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1부 黑龍의 트림-대결 1회

오늘의 쉼터 2014. 8. 24. 15:40

제1부 黑龍의 트림-대결 1회

 

 

푸른 하늘에는 흰 구름이 흘렀고, 높은 담장 위로는 구름보다 흰 순백의 목련이

소담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꽃은 봄이 되면 으레 피어나게 마련인 것.

그의 시선에 오래 머무를 것이 되지 못했다.

그는 좁은 골목길을 혼자서도 메울 것 같은 거구를 천천히 흔들면서 담장을 끼고 걸었다.

그의 뒤로는, 걷는 것보다 굴러가는 것이 빠를 것 같은, 목도 없이 머리가 어깨 위에

달라붙어 있는 땅딸막한 몸집의 사나이가 마음껏 어깨를 뒤로 소스라뜨리고 따랐다.

그때였다. 높은 담장 안에서 위급을 호소하는 절박한 울부짖음 소리가 들렸다.

“사람 살려어…….”

그것은 분명한 발음으로 들린 것은 아니었지만,

시궁창 밑바닥에서 터져 나오는 것 같은, 공포로 자지러진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는 발걸음을 멈추는 것보다 먼저 땅딸막한 몸집의 사나이를 바라보았다.

땅딸막한 몸집의 사나이는 그의 눈빛 하나만을 보고,

정말 구르듯이 먼저 골목길을 빠져 달려나갔다.

그 뒤를 그는 결코 서두르지 않는 걸음으로 뒤쫓았다.

아침 시각으로는 늦었고 정오가 멀지 않은 대낮에,

그것도 종로의 한복판 요정 ‘부용(芙蓉)’에서 들려오는 이 괴성은 무엇이란 말인가.

부용의 큰 대문은 열린 채로 있었다.

대문 앞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대문 안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서로 쑤군거리기도 했다.

대부분이 이곳 주민들인 상인들이었다. 표정이 밝지 않았다.

그가 거구의 모습을 나타내자 모여 있던 상인들이 그에게 굽실 고개 숙여 인사를 하기도 했고,

경원하듯 뒷걸음질치기도 했다.

그는 부용의 대문 맞은편, 땅콩 장수의 노대 앞에 섰다.

노대 위에는 땅콩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 거한은 땅콩 장수의 양해를 구할 것도 없이,

그 커다란 손으로 땅콩을 한 움큼 움켜쥐었다.

그리고 한 개씩 입으로 가져갔다.

그 크고 굵은 손가락에 잡힌 땅콩은 깨알처럼 작아 보였다.

잠시 후, 부용의 대문 안에서 땅딸막한 몸집의 사나이가 허겁지겁 달려나왔다.

칼자국이며 상흔투성이의 험상스런 얼굴이 더욱 푸르죽죽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사색이 되어 뛰어나오는 ‘망치’를 보자,

사태가 심상치 않은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망치는 키는 5척 단구에 지나지 않지만 몸무게가 30관이 넘는 거한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단단한 참나무 장작을 무릎에다 대고 꺾는 것이 아니라,

두 손만으로 엿가락처럼 뚝뚝 분질러내는 괴력의 소유자다.

그의 주먹에 한 대 얻어맞으면 머리통이 빠개지지 않고는 못 견디는,

정말 그의 별명처럼 망치와도 같은 무서운 사나이인 것이다.

 

그 망치가 이처럼 질려 있다니!

“뭐야?”

그는 땅콩 한 알을 다시 입으로 가져가며 물었다.

“형! 야단났어! 맏형님이 주인 아저씨의 목에다 식칼을 들이대고 북북 긋고 있잖아.”

“까닭은?”

그는 눈썹 하나를 움직이는 데도 충분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처럼

왼쪽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 물었다.

“엊저녁에 맏형님이 여기서 술을 드시게 되었나 봐.

그래서 주인더러 ‘산홍(山紅)’이를 들여보내라 했는데,

산홍이 말을 듣지 않고 다른 방에 들었대지 뭐야…….

그래서…….”

“그깐 이유로 칼부림을 해?”

그는 망치의 말을 가로막고, 잠시 생각하는 듯 땅콩을 입으로 가져가는 손을 멈추었다.

아무리 기녀의 신분이라 하지만, 다른 손님이 먼저 들었으면 주인이라 해서 빼돌릴 수도 없고,

본인이 들어가기 싫으면 안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건 너무 심하잖아. 형님께 가서, 내가 그만두시라 한다구 말해.”

망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담장 안의 비명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보다도 더 놀라고 의아해하는 표정이었다.

“아니, 형! 어쩌려구 그래? 그러다가 큰 변이라도 당하면?

그저 못 본 체 지나쳐버리자구.”

망치는 머뭇거렸다.

머뭇거린 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누가 감히 암흑가의 제왕 ‘쌍칼’에 맞서, 그 비위를 거스르려 한단 말인가!

