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1부 黑龍의 트림-대결 4회

오늘의 쉼터 2014. 8. 24. 15:42

제1부 黑龍의 트림-대결 4

 

 

그까짓 학생놈들,

주먹으로 하면 열이고 스물이고 한꺼번에 쓸어버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배우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넓은 어깨가 저절로 좁아드는 느낌이었다.

그는 자기가 갖고 있지 못한 것을 갖고 있는 학생들을 시기하면서도 또한 존경했다.

“제기랄…… 이놈의 김두한이 배우지를 못해서……. 이놈의 김두한이 배우지를 못해서…….”

분해서 혼자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치를 떠는 때도 있었다.

그럴 때 그의 얼굴 표정은 너무 험악해서 귀기마저 어렸다.

뒤늦게나마 배우고도 싶었다.

그러나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

그것은 굴뚝 속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더 캄캄한 일이었다.

우미관 매점원이 된 지 1년쯤 되는 어느 날이었다.

일이 끝나면 가끔 들르게 되는 밀림 다방으로 나갔다.

YMCA 옆 장안 빌딩 2층에 있었다.

정진영이란 녀석이 무엇인가 두툼한 책을 읽고 있었다.

정진영은 땅꾼으로 수표동 다리 밑에서 뱀탕 장사를 하고 있었다.

김두한과는 어렸을 때부터의 지인(知人)이었다.

땅꾼인 주제에 책을 읽고 있다니,

그건 김두한으로서는 어림없는 경이(驚異) 그것이었다.

“야 임마! 이게 뭐야?”

그는 열심히 읽고 있는 정진영의 책을 뺏어 들었다.

그리고 책이란 것을 처음 구경하는 것처럼 들추면서 두리번거렸다.

 〈타잔〉 영화의 밀림 속 토인이 소리나는 괴물인 트랜지스터라디오를

두리번거리며 들여다보듯이…….

“소설책이야.”

“소설책? 어쭈, 네가 소설을 다 읽는단 말야?”

“응, 얼마나 재미있는데!”

“뭔데?”

“방인근(方仁根)의 《무쇠탈》!”

“좋았어! 너만 재미 보지 말구 나도 재미 좀 보자. 큰소리로 읽어봐. 처음부터!”

정진영은 김두한의 말을 거역할 처지에 있지 않았다.

그는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 읽어주었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김두한은 그다지 감을 것이 많지 않은 가느다란 눈을 지그시 감고 경청했다.

실히 두 시간은 더 걸렸을 것이다.

도중 정진영이 입이 마르다고 하면 커피며 홍차 몇 잔씩을 사 먹여가며 들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 읽고 난 다음, 김두한이 이를 되풀이해서 외는 것이었다.

목소리의 볼륨은 달랐으나, 그는 녹음이라도 해놓은 것처럼

한 줄도 빼놓지 않고 줄줄 외는 것이었다.

마치 우미관의 무성 영화 변사(辯士)처럼.

 

정진영이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놀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도 오랜 시간의 독서회(讀書會)가 된 셈이어서 모여 있던 같은 패거리들이며

종업원들도 김두한의 암기·기억력에 혀를 내휘두르는 것이었다.

후일, 바로 그 《무쇠탈》의 작가 방인근과 김두한이 자리를 함께하게 된 일이 있었다.

8·15 광복 후, 10년도 넘은 훗날의 일이었다.

김두한의 기세가 등등한 시절이었다.

그는 방인근을 정중하게 모신 것이다.

방인근이라고 하면 대중 작가이지만 일제 시대에는 명성이 자자했고,

월간 문예지 《조선문단》을 간행하는 등 이 나라 문예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충남 예산 출신의 대지주의 아들로, 서울의 대요정을 안방 드나들듯 하는 명사이자

대단한 한량이었다.

그러나 광복 후의 그의 신세는 고단한 편이었다.

하지만 김두한은 방인근을 깍듯이 모셔 예의를 다했다.

자기 생애 최초로 읽어본(?) 소설의 작가 선생님에 대한 예우였다.

이 자리에서 김두한은 그때 듣고 왼 《무쇠탈》을 줄줄 외어 보였던 것이다.

