뜨려 주어 조금은 긴장을 덜하게 하였다.
   조그마한 커브에도 자동차의 뒷 부분이 씩씩 돌아가는 것 같고, 고인물을 자날 때마다 뿌죠도 별 볼일 없이 휘청거렸다. 어린애 같은 영웅심에서 정작 달리라고 큰 소리를 처 놓은 사장님도 마음이 편치 않았던지 껑 앓는 헛 기침을 몇 번 하였다. 그래도 속력을 낮추지 안차 나중에는 참다 못하여
   " 이 사람아, 자네는 한 마디 들었다고 앙갚음을 할 셈인가. 도대체 지금 몇 키로로 날고 있는 가 ?."
   라고, 나무랐다.
   강희는 요즘 해륙실업을 떠날 때가 왔다는 것을 가끔 느꼈다. 그것은 무엇 보다도 사장님이 사소한 일에도 일일이 거부 반응을 보여 왔기 때문이었다. 별로 야단을 칠 일이 아닌데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공연히 트집을 잡았다.
   오늘 일만 하더라도 그렇다. 운전을 하다 보면 남의 차를 받을 수도 있고 또 받힐수도 있었다. 그래서 고처주고 고치면 그만인데, 이건 얼토당토 않게 무조건 새 것으로 바꿔오지 않았다고 야단이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건 처음부터 시비조로 나왔다.
   " 이 사람아. 차를 다 고쳤으면 고쳤다고 보고를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래. 후렌다를 갈았는 가 ?."
   " 저어..."
   " 우물쭈물 하지 말고 본론부터 얘기 해. 갈았어, 안 갈었어 ?."
    " 신호기 렌즈만 교환하고..."
   " 이 사람이 왜 엉뚱한 소리만 하고 있어. 난 후렌다를 묻고 있어, 후렌다를."
   " 그건 못 갈았는 데요."
   강희는 지난 일요일 아침 아리랑 호텔에 사장님을 내려드리고 사무실로 돌아오던 도중 영주 파출소 옆 버스 정유소에서 갑자기 꺽어 들어오는 버스를 피하여 남의 차선에 뛰어 든 픽업에 부딛혀 가벼운 접촉 사고를 당했다. 상대방의 일방적인 과실이어서 수리 일체를 약속은 받았으나 현금을 구하지 못하여 애원하다 싶이 하는 가해 차량의 단골 서비스 공장을 마다하고 사장님이 지시한 대로 뿌죠의 지정 공장으로 가서 수리를 했다.
   가해 차량은 어느 보세공장의 업무용이었다. 기사의 말로는 군에서 제대를 하여 몇 달째 놀다가 어렵게 그 곳으로 직장을 얻어 온지 겨우 3개월째 되었다고 했다. 그러니 그 회사의 규칙도 잘 모르고체면상 사고의 보상을 요구할 형편이 아니어서 부득히 자기가 수리비를 물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라고 하면서 관대한 처분을 바란다고 했다.
   강희는 다 같은 기사의 입장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 돈이 적게 드는 방향으로 차를 고치려고 하였지만 못 가진자의 사정을 모르시는 사장님은 기어이 조금이라도 상처가 난 곳에는 무조건 새것으로 교환을 해 오라고 했다.
   " 10만 원 밖에 목 구했어요.하지만 아모레 아줌마한테 부탁해 두었으니 나머지도 곧...."
   정비 공장 한 모퉁이에서 걱정스럽게 소근거리는 가해 기사 부부의 대화가 견적을 뽑고 있는 뿌죠 넘어에서 들려왔다.
   " 근데, 여보 무슨 일이에요 ?  사고를 냈어요. 사람은 안 다쳤어요 ?."
   " 아무 일도 아니래도 그러네."
   " 그럼 왜 이런 곳으로 갑자기, 그 많은 돈을...."
   " 제발 조용히 해. 내 나중에 다 말해 줄께. 지금 분명히 당신에게 말해 줄 것은 내가 한 달 늦게 취직을 한 걸로 생각하면 아무른 문제 될 것이 없다는 것 뿐이야. 그러니 그 돈을 이리 주고 얼른 마자 구해 와."
   강희는 슬펐다. 필경 자기의 남편이 무슨 일을 저지른 것만은 분명한 데, 돈이면 아무 일 없이 해결 된다고 하니 우선 남편을 무사하게 하기 위하여 더 이상 물를 겨를도 없이 돈을 구하려고 발길을 돌리는 그녀가 한없이 가여웠다. 그것은 정말 남의 일 같지 않게 가슴에 와 닿았다. 그래서 그는 견적을 내고 있는 정비 주임 앞으로 가서 수리비가 얼마나 들겠느냐고 물었다.
   " 신호기 렌즈와 후렌다를 교환 한다면 대충 25만 원정도..."
   " 아니 그렇게나 많이요 ?."
   " 그것도 열처리 도색을 빼고 그렀습니다. 야끼까지 한다면 아무래도 석 장은 넘어야..."
   " 그러지 말고 좀 싸게 하는 방법은 없습니까 ?."
   " 왜요. 신호기 렌즈는 어차피 갈아야 하지만, 후렌다를 판금해서 쓴다면야 10만 원 미만이지요."
   " 그래도 되겠습니까 ?."
   " 그러믄요. 사실 이 정도 끍힌 것을 가지고 새 것으로 교환해 달라고 하면 가해자측에 너무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강희도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사장님은 차를 순 엉터리로 수리해 왔다고 노발대발이었다.
   " 이 사람아, 그걸 말이라고 하는 가. 어째서 때워 붙인 것이 본래 것과 같단 날인가 ?."
   " 때워 붙인 것이 아닙니다,"
   " 그러면 ?."
   " 판금을..."
   " 이놈아, 판금을 해도 그렇지. 찌그러진 것이 불떼가 가지 않고 펴 진다더냐 ?."
   불 간 자리에 칠이 타 버리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뒷면에도 비치를 단단히 발랐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 사장님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살다보면 실수를 하는 수도 있는데. 조금 끍힌 걸 가지고 무조건 새걸로만.... 그 분의 형편도 딱하고요."
   " 아니 이놈이 점점 한다는 소리가...그래 회사 차야 어떻게 되던 네 얼굴만 내어 보이자는 거야, 뭐야 ?."
   " 죄송합니다. 사장님. 그 분이 근 한나절이나 돈을 구하지 못해서....그리고 무엇 보다도 정비공장 측에서 그 정도면 판금을 해서 써도 별 이상이 없다고 하기에...."
   " 내 여러 말 않겠네. 자네 돈을 들이더라도 새걸로 바꿔 오게."
