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1부 黑龍의 트림-대결 2회

오늘의 쉼터 2014. 8. 24. 15:40

제1부 黑龍의 트림-대결 2회

 

 

그러나 엄동욱은 마적이 두려웠던 것은 아니다.

마적은 엄동욱보다 나이가 대여섯 살 위였다.

그는 주먹 세계의 선배 격인 마적과 맞닥뜨리고 싶지가 않았을 뿐이다.

만약 마적이 그 술집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굳이 그 집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영역인 종로 바닥에서 마적이 먼저 자리 차지를 하고 있는데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시중을 들고 있던 여급과 마적의 일행이 낯색을 바꾸며,

학생패가 떼지어 들어선 것을 마적에게 알렸다.

그러나 마적은 이를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여전히 기고만장해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엄동욱을 비롯한 학생패는 우르르 몰려들어 홀 한복판 넓은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았다.

여급이 어떤 기미를 알아차렸는지, 아니면 무슨 불길한 예감이 들었음인지,

불안한 표정으로 맥주병과 마른 안주를 부지런히 학생패 앞에 갖다 놓았다.

학생패들이 미처 목을 축이기도 전이었다.

“선배가 술을 자시고 있으면, 인사를 하러 오든가 곱게 물러갈 일이지…….”

마적은 그들이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평소에 사람 좋고 겸손한 편인 마적이 술에 취하지만 않았던들 그런 폭언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적 자신, 자기의 힘을 믿고는 있었지만, 학생패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부하도, 같은 패거리도 거느리지 못한 독불장군인 것이다.

학생패가 점잖게 자기의 존재를 인정하고 눈감아주고 있기 때문에 종로 바닥에서 기생하면서도

활개를 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잘 알고 있었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그는 남자답게, 마적답게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여전히 마셔대며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그래, 학생패는 만만치가 않지…….)

마적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학생패 일당을 바라보았다.

호남형의 미남이지만 6척 거구에, 씨름과 럭비로 단련된 엄동욱의 마력(魔力)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도 남았다.

이 밖에도 평양의 유명한 부호 백과부의 사위이자 연희전문 학생인 유학근만 해도,

육상의 원반·투원반 선수로 역시 키가 6척의 역사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의리가 강하고 인정도 많은 데다가 술을 좋아해

한두 차례 술자리를 같이한 일도 있었다.

야구 선수 조점룡, 초대 웰터급 챔피언 이해택,

경신중학의 유명한 축구 골키퍼 출신 이희봉 형제,

중동중학의 권투 선수 오성환 등도 낯이 익었다.

그러나 마적은 이들을 크게 겁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학생패들은 점잖고 의리를 지킬 줄 안다.

협객 세계의 의리와 불문율로, 일 대 일로 상대한다면 누구와도 상대할 만한 자신이 있었다.

다시 종로 바닥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한번 자신의 힘과 본때를 보여주고도 싶었다.

그는 내심 전율과도 같은 스릴을 느끼면서 뇌까렸다.

“요즘 아이들은 힘도 없으면서 패거리를 이루어 까분단 말야!” 

 

목소리에도 털이 나 있는 것 같은 껄끄러운 마적의 뇌까림은

학생패들에게 들으라는 방약무인(傍若無人)의 오만임이 틀림없었다.

학생패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쳐다보았다.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누구 하나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지 않았다.

마적과 술자리에서 마주쳤다는 것이 잘못된 일인 것이다.

그들은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으나, 누구나 이 불행을 실감하고 있었다.

거기 앉아 있는 학생패 어느 누구도 마적의 무서운 힘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마적과 상대하여 일 대 일로 그를 굴복시킬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자도 없었다.

평소에 자기 힘을 자랑하고 싶었던 그들이긴 했지만, 마적하고라면 사정이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되도록 마적과는 맞부딪치지 않도록 피해 온 그들이었다.

그러나 사태란 항상 원하는 방향으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엄동욱도 순간적으로 난처하다고 느꼈다.

그렇다고 그대로 묵과하고 흘려버릴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긴 엄동욱은 마적이나 쌍칼, 그 밖의 망나니패를 치지도외(置之度外)해 온 것이 사실이었다.

이들이 두려웠던 것은 아니다.

서로 같은 주먹의 길을 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사상도 노선도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대상은 일본놈들이지, 같은 핏줄을 타고난 조선인은 아니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들에게 직접적인 혐오감이나 나쁜 감정은 없었다.

그것이 엄동욱의 도량이라면 도량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철저한 우월감과 그들을 향한 완전 무시가 깔려 있었다.

그것은 또한 그들과 이렇다 할 마찰 없이 힘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이었다.

하지만 이제 사정은 달랐다.

모욕을 감수하면서까지 참아 넘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학생패의 두목으로서의 체면도 있었다.

힘이란 힘을 필요로 할 때 겨루는 것,

결코 자랑할 것이 못 된다고 스스로에게 일깨워왔지만,

지금이야말로 힘을 필요로 하는 때이며 마침내 힘을 겨뤄야 하는 때인 것이다.

