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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부여헌(扶餘軒) (11)

오늘의 쉼터 2014. 8. 25. 15:52

제16장 부여헌(扶餘軒) (11)

 

 

 “지금 까마귀 떼가 나타나는 곳이 그때 죽은 춘남의 마을 근처요,

그로 인해 종작없는 자들이 말하기를 당시 춘남이 낸 점괘는 위덕왕비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

황송하옵게도 지금의 왕후마마를 일컫는 예언인데, 춘남이 미리 앞질러 말한 것이라 하옵니다.”

왕변나는 말을 하고도 거듭 면구한지,

“이는 만고에 근거도 없는 허튼소리일 뿐더러 어디까지나 오방 잡처의 마소같이

천한 무지렁이들이 멋대로 지어낸 풍설이라 어전에서 거론할 일이 아니오나

민심이 흉흉한 사단을 밝히자니 어쩔 수 없이 입에 담았습니다.

신도 주둥아리를 스스로 쥐어뜯고 싶은 심정입니다.”

허리를 굽혀 복주하였다.

그 말에 따르면 선화 왕비가 음양의 도를 역행한다는 소리요,

이는 장왕 부처의 은밀한 잠자리를 거론하는 말이었다.

장왕도 여기에 이르러서는 잠시 안색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이때까지 장왕 부처의 돈독한 금실은 나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자별했다.

장왕이 보위에 오른 후 전조의 관례와 왕권의 강화를 위해 따로 궁녀를 거느리긴 했으나

후궁의 거소를 찾는 날은 어쩌다 한 번이요,

주로 등잡이를 앞세워 찾아가는 곳은 선화가 있는 내전이었다.

선화가 의자 이후로도 공주 보(扶餘寶)와 왕자 경(扶餘輕)을 차례로 두고

나이가 어언 마흔을 넘어섰지만 아직도 나라를 통틀어 선화만한 미색이 없고,

두 사람이 왕과 왕비로 만난 것이 아니라 일생에서 가장 어렵고 고단할 적에 시중의 객방에서

정분을 맺은 터라 그 은근하고 깊은 속정이 다른 사람들로선 가히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더욱이 장왕 부처가 만나는 궁중의 내전에서는 신라도 없고 백제도 없고 하물며

지엄한 왕과 왕비도 없었다.

 애오라지 천생배필의 두 가시버시만 있어 날마다 뜨거운 열락의 밤을 보내는데,

내밀한 이불 속 공사를 다 말하기는 어려우나 내외간에 뜻과 합이 똑 맞아떨어져서

어떤 날은 지아비가 밤새 지어미를 말처럼 타고 놀기도 하지만 그 반대로 지새는 날도 허다하고,

옆으로 부둥켜안고 열두 가지 자세로 교접하는 날도 있고,

내외가 머리를 동서로 엇갈리게 둔 채 물고 빠는 것이 단 하루도 같은 날이 없었다.

하나 왕이든 소든 부부간 잠자리 사정이야 당자들밖에는 모르는 것이요,

항차 두 사람은 스스로 유별난 것을 알고 해만 지면 지밀나인들을 모두 내전 바깥으로

멀찍이 내쫓아서 혹시라도 조명이 나돌 것을 각별히 경계해왔는데 이제 무지렁이 백성들까지

지존 내외의 잠자리 사정을 입에 담는다고 하니 장왕으로선 일견 무참한 기분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도 신하들을 구슬러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보니 왕비의 음기가 강해 왕의 양기를 괴손한다는

말도 나오고, 신라 왕실의 기운이 백제의 사직을 눌러 멸망의 징후로 흉조 떼가 날아든다는

소리도 나왔다.

실로 황당무계한 미신이요 잡소문들이었으나, 그렇다고 마냥 웃어넘길 일만도 아니었다.

특히 장왕이 께름칙하게 여긴 것은 그런 풍설을 의도적으로 퍼뜨린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아직도 나라의 일부 토호 세력 가운데는 자신을 믿지 못하거나, 한걸음 더 나아가

신라 왕실과 자신의 특수한 관계를 의심해 호시탐탐 이를 확인하고 음해하려는 자들이 있는 듯했고,

그런 무리들이 신라와 겉으로 화친하여 지내는 것을 트집잡고 불만하려고 들면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오랜 세월 동안 수세(守勢)에만 몰렸던 백제 사람들이 진정으로 바라고 원하는 것은

동성대왕이나 무령대왕과 같은 강력한 군주임을 장왕이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소문의 진원을 적간해 처벌하기보다는 도리어 이를 통해 자신의 왕권을 더욱 견고히 만들고자

꾀했다.

소문은 소문으로 다스리겠다는 것이 그의 뜻이었다.

하물며 그는 무쌍한 천지만물의 조화와 자연의 변화를 정사에 적절히 이용할 줄 아는 탁월한 인물이었다.

왕은 며칠 뒤에 중신들을 이끌고 친히 성주산으로 행차했다.

과연 성주산에 이르자 수백 마리의 까마귀 떼가 산자락을 새카맣게 뒤덮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왕이 돌연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국운의 융성함을 알리는 보기 드문 길조로다!”

왕의 돌연한 말에 신하들은 한결같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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