   이건 완전히 생트집이었다. 어쩌면 사장님은 가해자 측에 기사가 받을 것은 다받아 챙기고 엉터리로 수리를 해 온 줄로 의심을 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요즘 사장님은 확실히 마음이 변해 있었다. 그것은 모두 비서 윤양과의 관계에서 온 히스테리인 것도 같고 노이로제인 것도 같았다.
   윤양은 드디어 많은 파문을 남기고 회사를 떠났다. 그것은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사장님은 윤양이 교복을 입고 실습생으로 입사를 한지 3년이나 지난 오늘 날까지 하루하루를 즐거운 고통 속에서 살았다. 그것은 어쩌면 사장님에게는 즐거움 보다도 괴로움을 더 많이 주었는 지도 모른다.
   사실 윤양은 버릇이 없었다. 생활에 변덕이 심했고 무엇보다도 복잡한 남자 관계가 사장님을 피곤하게 했다. 그래서 사장님은 한때 그녀을 단념하려고 출근도 하지 않고 피해 다닌 일이 있었다. 그 때 윤양은 어린 나이로 대담하게 사장님 댁으로 찾아 가서 안방을 차지하고 들어누운 일이 있었다고 했다.
   사모님은 그제서야 자기의 영감을 주야로 파김치를 만들어 보낸 년이 바로 자기의 전화를 그처럼 사근사근 잘도 받아 주던 비서라는 걸 알고 이를 뿌두득 갈았다.
   " 내 그 불여우 같은 년을 발기발기 찢어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는 다고 하면서 사장님은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정을 했다. 그래서 사장님에게 다려드릴 보약을 지어 가면서
   " 세상에 영감이 그 귀사때기에 피도 안 마른 년한테 얼마나 시달렸던지 학을 뗐단다, 학을....하도 찰거머리 같이 달라 붙어서 엄포를 놓는 통에 질질 끌려 다녔다는 구만 ! "
   그러면서 쯧쯧 혀까지 찼다.
   그런 것을 보면 역시 착하고 어리석은 것은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마나님인 모양이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모님이 지어 주신 보약을 먹고, 사장님은 아직도 여전히 윤양의 치마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사장님은 어떤 의도에서 윤양을 피해 다녔는 지 알수 없었다. 아마도 그때는 불륜의 관계를 정리하려고 한 모양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윤양이 비서실에서 모 백화점의 양품부 주인으로 자리를 바꾼 것 뿐이었다. 물론 자금은 수 년 동안 몸 전체로 충실히 모셔온 비서양의 특별 퇴직금이었다. 그것을 사장님은 길전무를 내세워 대패질을 하게 한 것을 보면 그 당시는 분명히 윤양과 헤어질 결심을 단단히 한 것만은 사실인 듯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불륜의 관계는 오늘 날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남들은 윤양이 회사를 떠났고, 위자로로 양품점을 차렸다는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사장님과의 관계는 끝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장님도 이제 떳떳한 인간이라는 듯 잃어버린 위신과 체면을 찾느라고 어깨에 힘을 주고 다녔지만 강희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사장님도 그것을 의식하고 완벽한 비밀을 지키기 위하여 기사를 내보낼 결심을 하였는 지, 그 구실을 찾기에 급급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전에 없이 사소한 일에도 해고를 연관시켜 꼬투리를 달았다. 그러나 강희는 강희대로 거기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쓰며 인내하고 있는 중이었다.
   " 사장님, 수리한 부분이 그렇게 의심스러우시면 제가 각서라도 쓰겠습니다. 앞으로 그 부분에 이상이 있을 때는 언제든지 저의 부담으로 고쳐 드리기로요."
   " 이 사람이 웬 말이 그리 많아. 바꿔 오라면 바꿔 올 것이지."
   " 사장님 정말 너무하십니다. 저의 회사에서도 사고를 내었을 때 피해 보상을 그런식으로 해준 일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습니까 ? 혹시 제가 가해자한테는 새것으로 교환한 걸로 해서 돈을 받아 챙기고.....?."
   ( 그렇지 않고서야 이처럼 무조건 몰아 붙일 일이 없지 않는가.)
   강희는 요즘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몇 일 전에도 하마트면 목이 달아날 뻔 했다.
   사장님 댁으로 가라는 연락을 받고도 제때에 차를 도착시켜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갈은 12시 반에 받았다. 그는 그때까지 점심을 먹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사장님 댁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차를 쓸지 몰라서 미리 점심을 먹고 가기로 했다.
   사모님은 자동차에 그름을 넣어야 가는 줄은 알아도 기사가 끼니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 하는 줄은 몰랐다. 언제든지 차에 올라 앉아 목적지만 얘기하면 그것으로 그만이었고, 지금까지 늘 당해 온 그로서는 스스로 알아서 챙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날은 그것이 화건이 되었다. 그가 식사를 하고 차고로 돌아오니 비서 김양이 차에 붙어 서서 질질 울고 있었다.
   " 아저씨 큰 일 났어요."
   강희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그를 찾으려 나섰던 몇 명의 사원들이 거기에 몰려 있었다.
   " 도대체 이 기사는 뭤하는 사람이요 ?."
   총무과장이 삿대질이라도 할듯이 대들었다.
   " 과장님은 여태 저의 직책을 몰라서.... ?."
   " 자기 직책을 아는 사람이 일을 그따위로 해요."
   " 그따위라니요 ?."
   " 사장님 댁으로 가라는 연락을 받았소 안 받았소 ?."
   " 받았는 데요."
   " 받고도 .....?."
   사모님의 모친이 사위의 차를 기다리다 서울로 가는 열차를 놓이고 택시를 잡아 타고 비행장으로 갔다고 했다.
   " 얼른 사장님한테 가 보시요."
   강희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수건을 닦으며 사장실을 노크했다.
   " 아니 너는 뭤하는 놈이야 ? 사장인 나를 뭘로 아는 거야."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고래고래 소리를 치면서 당장 열쇠를 두고 나가라고 했다. 온 몸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걸 보면 화가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 총무과장 이 사람 계산할 것 계산해서 당장 내 보내게. 아주 윗 사람을 모시는 태도가 돼 먹지 않았어 !."
   " 사장님,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요. 고의로 사장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 아니라, 점심을 먹고 가느라고 그랬다는 군요."
   총무과장이 사정을 했다.
   강희는 욱하는 성미에 조금 전 총무과장에게 대든 걸 후해 했다.
   " 아니 뭐라고 ? ...열차를 타러가시는 어른을 두고 점심을 먹으려 가 ?."
   " 이 기사는 그걸 몰랐다는 군요. 아무려면 사모님이 역에 나가시는 걸 알고서야 어떻게 식사를 하려 갔겠습니까 사장님."
   " 뭐 ? 그럼 김양을 좀 오라고 해."