언젠가는 한번 부딪쳐야 할 일이 예상 밖으로 빨리 닥친 것뿐이다.

이 기회에 학생패의 본령을,

그리고 엄동욱의 진면목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의 젊은 혈기가 용솟음치며 역류했다.

천천히 엉덩이를 들고 일어섰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했다.

일어선 그는 걸음을 옮기는 한 발 한 발에 충분한 무게를 싣고 뚜벅뚜벅 마적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이제까지 자신의 힘을 의심해 본 일이 없었다.

씨름판 모래 사장에서도, 주먹의 세계 싸움의 무대에서도…….

그러나 지금, 마적과 대결하기 위해 다가가는 그 순간은

그를 굴복시킬 수 있다는 아무런 확신도 근거도 갖고 있지 못했다.

엄동욱은 일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두려움에서 자신의 비굴을 읽는 것보다

마적의 존재를 의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적의 괴력도 이제 정상에서 사양길로 접어들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술에 취해 있다는 것도 약점일 수 있을 것이다.

(충분히 겨뤄볼 만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안시킬 수 있는 구실을 찾고, 스스로를 고무시켰다.

그렇지 않아도 벌써 기가 죽어 있는 여급이며, 마적의 ‘창백한 물주들’이 공포의 눈을 치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적은 그를 등뒤에다 두고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등뒤에서 비겁하게 기습해 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엄동욱은 그의 테이블 앞에 멎었다.

마적은 비로소 고개만을 돌려 한쪽 눈으로 6척 거구를 치켜 보았다.

“동생……, 인사를 오는 것이 늦구먼?”

“많이 취하셨군요?”

엄동욱은 되도록 정중한 말투를 골랐다.

“응, 취했어…… 조금은…….

그렇지만 동생이 붙기를 원한다면 얼마든지 상대해 줄 수가 있지!”

마적은 자칫 상체를 움칫거렸다.

그는 엄동욱의 정중한 말투 속에 돋친 가시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엄동욱은 움칫거린 마적의 어깨에서, 독사가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

또는 세(勢)가 불리함을 깨닫고 도망치기 위해,

그 어느 편에도 유효하게 몸을 사리는 빈틈없는 태세인 것을 보았다.

적은 만만치 않은 것이다.

“감히 어떻게……

선배에게 손을 댔다가 의리 없는 놈으로 몰리는 것도 이롭지 않구…….

하지만 당신의 힘이 세다니, 어디 한번 겨뤄봅시다.”

엄동욱은 몸과 마음을 동시에 사렸다.

그것은 명백한 도전인 동시에 마적을 향한 모욕이었다.

형님이나 선배님 대신 당신이란 칭호부터가 그러했다.

마적의 눈이 번뜩거렸다.

“어떻게?”

“팔씨름으로…….”

“좋아!”

마적은 짤막한 대답과 동시에 팔뚝으로 테이블 위의 것을 몽땅

 빗자루로 쓸어내듯 와르르 쓸어 내렸다.

맥주병이며 유리컵·접시가 한꺼번에 굴러 떨어지면서 와장창,

소리를 내며 깨어지고 흩어졌다.

마적은 입가에 빙그레 미소마저 띠고,

맥주가 흥건하게 고여 있는 테이블 위에 벌써 팔뚝을 괴어 세웠다.

적동색으로 이글이글하게 탄 무쇠 같은 팔뚝은 어지간한 장부의 장딴지만했다.

팔뚝을 괸 채 휘이휘이 흔들고 있는 손이 야구 글러브만했다.

엄동욱은 테이블 맞은편으로 돌아가면서 바짝 긴장을 했으나,

그래도 팔씨름으로 대항하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어찌 됐든 주먹계의 선배와 피를 보지 않고 싸우게 된 것이 다행이었고, 팔씨름에 관한 한 아직껏 어느 누구에게도 져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싸움이 힘과 배짱이라면, 팔씨름은 힘과 요령이다.

엄동욱은 그 힘과 요령을 아울러 갖추고 있었다.

우르르 몰려들어 테이블을 에워싼 학생패들도 보스가 팔씨름으로 대결하게 된 것에 안도했다.

그의 팔씨름 실력을 알고 있었으니까…….

앉은 의자가 부서져 나갈 것 같은 커다란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엄동욱이 마적의 손을

마주 잡았을 때, 그는 순간적으로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아닌데?)

그는 맞잡은 손에서 무게를 느꼈다.

그 무게는 모래판에서 씨름을 할 때,

힘을 겨루기도 전에 난적의 샅바를 잡을 때부터 느껴지는 그 무게였다.

그것은 체중의 압박감이나 중압감이라고만 할 수 없는,

고목이 내리고 있는 뿌리와 같은 힘이었다.

엄동욱은 마적의 손을 잡자마자 밑동이 잘린 바로 그러한 고목의 뿌리를 연상했다.

어디에다 힘을 쓰며 밑동 잘린 고목의 뿌리를 뽑아낼 수 있단 말인가.