방인근이 놀랄 정도가 아니었다.

자기 자신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는 줄거리와 문장의 한 줄 한 줄을

이토록 소상하게 외고 있다니…….

“허어! 자네가 그때 그런 줄 알았더라면,

망나니 취급을 하지 말고 뒤를 돌봐줬을 것을…….”

어찌 됐든 《무쇠탈》을 줄줄이 외어 그 실력을 과시해 보인 이후 김두한은

주먹뿐만 아니라 머리도 ‘상당히’ 좋다는 정평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머리 쪽보다는 역시 주먹의 실력이 월등했다.

원래 싸움을 배운 일이 없으며 타고났다고 했지만,

기실 악동 시절인 소년 때부터 파고다 공원 일대의 골목대장이었다.

싸움을 밥보다 더 좋아했다.

그의 말 그대로 완력은 타고난 것이었지만,

그 육중한 몸으로 어찌나 날렵한지

 파고다 공원의 담쯤은 왼손 하나만 짚고도 훌쩍 뛰어넘을 수 있었다.

한 끼의 밥을 먹으면 먹은 만큼 뼈가 굵어지고 근육이 붙는지,

 열여섯에 완전한 성인이 되었고, 그것도 완전무결한 ‘대장부’가 되었다.

우미관 매점원으로 정착한 지 1년이 되기 전에 그는 관철동 뒷골목의 작은 거인이 되어 있었다.

그에게서 마찌마와리의 대가(代價)인 극장표를 뺏으려고 찌드럭거리다가 치도곤을 맞은

우미관 일대의 똘마니들은 고스란히 그의 그늘 아래로 들어왔다.

이제 그는 우미관 골목 일대에서 무시 못 할 존재로 부상했지만,

다른 망나니패 아이들처럼 선량한 학생들을 괴롭히지는 않았다.

자기가 갖고 있지 못한 배움을 갖고 있는 그들을 아끼고 위하는 마음이었다.

학생 아이들이 철부지 망나니패에게 얻어맞는 일이 생기면 반드시 달려가서 말리고

학생들을 두둔해 주었다.

이러한 일들로 하여 학생들 사이에는 물론, YMCA의 운동부 학생패 사이에서도

김두한은 인기가 있었다.

‘의리 있는 쓸 만한 녀석’으로 통한 것이다.

이 무렵 YMCA 유도부의 학생패 거물 김후옥이 그에게 권유해 주었다.

“넌 똑똑하니까, 이런 것(매점원)만 하지 말고 YMCA로 나와서 운동을 해…….”


김두한은 일자무식이면서도 학생패의 총본산인 YMCA 운동부에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의리 있는 쓸 만한 녀석’으로 인정받은 덕분이지만 학생패의 거물 김후옥의 후원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김후옥은 전북 금산(錦山: 현재는 충남)의 만석꾼 대지주의 아들이었다.

연희전문 재학시부터 YMCA에서 유도를 배웠다.

천혜의 소질과 체력으로 유도 실력도 발군의 것이었으나,

풍부한 재력과 함께 인격적으로 숭앙을 받아 학생패의 선배 지도자 격으로,

학생패의 횡포나 잘못을 훈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김두한을 성익경에게 소개했다.

성익경 또한 충남 서산의 4천석꾼의 대지주의 아들이었다.

일본 전수대학 출신의 그는 일본 유학시 권투를 배워 아마추어 웰터급 동양 챔피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귀국 이후 선수 생활은 하지 않고, 원서동(苑西洞)에 조선권투구락부(朝鮮拳鬪俱樂部)를

차려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안국동 로터리에서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백마운동구락부’라는 운동구점을 경영하기도 했던

그는 어쨌든 우리 나라 권투 보급의 선구자이다.

권투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다.

김두한은 그의 지도로 권투를 배웠다.

그러나 선수로서는 쓸모가 없었다.

미들급 선수를 찾기도 어려운 동양 무대에서 90킬로그램이 넘는 거구의 헤비급은

아무리 무쇠 주먹을 갖고 있다 해도 선수로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일본놈들이나 실컷 두들겨주자…….’