   무슨 큰 죄라도 지은 양 오들오들 떨면서 김양이 안으로 들어왔다. 잘 사는 집의 외동 딸인데도 매사에 자신이 없고 겁이 많았다. 차를 나르고, 걸레질을 하지 않아도 시집 갈 재산이 아버지에게 있는 데도 어째서 하루 군것질 값도 되지 않는 급료를 받으면서 그 고생을 하는 지 알 수가 없는 아가씨였다.
   " 너는 어찌된 것이 대학까지 나왔다는 애가 전달 하나 제대로 못하나 ?."
   그도 역시 사장님으로부커 단순히 차를 사장님 댁으로 보내라는 말만 들었지, 누가 몇 시에 역에 나간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래도 그는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오들오들 떨면서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온실에서 행여 볕을 너무 받아 시들까봐  곱게 끼워 나약하게 자란 그가 얼마나 놀랐든지 그 다음 날부터 출근을 하지 않않았다.
   그 무렵 사장님의 셋째 딸이 두 언니를 뒤에 두고 울산 모 기업채에 과장으로 있는 총각과 결혼을 했다.
   신랑되는 사람은 서울 장안에서 조금 산다는 집안의 차남으로서 이 사람 또한 자기 보다 수준이 조금 낮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는 아예 예의 같은 것을 지킬 줄 몰랐다. 이건 기사를 알기로 자기집 하인을 대하듯 했고, 어디다 돈을 쓰야 하는 줄도 몰랐다. 귀공자에 깊이 물들어 있었다.
   결혼 전후로는 유럽으로 신혼 여행을 떠날 때도 비행장까지 사장님의 차를 이용했는데 기사에게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없이 신부를 껴안고 유유히 사라지며 아니곱게도 짐까지 안으로 가져다 달라고 했다.
   추석이 몇일 지난 어느날이었다.
   강희는 사장님 댁에 들어 온 선물을 뒷드렁크와 조수대에까지 가득 싣고 그들의 보급자리인 울산으로 가다가 온천 입구 신호대에서 신호위반으로 교통 경찰관에게 적발된 일이 있었다.
   " 이 양반이 면허증을 제시하라면 했지 무슨 말이 많아. 아무려면 경찰관이 위반하지도 않은 차를 잡고 시비라도 한단 말인가 ?."
   " 그래, 무슨 위반을 했단 말이요 ?."
   " 신호위반도 몰라. 신호위반."
   " 신호 위반이라고요 ? 난 신호도 못 봤는 데."
   사실 그는 버스 뒤에 바짝 붙어갔기 때문에 신호가 바뀐 줄도 몰랐다.
   " 이 양반이 운전기사가 신호등도 안 보고 운전을 해."
   그러니 위반을 할 수 밖에 없지 않으냐고 빽 소리를 질렀다.
   " 죄송합니다.고의로 위반을 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버스에 가려서 신호등이 보여야지요."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자동차는 반드시 신호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것처럼 그것을 조작하는 운전자는 신호등을 보아야 할 의무가 있어."
   " 정말 너무하십니다. 당신의 눈으로 상황을 똑똑히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
   신호를 대기하고 있는 곳에서 그것을 통과하는 교차로의 거리가 먼 신호대에서는 종종 그런 일이 있었고, 그 곳처럼 짧은 곳에서도 어쩌다 차량이 밀린다든지 진행하는 차의 속력이 느릴 때 버스나 콘테이너 같이 적재함이 높은 차의 뒤에 바싹 붙어 가다가는 본의 아니게 신호가 바뀐 줄도 모르고 가는 수가 있었다. 그것을 지성을 겸비 했다는 이 나라 경찰관들은 가로수나 전신주 뒤에 숨어서 노리고 있는 것이다.
   " 이 양반이 되게 말이 많네. 위반을 했으면 스티카를 받아갈 것이고, 억울하면 법을 만든 사람에게 가서 따질 일이지."
   "참으로 한심하십니다. 누가 로보트에 제복을 입혀 놓았는 지."
   " 아니 뭐라고 ? 이게 정말 따끔한 맛을 ...."
   " 예 공무 집행 방해에 공권력 모독죄도 함께 추가해서 끊어 주십시요."
   스티크에 그런 법 조항이 없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강희는 신호위반 딱지만 받았다.
   법을 어겼으면 처벌을 받아 마땅하나 웬일인지 기분이 씁슬했다. 세상이 원망스럽고 울고 싶도록 서글퍼 지기도 했다.
   그런데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격으로 경찰관과 입 시름을 할때는 쥐죽은 듯 입을 다물고 있던 사장님 사위가
   " 아저씨는 그 몇 푼 주고 적당히 하지 않고, 그 사람과 싸워서 이기겠다는 거요 ? 남은 바빠 죽겠는 데 !."
   하고, 핀잔을 주고 짜증을 부렸다.
   ( 모르면 가만히 죽치고나 있어. 땡전 한 잎 빼주지 않은 주제에 무슨 잔소리가 많아. 누구는 사바사바를 할 줄 몰라서그러고 있는 줄 아나. 제미 토큰 몇 개 들은 포켓으로 어떻게 그 친구의 입을 틀어막아 )
   강희는 이중 삼중으로 기분이 언잖았다. 화풀이를 할 곳은 역시 차 밖에 없었다. 그래서 마구 악세레타를 밟았다.
   " 아저씨, 좀 천천히 갈수 없어요 ?."
   아 다르고, 어 다르는 데 이게 또 나오는 말투가 시비조다.
   " 조금 전에 회사에 들어갈 시간이 바쁘다고 하지 않았소 ?."
   "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달리다가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요."
   " 염려 마시요. 아무리 못되어도 딱지 하나 쯤 더 받는 일 뿐일테니까."
   그래서 그는 그의 말대로 팔송공원 입구를 조금 지난 고갯마루에서 경찰 싸이카에 추월로 적발 되었다.
   " 자, 한 장 더 끊어 주시요."
  " 허허 이 친구 화통해서 좋구만 !."
   그러면서 어디 차냐고 물었다.
   " 어디 차나 마나 끊으려거든 얼른 끊어 주시요."
   " 허허 이 사람 성질 하나 되게 급하네 ! 그렇다고 차를 그런식으로 몰아서야 쓰나. 더욱이 사고 다발 지역이라고 푯말까지  붙어 있는  곡각지점에서 말이야. 보아하니 오늘 기사양반이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인데, 그럴 수록 독한 마음을 먹고 차를 얌전히 몰아야지.
   그러면서 스티카를 도로 내밀었다.
   " 그냥 주는 겁니까 ?."
   " 그럼 그 위에다 하나 더 끊어 줄까. 한 달 쯤 푹 쉬게."