엄동욱은 물론, 마적과도 지면이 있는 유학근이 심판을 자처하고 앞으로 나섰다.

두 사람의 손등 위에 자기의 손을 포개어 얹어놓고, 두 팔의 중심과 균형을 잡았다.

“시작!”

두 사람의 손등을 동시에 치면서 구령했다.

“여랏차!”

뱃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기합과 함께, 엄동욱은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마적의 팔은 움칫도 하지 않았다.

정말로 땅속 깊이 넓게 뻗은 나무뿌리 같았다.

그의 이마에는 지렁이 같은 힘줄이 돋아났고 땀이 진물처럼 엉겼다.

그러나 마적은 방금 자기 손으로 탁상 위의 술병이며 접시를 쓸어 내리고,

접시와 유리컵이 와장창 쨍그렁, 깨어져 나가는 소리를 듣고 번뜩 술이 깨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사태가 심상치 않은 것을 깨달아야만 했다.

(아뿔싸! 학생패의 두목인 엄동욱과 힘을 겨루다니!)

그건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아니, 무모한 짓이었다.

행랑살이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서, 주인 마님인 지주의 아들과 힘을 겨루자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겨도 별수가 없고 져도 별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이겼다가는 주인 마님의 노여움을 사서 행랑살이마저 쫓겨날 신세인 것이다.

게다가 힘으로 대항한다 해도 반드시 자기에게 승산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엄동욱은 전조선의 씨름계를 석권한 천하장사일뿐더러 명색이 학생패의 두목인 것이다.

그 힘을 넘볼 수가 없는 상대였다.

게다가 이미 전성기를 지난 자기의 힘으로 그를 꺾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

설령 그와 싸워 이긴다 한들, 주먹 세계의 선배로서 자랑스러울 것도 없었다.

진다면 자신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는 사태를 이 지경으로 몰고 온 자기 자신의 경솔을 뉘우쳤다.

(술 탓이야! 빌어먹을…….)

하지만 이제 와서 내민 손을 거두어들일 수도 없었다.

그는 엄동욱의 내민 손을 잡았다.

그 손이 묵직했다.

역시 예상한 대로 무쇠 같은 팔뚝이었다.

싸워서 하나도 이로울 것이 없는 마적은

심판을 자처하고 나선 유학근을 원망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그가 심판을 볼 것이 아니라,

이 싸움을 중재해 줄 것을 바라는 마음이 보다 간절했다.

그 심정을 알 까닭 없는 유학근은 싸움을 강요라도 하듯이

두 사람의 팔의 중심과 균형을 잡고 있는 것이다.

싸워야만 하는 절박한 시간은 시시각각 심술스럽게 다가오고 있었다.

“시작!”

유학근의 구령에 마적은 본능적으로 팔에 힘을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주기(酒氣)가 있는 그의 얼굴은 시뻘겋게 일그러져서 적귀(赤鬼)만 같았다.

그러나 얼굴만 달아올랐을 뿐,

엄동욱의 팔은 움칫도 하지 않았다.

(허어! 과연!)

마적은 힘을 돋우면서 엄동욱의 괴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힘센 놈을 처음 대해 보는 것이다.

(하지만 싸움은 이겨야 하지!)

그는 어금니를 악물고, 뱃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혼신의 힘을 마지막으로 쥐어짰다.

서로 손을 마주 쥔 채 전류가 흐르듯이 부르르 떨고만 있던 두 주먹이 마적의 생각 탓인지,

엄동욱의 팔이 자칫 마적 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그 순간, 마적의 머릿속으로 번뜩이며 스쳐가는 검은빛이 있었다.

그것은 죽음의 빛과도 같은 검은 그림자였다.

이겨서 어쩌자는 것인가.

학생패의 두목을 꺾었대서, 그 우두머리로 군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마적의 체면을 유지하자는 것인가?

자신의 얼굴은 서겠지만, 학생패 두목의 얼굴은 무엇이 되는가?

체면을 잃은 학생패의 보복을 혼자서 어찌 감당하겠다는 것인가?

그것은 자신의 위기 의식을 동물적으로 감각하는 생명 보존의 본능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자 마적의 팔은 쥐가 오른 것처럼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무식한 놈이 힘 한번 대단하구나!)

이마에 엉긴 엄동욱의 진물 같은 땀은 비지땀으로 변했다.

세상에 이처럼 힘센 놈도 있단 말인가.

끄떡도 하지 않는 것이 쇳덩이인가, 바위산인 것인가.

그는 마지막 안간힘을 썼으나, 마적의 팔뚝은 꿈쩍도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팔의 근육이 이완된 듯 느슨해지면서 힘의 한계를 느꼈다.

그 순간이었다.

지렛대를 넣어도 움칫하지 않을 것 같았던 마적의 팔이

세워놓은 장작개비가 쓰러지듯 쿵, 하고 소리를 내며 쓰러진 것이다.

학생들이 함성을 울렸다.

그러나 엄동욱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았다.

“내가 졌어! 내가 졌으니 난 이제 마적 자격이 없어! 아우가 이제부터 새 마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