코치도 그렇게 가르쳤고, 그 자신도 그런 마음가짐이었다.

그는 권투를 했지만 역기도 들었고 기계 체조에 매달리기도 했다.

무슨 운동에나 만능이었으나, 같은 이유로 선수로서는 무자격이었다.

YMCA 운동부를 장악하고 있는 학생패들은 김두한의 출입을 그리 탐탁하게 생각지는 않았다.

그러나 소개자가 무시 못 할 김후옥 선배인 데다가 지도자가 성익경이어서 맞대놓고

저항은 하지 못했다.

게다가 YMCA 운동부에는 중동학교(中東學校) 출신의 권투 선수 오성환이 있었다.

오성환은 김두한보다 두 살 연상이었다.

김두한이 교동보통학교 1학년에서 중도 퇴학을 했지만

오성환은 같은 학교 2년 선배이기도 했다.

김두한이 파고다공원의 골목대장이던 시절,

같은 학교 같은 골목에서 같은 악동 시절을 보낸 터였다.

나이는 김두한보다 둘이 위였어도 워낙 완력이 센 김두한이 악동 시절의 두목이었다.

그러나 YMCA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 김두한은 오성환을 깍듯이 형님으로 모셨다.

오성환이 중간에서 학생패들의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날, YMCA 운동부 학생패와 경성중학(京城中學: 현 서울중학의 전신으로

일본인 학교) 학생들 사이에 편싸움이 붙게 되었다.

어떠한 싸움이든, 싸움에 관한 한 김두한에게 관심 밖의 것일 수 없었다.

무슨 까닭으로 싸우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원래부터 종로와 서대문 사이의 서울 한복판, 신문로(新門路)에 자리하고 있는

일본인 전용의 경성중학 아이들과는 종로의 학생패나 서대문의 망나니패나 똑같이 앙숙이었다.

편싸움의 정보는 학생들로부터 들었다.

이때 김두한은 국화빵을 받으러 판매 상자를 들고 풍미당에 와 있었다.

귀로 듣고 흘려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디야?”

“정동(貞洞) 이화고녀(梨花高女) 앞이에요…….”

머뭇거릴 사이가 없었다.

판매 상자를 그대로 팽개친 채 현장으로 달렸다.

관철동에서 정동까지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지하도며 육교가 있어 숨가삐 오르내려야 할 것은 없었다.

인구 45만 미만의 ‘대경성’에 전차는 있었지만 자동차가 드물어 붐빌 것도 없었고

거치적거릴 것도 없었다.

달리는 그는 날개 달린 검은 토끼였다.

덕수궁 돌담을 끼고 법원 쪽으로 치달을 때였다.

맞은편에서 축 늘어진 학생 하나를 다른 학생이 들쳐 업고,

두셋의 학생이 뒤따르며 부축을 하여 뒤뚱거리며 허겁지겁 뛰어오고 있었다.

허벅지에서 바짓가랑이 아래가 온통 피범벅이 되어 있는 것이,

칼에 찔린 것이 분명했다.

YMCA 운동부에 속해 있는 중학생들로, 병원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었다.

피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니지만, 피는 언제나 감정을 격앙케 한다.

먼 길을 급히 달려오느라 숨이 찼지만 일각도 지체할 수 없었다.

한달음에 치달아 왔을 때 법원 정문 앞 네거리 저쪽 편에 까만 학생복 차림의 학생들이

제비 떼처럼 몰려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있었다.

덕수궁이며 법원, 미국·영국·소련 등 외국 공관과 그 관저, 주로 외국인이 많이 다니는

교회(정동 교회), 미국인이 경영하는 레스토랑(중앙구락부: 현재 우유 조합 자리),

학교(이화고녀) 등 공공 건물이 많은 이 거리는 출퇴근이나 등하교 때가 아니면

인적이 드물어 한산했다.

이 거리를 학생들이 점령하듯 메우고 있었다.

이들은 여기서 편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편싸움이라고 해서 양패가 한꺼번에 뒤섞여서 백병전을 하듯

이리 치고 저리 치며 혼전을 벌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 점, 당시의 싸움에는 낭만이 있었다고나 할까, 신사도·기사도가 있었다.