   " 아이고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
   2시가 훨씬 넘어거야 공단 안에 있는 사원 아파트에 도착했다.
   그때까지 강희는 점심을 먹지 않고 있었다. 12시가 조금 지나서 그들 부부를 태우려 사장님 댁으로 갔기 때문에 식사를 할 시간이 없었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그들의 결혼식 때도 회사의 승용차 3대가 차출되어 아침부터 오후 3시까지 뛰었지만 기사 3명 모두 점심을 굶었다. 어느 누구 하나 밥을 먹으려 오라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기사들이 손님이 북적대는 집안으로 들어가서 밥을 달라고 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매사에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그러했다. 그들은 권력이나 금력이 자기 보다 나은 자에게는 무엇을 못주어 안달이었고, 없는 자는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한 번은 또 이런 일이 있었다.
   사모님의 고향 친구 한 분이 새집을 지어 이사를 했는 데, 집들이를 한다고 하여 초대를 받아 갔다. 귀빈들은 2층으로 안내되었고, 강희는 밖에서 차에 앉아 있었다.
   점심때가 지났는 데도 누구 하나 안으로 들어와사 밥을 먹으라는 사람이 없었다. 배는 고프고 할 수 없이 길가 분식집에 들어가서 라면을 먹었다.
   한참 후에 나온 사모님은 약방이 있으면 차를 세우라고 했다.
   " 아이고 하도 권하는 바람에 갈비찜이며 온갓 음식을  어떻게나 많이 먹었든지."
   소화제를 먹지 않고는 도저히 못 견디겠노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강희는 갑자기 헛구역질이 났다.
   " 아니 자네도 속이 거북한가 ?."
   사모님은 기사도 그 집에서 음식을 먹은 줄 아는 모양이었다.
   " 네, 하도 많이 먹어서 소화가 잘 안 되는 거 같네요."
   하고, 비꼬아 주었더니, 이번에 또 한다는 소리가 가관이었다.
   " 확실히 우리 이북 사람들이 음식은 푸짐하게 하지. 이남 사람들 보다 ? "
   하고, 고향 인심을 자랑이라도 하듯 물었다. 그래서 강희는 피식 웃으며 배가 부르지도 않는 데, 사모님이 내미는 소화제를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강희는 그래도 종전처럼 무거운 짐을 에레배트가 없는 5층 아파트까지 날랐다.
   점심을 굶은 대다가 무거운 사과상자와 귤 상자를 두 번이나 나르고 나니 다리가 후들거리고 눈 앞이 아물아울 했다.
   " 아저씨 그만 가보세요. 나머지는 우리가...."
   사장님 딸은 핸드백 하나만 들고 올라가더니 아예 내려오지도 않고, 새신랑이 상의를 벗은 채못 마땅한 얼굴을 했다. 제딴에는 게으른 운전사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던 모양이었다.
   " 몇 개만 더...."
   " 괜찮다니까 그러시네요."
   " 그럼, 안녕히..."
   강희는 되돌아 오면서 영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새신랑은 차를 돌려보내 놓고 사장님한테 무어라고 전화를 하였는지 밥을 먹을 사이도 없이 도착 즉시 기사를 불러 드렸다.
   " 아니 자네는 어째서 갈 수록 그 모양인가 ?."
   " 네 ?."
   "손님한테 좀 친절하면 누가 잡아먹기라도 한다더냐 ?."
   " 무슨 말씀입니까, 사장님."
   강희는 은근히 좀 캥기는 것이 있어서 불안한 얼굴로 힐끔 사장님을 쳐다봤다. 뿔태 안경 넘으로 노인답지 않게 눈알이 매서웠다.
   " 어째서 오늘 아이들한테 그런 행패를 부렸는 가 ?."
   " 행패라니요 사장님 ?."
   " 자네가 하도 난폭하게 차를 모는 바람에 우리집 아이는 앓아 누웠다네."
   자네가 감히 그럴 수가 있느냐고 했다. 그것은 사장님을 능멸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노발대발이었다.
   " 사장님 저는 그때까지 점심을 먹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5층 아파트까지 세 번이나 짐은 날랐습니다. 끝까지 마자 올리려고 하였지만 그만 돌아가라고 하기에...그리고 갈때는 교통 순경한테 딱지를 끊기는 통에 기분이 좋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사장님."
   강희는 이제 자가용기사로서 너무나 많은 잘 못을 저질렀다. 그것은 모두 고용주 측의 일방적 생각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를 쫓아 내기 위해 티끌 하나라도 잡지 못하여 혈안이 된 그들에게 그런 허점을 보인 것만은 큰 잘못이었다.
   그는 벌써부터 떠날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갈 곳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더 버텨보아야 얼마 가지 않아서 더 많은 비애와 비참한 몰골이 되어 쫓겨가야 할 신세가 뻔하기 때문에 이 기회에 제 발로 걸어서 떠나기로 결심은 하였으나 당장 실행에 옮길 수 없는 것이 또 그의 실정이기도 했다.
 
   벌금 만 원과 이틀간의 특별교양에다 그것으로도 한이 차지 않았든지 자그마치 10일간의 면허행정이 신호위반이라는 벌칙으로 강희에게 주어졌다.
   그런데 업친데 덥친 격으로 회사에서는 그의 급료에서 5만 원이라는 돈을 연장수당에서 잘라 버렸다. 말하자면 일을 하지 않는 만큼 근무수당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신호위반이 그에게 안겨준 고통은 또 그것만이 아니었다.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굴리는 자가용을 열흘간이나 세워둘 수 없는 형편이어서 회사에서는 임시로 기사 한 분을 데리고 왔다. 마치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 그가 면허정지 처분을 받았다는 보고를 하자마자 달려온 사람은 사장님 가정부의 사촌 오빠가 된다는 사람이었다.
   그는 강희보다 한두 살 위인듯 했다. 첫 인상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할 정도로 간사하게 생겼고, 지나치게 친절했으며 아무에게나 굽신그렸다.
   사장님은 새로온 분에게 임시라든가 현직 기사의 면허행정 기간만이라는 말도 없이 무조건 인수인계를 받으라고만 했다. 그래서 강희는 씁쓸한 얼굴로 자동차 열쇠를 건네 주며 잘 부탁한다고 했다.
   " 인계할 것이 그것 뿐인가 ?."
   " 네 사장님."
   " 이 사람 보게나. 검사증이라든가 스페어 타이야와 공구 같은 것도 있을 게 아닌가 ?."
   " 그건 모두 차에 있는 데요."
   " 그럼 이 사람을 데리고 가서 인계를 시켜야지. 처음 온 사람이 그런 것이 어디 있는 지 어찌 알겠는 가 ?."
   그래서 강희가 새로온 사람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려니까
   " 자네는 잠깐..."
   하고, 새로 온 분은 남게 하고 강희만 먼저 나가게 했다.
   그 날은 할 일 없이 일찍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아내는 웬일이냐는 듯 불안한 얼굴로 남편의 눈치를 살폈다.
   " 왜 그러구 서 있어  ? 별일 아니니까 안심하라고. 아직은 이것두...."
   강희는 손바닥을 펴서 목에 칼질을 하는 시늉을 해 보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직업 치고는 정말 더러운 직업이었다. 어쩌다 좀 일찍 퇴근을 해도 아내의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했고, 밤 늦게 돌아오지 않으면 더욱더 집 사람을 애태우게 하는 것이 이놈의 운전사라는 직업이었다.
   " 영아 정말 미안해 ! 내 어쩌다 당신을..."
   " 자기는 왜 또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전 다만 반가워서..."
   " 아니야. 난 다 알고 있어. 당신이 얼마나 불안과 긴장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강희는 아내에게 일찍 집으로 돌아 온 이유부터 말해야 하는 현실이 서글펐다. 그러나 그는 오늘 날까지 살아오면서 아내에게 자기의 직장 생활에 대해서는 일체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순전히 남편으로서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슬플 때나 괴로울 때도 내색을 하지 않고 언제나 집에 돌아오면 명랑한 얼굴을 했고, 그래야 하는 자신이 때로는 울고 싶도록 외로웠다. 이제는 그런 것을 털어 놓고 이야기를 할수 없는 아내를 가진 것 조차 원망스러웠다.
   " 영아 내 한 가지 물어볼 말이 있는 데, 화 내지 않고 대답해 주겠어 ?."
   오늘 따라 자기의 이름을 부르고 하는 데 소영은 마음이 불안했다.
   " 무슨 말인데요 ?."
   " 무슨 말아든지."
   " 좋아요. 어차피 자기가 알고 싶은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대답해 드리겠어요. 기분이 좋고 나쁜 건 제 사정이니까요."
   " 아니 그렇게 말하면....."
   " 괜찮데두요."
   " 그래. 그럼 내 말하겠는 데, 혹시 내 곁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없어 ?."
   " 떠나다니요 ?."
   " 당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느냐고 ?."
   " 어머나 ! 어쩜 자기가 제게 그런 말씀을...."
   " 아니야, 내 말을 농담으로 듣지 말라구. 나는 요즘 영아의 표정에서 가끔 그런 것을 읽고 있어 !."
   " 점점...."
   소영은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 자기 요즘 이상해 졌어요 !."
   " 이상한 것은 소영 당신이야. 삶의 의욕을 잃은 것 같아. 하기야 오늘이 내일이고, 내일이 오늘이니 그럴만도 하겠지. 난 가끔 이런 생각이 들어."
   " 무슨 생각 ?."
   " 부담감아라고나 할까, 죄의식이라고나 할까."
   " 어머나 ! 누구한테요 ? 설마...."
   " 설마가 아니라고."
   " 왜 그러지요 ? 저도 아닌게 아니라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 누구한테 ?."
   " 누군 누구에요, 자기한테지.'
   " 남의 흉내을 내는 건 인격 문제라고."
   " 농담 아니에요. 지금 가만히 생각하면 제가 너무 성급하게 자기의 품에 뛰어든 것 같아요. 그래서 무거운 짐 때문에 자기의 어깨는 좀처럼 펴지지 않나 봐요."
   " 그래, 그럼 우린 다 같이 피해자인 셈이로군 !."
   그 말에 소영은 돌아 앉으며 기어이 흑 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전 자기가 나를 가해자라고까지 생각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 아니야, 그건 절대로...소영이 그런 생각이 든다고 하니 그래 본 것 뿐이야. 가해자는 나라고. 아닌게 아니라 난 요즘 당신을 대하기가 민망하다고."
   "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 남편이 아내를 대하기가 민망하다니요."
   " 우린 반 십 년이란 세월을 함께 살아 왔어. 처음에는 꿈도 많았고, 모든 것이 열심히 하면 다 이루어질 줄 믿었지. 그러나 현실은 늘 실망만 안겨 주었을 뿐 좀 더 나은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했어. 더욱이 문제는 그런 것이 앞으로 쉽게 올 것 같지가 않다는 거야. 지나 온 경험으로 봐서 말이야."
   이건 봉급이랍시고 말라 붙은 빈대 같은 봉투를  통째로 가져다 준들 옛날 그녀가 자기의 부모에게 타다 쓴 용돈 보다 적으니 반가울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그런대로 아이들의 동두깨비 살림처럼 재미도 있었겠지. 그러나 오늘도 내일이고 내일도 오늘이니 지겹고 짜증스럽지 않을 수 없으리라 . 강희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러니 그의 마음이 편할리 없었다.
   날이 가면 갈 수록 아내를 대하기가 민망스럽고 초조해지기까지 했다. 차라리 아내가 가난한 집안의 딸이였더라면 지금쯤 얼마나 아기자기한 행복을 느끼고 있을 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얼마되지 않은 급료라도 절약을 한다면 그런대로 조금은 저축을 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쌓이고 또 새끼를 치면 아담한 집도 작만할 수 있을 것이다. 조그마한 뜰이지만 한 쪽 구석에 단감 나무를 심고, 맞은 편엔 그 감이 익기 전에 따 먹을 수 있는 배 나무를 심고 또 이슬이 올 때까지 열매가 붙어 있어 주는 모과 나무도 한 그루 쯤 심으리라. 처음부터 과일이 여는 나무는 값이 바싸니 싸고 조그마한 묘목을 심어 정성껏 키우리라. 그러다가 개인택시 추첨에 당첨이라도 된다면 일약 차주겸 운전사가 될 것이고, 그러면 고아출신인 자기로서는 아닌게 아니라 부자가 눈 위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엉뚱하게도 감히 처다볼 수도 없었던 장군의 딸을 아내로 떠맞게 되었으니, 개인택시가 아니라 법인 택시회사 사장이라도 그녀에게 만족을 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너의 인생에 오점을 남겨 주었지만 더 큰 후회를 남겨주고 싶지 않아서 그래.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너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내가 될때까지. 소영이 그 동안 행복을 찾으면 다행이고 . 그래서 나 다시 만나자는 전제 조건은 걸지 않겠어."
   " 제발 제발....."
소영은 강희의 입을 틀어 막으려던 이불을 덮어 쓰고 소리 내어 울었다.