양편에서 대표가 나와 일 대 일로 맞상대를 하는 것이다.

양 패거리들은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각기 자기네 편을 응원하며 지켜보는 것이다.

이쯤 되면 싸움이되 하나의 시합과도 같았다.

한쪽 대표가 굴복하거나 굴복의 의사를 표시하면 더 이상 짓이기지를 않았다.

진 편에서 또 다른 선수(?)가 등장해서 이긴 선수와 계속 붙기도 하고,

이긴 쪽에서 새 대표가 나와 다시 붙기도 했다.

김두한은 학생들의 벽을 헤치고 들어섰다.


원을 그리고 에워싸인 한복판에서 칼을 뽑아든 학생과 맨주먹의 학생이 겨루고 있었다.

칼을 뽑아든 학생은 물론 경중생이었다.

도시, 칼이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흉기다.

이를 뽑아들기만 하면 아무리 작은 칼이라 할지라도 사람의 기를 죽이고 위축케 한다.

“유꾸죠(간다)!”

일본놈은 칼 든 팔을 앞뒤로 휘이휘이 내저으면서 상대가 다가서기만 하면 언제라도 찌를 자세다.

이와 맞서 싸우는 조선 학생은 들어오는 놈을 받아칠 태세를 갖추고 두 주먹을 꼬나 쥐고 있었다. 그러나 엉덩이를 잔뜩 빼고 있는 것이, 그 칼의 위력에 위축되어 있음이 분명했다.

보아하니 그 자세에도 허점이 너무나 많았다.

위험하다.

당할 것이 뻔했다.

YMCA의 굵직굵직한 패가 섞여 있었더라면, 이런 꼴을 당하지 않았겠지만,

이건 어찌 됐든 조선인의 수모였다.

(맨주먹인데 칼을 뽑아들다니!)

의분을 느끼기에 충분한 비겁한 짓이 아닐 수 없었다.

고맙게도 김두한이 나서지 않으면 안 될 이유는 너무나도 많았다.

“고노 바까야로(이 바보 자식아!)”

그가 알고 있는 몇 마디 일본말 가운데 하나였다.

어찌나 우렁찬 목소리였던지,

싸우는 자나 이를 지켜보는 자들이나 깜짝 놀라서,

학생들의 와중 속으로 뛰어든 그를 똑같이 바라보았다.

그는 곧바로 일본놈 앞으로 육박해 갔다.

칼을 든 일본 학생은 돌연히 뛰어든 거한에 질겁을 한 듯했으나,

그래도 물러설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상당히 담대한 놈이었다.

어쩌면 자기가 쥐고 있는 칼의 위력을 믿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몸과 칼끝이 방향을 돌려 김두한 쪽으로 바뀌었다.

대체로 일본놈들은 칼을 잘 쓴다.

전통적으로 잘 쓴다 해도 좋을 것이다.

아이구찌(단도)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자들도 많다.

워낙 몸이 왜소하니까 힘으로는 모자라서 칼을 쓰게 되는 것일까?

주먹 세계에서 노는 야꾸자(건달)들도 단도를 쓰는 자들이 많았다.

이런 자들을 고로스께라 했다.

고로스께는 급하면 아무 데나 찌르지만,

그렇지 않으면 생명과는 무관한 허벅지를 찌르기를 잘한다.

조금 전에 당한 조선 학생도 그랬다.

칼을 워낙 잘 쓰는 놈은 정말 전광석화 같아서

어느새 찔렀는지도 모를 만큼 민첩했다.

그러나 이를 두려워할 김두한이 아니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저돌적으로 돌진해 갔다.

그 거대한 몸집과 박력은 등등했지만

그러나 칼이 들어갈 틈은 너무나도 많은 듯이 보였다.

그도 칼잡이와는 싸운 체험이 많지 않았던지 허점투성이였다.

이를 놓칠세라,

일본 학생은 날렵하게 몸을 날렸다.

단도의 칼날이 일순 번뜩였다.

칼날을 김두한의 허벅지를 향해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