 
   일년 내내 쉬는 날 없이 계속 일을 하였을 때는 단 하루라도 놀아 보았으면 원이 없겠다고 까지 생각했는 데. 막상 정부에서 주는 휴가를 열흘간이나 강제로 받고 보니 즐거움은 찾을 길이 없고, 오히려 정신적인 고통이 밀려와 그를 괴롭혔다. 무엇 보다도 그동안 자신의 위치가 허공에 뜨 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초조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삼 일째 되던 날 덕포동에 있는 시경 면허계에 가서 특별 교양을 곱빼기로 받고 나서 회사에다 전화를 걸었다.
   마침 미란이 전화를 받고 할 이야기가 있으니 퇴근 후에 좀 만나 달라고 했다.
   " 실은 우리 일이 아니고요. 아저씨에 대한 얘기에요."
   그러면서 미란은 전화를 귾어 버렸다.
   강희는 마무래도 미란의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오늘도 그녀의 작전에 말려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필경 회사 내에서 자기의 신상에 대하여 무슨 변화가 일어 나고 있는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6시 10분이라면 아직도 한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버스를 타고 약속 장소로 나가는 데는 거의 30분이나 걸릴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그녀를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30분 정도 밖에 안 되는 셈이었다. 그래도 그는 남자가 먼저 나가 여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쑥스러울 것 같아서 남포동에서 내려 광복동으로 들어갔다.
   서점을 몇 군데 들러서 바람다방에 가니 약속 시간이 10분이나 지났는 데도 미란은 와 있지 않았다. 그녀는 요즘 점점 소문대로의 여인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 한동안 강희에게 미처 날뛰였을 때는 사나이의 환심을 사려고 그의 온 영육을 다 바쳐 애정을 쏟았다. 언제나 약속 시간 몇 분 전에 와서 강희가 좋아하는 음식이라든지 다방에서는 꼭곡 커피를 시켜 놓고 기다렸고, 혹시 계획한 대로 일이 끝나지 않아서 약속 시간을 넘기더라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기다려 주었다. 그래서 그를 만나지 않고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은 어찌된 일인지 약속 시간을 이삼십 분 어기는 것은 보통이었고, 심지어는 저편에서 철석 같이 해 놓은 약속도 아랑곳 하지 않고 바람까지 맞추기가 일수였다.
   담배를 다섯 개비나 피울 때까지 미란은 나타나지 않았다.
   강희는 불꽤한 얼굴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 값을 지불하고 막 다방 문을 열고 나서려는데 미란이 앞을 가로 막으며 숨을 할닥거렸다.
   " 지금 몇 시야 ?."
   " 죄송해요. 오다 아는 사람을 만나서..."
   " 아는 사람 누구 ?.....아니 아니, 할 말이 뭐야 ? 회사에 무슨 일이 있어 ?."
   강희는 속에서 끌어 오르는 질투 비슷한 분노를 심키며 말을 바꾸었다. 그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는 어쩌다가 자신이 그와 함께 애욕의 늪에 빠지게 되었는 지 후회를 하면서도 여전히 그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처음에는 미란을 좋게 보지는 않았다.그래서 그의 유흑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고 기어이 그녀의 술수에 무릎을 꿀고 말았다.
   시초야 어떻게 됐던 그를 가까이 하다보니 정 같은 것도 들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지 모르겠으나 안 보면 보고 싶고 보면 헤어지기도 싫었다. 남들이 그 녀에게 찝적대면 질투심도 났다. 그는 요즘 사랑은 오직 하나라는 말이 어디서 흘러나온 말인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내도 사랑하고 귀여운 미란도 같이 있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미란은 종전처럼 그렇게  애정을 적극적으로 쏟아주지 않았다. 그것이 늘 불만이었다.
   " 그래, 나에게 할 말이란 뭐지 ?."
   " 아이 길거리에서 자꾸 이러기예요 ?."
   " 우리 간단히 끝내자고, 너도 바쁜 몸일테니까 !."
   " 정말 자꾸 비꼬기만 하시기예요."
   다시 다방으로 들어가려는 강희를 가로 막고 미란은
   " 나 배고파요. 막 뛰어 오느라고."
   하면서 물만두를 먹으려 가자고 했다.
   " 아저씨 어쩌지요 ?."
   간장 접시에 식초를 붓고 고추가루를 뿌리면서 미란은 걱겅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 저 있잖아요. 새로온 기사한테 이럭서를 받으래요. 사장님이."
   강희는 묵묵히 입안에 만두만 집어 넣고 있었다.
   " 듣고 있어요 ?."
   " 그래, 계속해 봐."
   " 이상하잖아요. 차 한 대에 기사를 둘이나 쓸리는 없고."
   "......."
   " 아이 뭐라고 말이나 좀 해 봐요."
   " 만두나 먹어."
   미란도 걱정이 되는 지 만두를 두어 개 먹더니 젖가락을 놓았다..
   " 그럼 아저씨는 어떻게 되는 거죠 ?."
   " 산 입에 거미줄 칠라고."
   " 그럼 우리는 요 ?."
   " 산 넘어 산이 없을라고."
   " 싫어요. 전 아저씨 곁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시집 갈 때까지오."
   그 날 처음으로 강희는 그들이 종종 저녁을 먹고 누가 말을 하지 않아도 의례히 찾아 갔던 은밀한 곳으로 가자는 미란을 기어이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아침에 나올 때 분명히 형광등 스위치를 내린 것 같은 데 아파트 창가에 훤히 불빛이 비쳐오고 있엇다.
   만길은 혹시 다른 동으로 잘못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고 한 번 더 위를 쳐다 보았으나 7동이 분명했고 불이 켜진 곳도 역시 5층이었다.
   그는 개인택시 9459 포니를 경비실 옆에 세워두고 수입금 가방을 챙긴후 뒷 드링크를 열어서 안을 들어다 보았다. 별 할 일도 없이 늘 습관처럼 그렇게 해오고 있었다. 언젠가 회사 택시를 운전했을 때 사돈 집으로 보내는 손님의 상떡을 담은 광주리를 잊어 버리고 내려 주지 않았다가 이튿날 스페어 타이야를 거내다 발견하고 뒤늦게 실어다 주고 부터 그런 버릇이 생겼는 지도 몰랐다. 그때 시골에서 내려온 그 손님이 짐을 잃고 얼마나 당황하고 난처했을 까 생각하면 지금도 낯이 화끈거렸다.
   " 총각사장, 뭘 그렇게 멍청히 들어다 보고 서 있노 ?."
   경비실 아저씨가 어깨를 툭 치면서 동생이 오래전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올라 가보라고 했다.
   " 동생이라고요 ? 허 참 ! 아저씨도."
   천애고아인 자기에게 동생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와 하등의 관계가 없는 일이라 일축하고 차를 한 바퀴 둘러보며 이상 유무를 점검했다.
   " 얼른 올라 가보래도 그러네."
   " 농담 마십시요, 아저씨. 그런 말씀은 농담이라도 가슴 아픕니다."
   " 그럼 내가 실수를 했나 ! 외사촌 동생이라고 하길래 비상 열쇠를 내어 주었는 데..."
   " 정말 입니까 ? 아저씨."
   " 허 뭐라고 하던데."
   " 네, 허요 ?."
   만길은 후다닥 경비 아저씨를 밀치고 아파트 계단을 뛰어 올라 갔다.
   18평 서민 아파트라 엘레베이트는 없었다. 그것은 개인택시 추첨에 당첨되어 차를 굴린지 6개월 만에 차의 할부금을 넣고 남은 돈을 모아 선금을 치러고 나머지 4백만 원은 주택은행의 융자를 안고 구입한 것이었다.
   만길은 주인답게 노크도 없이 도어를 열었다. 그때 주방에서 찌개를 끓이고 있던 순영이 인기척에 뛰어나오다 안으로 들어 오는 만길과 탁 마주쳤다.
   " 어머나 ! 오...."
   뒷말은 만길의 가슴에 눌려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입술을 마주한 포응은 아니었어도 순영은 만길의 품 안이 한없이 아늑하고 포근함을 느꼈다.
   둘은 한 동안 그렇게 붙어 있었다. 만길의 수입금 주머니가 옆으로 기울어져 동전이 뒹굴어도 그들은 모르고 있었고, 주방에서 찌개를 끓며 간을 보던 숫가락이 딩구는 동전 위에 떨어저도 그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 아이 답답해 !."
   그러면서 순영이 만길의 가슴에 파묻인 얼굴를 뽑아 사나이를 빤히 쳐다 보아도 바보 같은 남자는 터질 듯이 빨간 여인의 입술에 자기의 입을 가져다 줄줄 몰랐다. 그래서 애가 타서 발가락 끝까지 발 돋음을 하였으나 순영은 기어이 자기의 입술을 사나이의 그것에 까지 가져가지 못했다.
   " 아이 오빤 왜 이렇게 키가 크세요 ?."
   " 남자니까."
   " 오빤 너무 크서 싫어요 !."
   " 언젠가는 키 큰 남자가 좋다고 하고서."
   만길의 눈에서도 이글이글 불똥이 떨어지고 있었다.
   " 이럴땐 나 하고 같았으면 좋겠다."
   " 왜 ?."
   " 마주 보게요. 쳐다 볼려니까 고개가 아파요."
   " 그럼 내가 고개를 좀 꾸부려 줄까 ?."
   " 그러지 말고 절 안아서 들어 주실래요 ? 꾸부림 오빠 고개가 아프잖아요."
   " 고개 보다 팔이 더 아풀걸 ! 네 히프도 보통 큰게 아니니까 말이야."
   " 아이 오빠도 싱겁긴 !."
   " 사실이잖아 . 꾀 중량이 나가겠던데 그래."
   " 아이 몰라요 !."
   그러면서 낯을 붉이자, 만길은 순영의 허리에 두 팔로 깍지를 끼고 번쩍 들어 올렸다. 그래서 가까워진 두 개의 입술이 더 가가워져 막 붙으려고 하는 데 어디서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둘은 후다닥 포응을 풀었다.
   순영은 어리둥절한 만길을 세워두고, 벨이 울리는 큰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오면서 옷 매무세를 고쳤다.
   "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
   " 시계예요."
   " 뭐, 시계 ? 내 방엔 그런거 없는 데...."
   " 제가 오빠 드릴려고 사 왔어요. 입주 기념으로요."
   " 입주 기념 한 번 빨라서 좋구만 ! 근데 학생이 무슨 돈이 있다고 그런 걸 사와. 그냥 오지 않고."
   " 비싼 거 아니에요. 오빠 늦잠자지 않고 돈 많이 벌라고, 시간만 맞춰 놓으면 벨이 울려주는 탁상 시계예요."
   " 그럼 지금 당장 차를 몰고 돈을 벌러 나가라는 거야 ?."
   " 아니에요. 그건 제가 하도 오빠가 안 오시길래 10시까지 안 오면 돌아 가려고 맞추어 둔 거예요."
   그것을  벌써 몇 번이나 그렇게 다시 돌려 놓은 지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벨이 울리면 한 시간이나 30 씩 연장을 하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 되었노라고 했다.  
   " 그런 줄 알았으면 내 진작 올 걸 그랬지. 그렇지 않아도 오늘은 자꾸 집에 돌아가고 싶더라니 까."
   " 근데 왜 제게는 연락은 주시지 않고 몰래 이사를 하셨나요 ?. 전에 있던 집에 몇 번이나 찾아 갔는 데...."
   연줄 연줄하여 여기까지 찾아 오는 데 애를 먹었다고 했다.
   " 미안해 ! 그런 일이 좀 있었어."
   이날 밤 순영은 11시가 훨씬 넘어도 집으로 돌아 갈 생각은 하지않고 시키지도 않은 방안 정돈에만 열을 올리고 있었다.
   " 영아."
   " 이제 그만 집에 가야지."
   " 네."
   그런 말이 수 없이 오고 갔으나 순영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벌써부터 닦고 있던 커피잔을 계속 만지작거리고만 있었다.
   만길은 할 수 없이 잔을 받아 윗목으로 밀어 놓으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이러다 정말 통금을 넘기겠어. 내 집에까지 태워다 줄께 나가자고."
   그래도 순영은 다소곳이 숙인 고개를 두어 번 끄떡였을 뿐이었다.
   " 영아 난 말이다. 네 마음을 다 알고 있어 ! 하지만 난 아무도 사랑을 하지 않을 거야, 결혼을 전제로는. 그래서 난 기어이 돌려 보내려는 거야. 차마 네게만은 상처를 남겨주고 싶지 않아서지. 그러기엔 넌 너무나 아까워 ! 그러니 제발 돌아가 줘. 내 앞에서 얼쩡거리지 말란 말이야."
   강희의 음성은 다소 격해 있었다.
   " 아이 오빠, 이제 세상을 좀 똑 바로 보세요. 물론 고아가 되면서부터 오빠의 가슴에 맺히게 된 한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하는 여자의 부정 때문에 일생동안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건 정말 병이에요, 병."
   " 뭐, 병이라고 ?.'
   " 그렇지 않고요."
   " 그래. 어쩌면 병인지도 모르지."
   " 그럼 그 병을 제가 고쳐드리면 안 될까요 ?."
   " 네가 무슨 제주로 ?."
   " 간호사로만 써주신다면 책임지고 고쳐드릴께요, 오빠."
   " 아서라 아서. 너도 지금은 소녀다운 감정에 젖어 쉽게 그런 말을 하지. 그것은 누구나가 다 마찬가지란다. 물론 그때는 순수한 마음으로지. 그러나 그 마음은 잠시 뿐 금방 고통스러운 현실에 실증을 느끼고 만단다. 동 떨어진 환경속에서 자기를 적용시키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거든. 거기서 실망이 오고 비애가 오고, 그러다 좀 더 나은 곳을 향해 철새처럼 가볍게 떠날 수 있는 것이 현대 여성이 아니겠느냐, 그래서 나는 광산 사고로 척추 마비가 된 아버지를 버린 나의 어머니를 지금은 원망하지 않는 단다. 물론 개중에는 계약된 양심을 버리지 못해 차마 떠나지 못하는 삶도 있겠지. 하지만 내 어이 날아가고 싶어하는 파랑새를 새장 속에 가두어 두고 보고만 있겠는 가.  좋은 모이로 그럴 즐겁게 해 주지 못하는 주인의 고통 같은 것을 너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느냐 ?."
   만길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순영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 영아 좋은 차를 타던 사람은 절대로 나쁜 차를 타지 못하는 법이란다. 목적지에 도착하기는 마찬가진데, 그는 항상 차주로 하여금 멋진 차를 그리워하게 하고 불만과 불평을 낳게 하거든."
   " 그럼 오빤 가난한 사람이 나타나면 태우겠다는 말씀이세요 ?."
   " 얼마나 더 말을 해야 알아 듣겠니. 난 그런 변덕스러운 인간을 아예 태우지 않겠다는 거야. 그러니 너두 이 소형 고물차 주위를 맴돌지 말고 일찌 감치 속차리고 넓은 도로에 나가 보란 말이야. 지금은 다리가 좀 아프고 외롭고 쓸쓸하더라도 참고 견디 노라면 언젠가 너에게도 너를 가두어 둘 훌륭한 사람이 나타날 거야. 사실 말이지만 나야 별 볼일 없는 사람이 아닌가. 알파벳도 제대로 모르는 고아가 어찌 대학 출신의 부잣집 외동딸과 일생을 같이 하겠느냐. 너야 말로 비오는 날 고급 승용차를 마다하고 다 떨어진 리어카를 타겠다는 격이 아닌가.  좀 더 현관에 서서 기다리면 될 것을 말이다."
   그래도 순영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만길의 끄는 뚜껑 없는 리어커를 타겠노라고 고집했다.
   " 영아 제발 그러지 말고 내 말을 잘 들어. 내 고아원  친구 중에 이런 사람이 있어. 그도 태어날 때는 자가용을 갖고 있는 부잣집이었지.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자 가문이 기울기 시작했어. 끝내 빔털틀이 고아가 되고 말았지. 그래서 한때는 나와 같이 깡통을 차고 거리의 천사가 되었고, 종이를 줍는 양아치에 수없이 고아원을 전전하다가 그놈은 그래도 고등학교는 졸업을 했단다. 그런데 학창시절 길거리에서 우연히  고아가 되기 전에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던 짝지를 만났데. 여고 뺏지를 달고 있는 장군의 딸이었단다. 둘은 사랑을 하게 되었지. 그러나 내 친구는 그 여학생의 장래를 생각해서 나중에는 몸을 피했다는 구나. 그럴 때마다 그 여학생은 식음을 전폐하다 싶이 오직 그를 찾아 헤매었데. 그래서 그 친구는 할 수 없이 머지 않아 떠날, 외국선교사가 주선해 준 외국 유학도 포기하고 군에 입대하고 말았어. 그런데 공교롭게도 자기의 부대장이 그 여학생의 아버지였어. 둘의 사랑은 다시 불 붙기 시작했지. 그래서 그 아버지가 그놈을 최 전방으로 전출을 보내 버렸어. 그런데 제대를 하던 날 부산행 열차에 그 여학생이 먼저 타고 있더란다. 둘은 무일푼으로 동거 생활을 시작했어."
   순영은 두 눈으로 눈물을 주루룩 흘리며
   " 그래서 어떻게 되셨나요 ? 두 분의 처지가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불행 해 졌나요 ?."
   " 처음에는 행복했었지. 그러나 날이 가면 갈 수록 사랑에도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어. 그래서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돈을 버는 데만 열중을 했지. 그러나 아무리 악을 쓰고 일을 해도 아내에게 만족을 줄만한 돈이 벌어지지 않았어."
   " 그것이 그분을 괴롭혔나요 ?"
   " 하루 밥 한 끼를 먹지 못하는 처지가 아닌데도 그는 늘 그런 죄의식에 젖어 있었어."
   " 그럼 그분의 아내도 가난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던가요 ?."
   만길은 그 말에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볼 때마다 항상 미소를 잃지 않았고, 그러다가도 때로는 그녀의 얼굴을 스쳐가는 우수는 찾아 갈 수 없는 부모님이 그리워서인지, 그로서는 분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 그 분이 아내는 절대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꺼에요. 남자들은 어쩜 자기 주장대로만 생각하는 지 몰라 ! 그 분도 역시 오빠와 비슷한 환자인가 봐 !."
   " 환자라니 ? 너 생사람 잡는 소리 작작하고 얼른 일어나기나 해. 30분 밖에 남지 않았어, 통금이."
   " 통금이 안 방에 있는 사람도 잡아 가나요 ?."
   "그럼 넌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거야 ?."
   " 오빠 확답을 받기 전에는 요."
   " 확답이라니 ?."
   " 간호사 말이에요."
   " 너 정말 내게 올가미를 세워서 진짜 환자를 만들겠다는거니 ? 제발 나를 이대로 있게 해 줘."
   순영을 강제로 자기의 집 앞까지 태워다 주고 돌아와서 만길은 한참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의 신변에 무슨 변화가 일어난 것만은 분명한 것 같은 데, 순영은 끝내 그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차 속에서도 그는 울고 있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느닷없이 사랑을 고백하고 기어이 그것을 확인해 보고 싶은 의도가 무엇이었는 지, 만길은 너무나 욱박질러 이야기를 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를 태워 보낸 것이 지금은 후회스러웠다.
   차가 떠날 때 옆차창에 반사되어 비친 그녀의 원망스러하던 모습이 마음에 걸려 , 그 환상을 지워버리려고 돌아 누워도 더 많은 얼굴이 겹쳐와서 그를 괴롭혔다.
   " 순영아 나를 무정한 사람이라고 원망하지는 말아다오. 이 모두가 다 너를 위해서란다. 너를."
   만길은 몽유병자처럼 눈을 감고 혼자 중얼거리면서 잠을 청하고 또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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