“잠자코 이르는 대로 해! 가서 바로 김두한(金斗漢)이 그렇게 말씀드리고 오라 했다구…….”

김두한은 조용히 말했으나, 그 목소리에 결연한 의지의 힘이 배어 있었다.

망치는 그 목소리보다도, 비장감마저 감도는

그의 싸늘한 표정을 읽고 더 이상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는 처음에는 뒷걸음질로,

그리고 몇 걸음 물러가서는 뒤돌아서서 성큼성큼 부용으로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땅콩을 입으로 가져가려던 김두한의 손이 빨라졌다.

그는 조급했던 것이다.

초조했던 것이다.

전율이며 공포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난 오늘 죽게 될지도 모른다…….

종로 바닥에 다시 발을 딛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배자는 있어도 법률이 없는 암흑가.

그 암흑가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쌍칼에게 감히 도전하고 나선 것이 무모했던 것이나 아닐까?

쌍칼이 얼마나 잔인하며 포악한가는 김두한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또 그가 얼마나 날쌘 괴력의 역사(力士)인가도 잘 알고 있었다.

왜못을 두 손으로 구부릴 수가 있으며 잣알을 엄지손가락과 둘째손가락으로

비벼 깨뜨릴 수가 있었다.

박치기의 명수여서, 껑충 뛰어올라 전기선대의 전구를 머리로 받아 깨뜨리는 비호였다.

무엇보다 성격이 포악 무도해서, 부하가 인사만 늦게 해도 불에 달군 인두로 지져대기까지 했다.

종로 바닥의 크고 작은 상인들도 그의 횡포와 등쌀에 오금을 펴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이에 맞서 저항하려 하지 못했다.

그 쌍칼에 김두한이 감히 도전하고 나선 것이다.

일제 치하 36년 어느 때 어느 시절 조선인이 빛을 보고 산 적이 있었을까만,

30년대 초반도 여전히 어둠 속에 짓눌려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마침내 단말마적인 포악을 부리기 시작했다.

1931년 5월,

조선의 반제 투쟁 유일 전선이었던 ‘신간회(新幹會)’가 해산되고 말았다.

극좌의 공산당은 지하 투쟁을 선언하고 나섰다.

일제는 이해 9월 18일 만주사변을 저질러 중국을 상대로 15년에 이르는 장기 전쟁을 일으켰다.

이로 해서 이 나라의 민족 운동은 공산당처럼 지하로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드러내놓고 저항을 하지 못했고, 표면적으로는 위축된 듯 기를 펴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땅의 청년들은 나라와 시국의 흐름에 비분강개했다.

곳곳의 술집이며 다방은 이러한 청년들이 울분을 터뜨리고 삭이는 휴식소이며 배설처였다.

‘혁명가는 교수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기밖에 더하랴…….’
‘우리의 갈 곳은 현저동 101번지(서대문 형무소)!’
 
이러한 낙서가 도처의 다방이나 술집의 벽, 변소의 담벼락에 휘갈겨져 있었다.

시국의 거센 바람은 뜻있는 청년들의 생각을 마구 휘저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느 청년이고 ‘민족’을 의식치 않는 머리란 없었다.

그 머릿속에는, 민족 운동의 전위로 언제나 목숨을 바치겠다거나,

설사 목숨을 바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한평생 가정을 갖지 않고 꾸준히

민족 정신 고취를 위하여 희생하겠다거나,

어쩔 수 없이 가정을 갖게 된다 하더라도 남들이 흔히 갖는 향락을

일체 포기하겠다쯤의 생각은 갖고 있었다.

그 생각이 나이 들어감에 따라 녹슬고 시들어갈 수는 있을망정…….

이러한 청년들의 의식은 거리의 무성한 잡초,

암흑가인 이른바 ‘주먹 세계’의 젊은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인텔리 지식층이 머리로 가졌다면, 이들은 이를 가슴으로 가졌다.

가슴으로 가진 의식이 머리로 가진 의식보다 더 뜨겁고 진하며 격렬한 것일 수 있었다.

여기서 잠깐 이 무렵의 서울의 암흑가, 주먹 세계의 판도를 대충 훑어볼 필요가 있겠다.

제법 조직적인 힘을 갖춘 주먹 세계로는 왕십리패와 서대문패, 종로·관철동패가 있었다.

왕십리패는 역도·씨름을 잘하는 패거리들이 많았고, 서대문패는 철봉의 명수로

서커스단 출신인 두목 김기환 밑에 권투·기계 체조 등으로 단련된 혈기왕성한 청년들이 많았다.

이에 비해 종로·관철동패는 YMCA 운동부 출신으로 50~60명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세 조직 중 왕십리패와 서대문패는 총칭해서 ‘망나니패’로 불렸고,

종로·관철동패는 흔히 ‘학생패’로 불렸다.

서울의 변두리를 차지하고 있는 망나니패와 서울의 중심부를 강점하고 있는 학생패 사이에는

대립 관계 없이 평온을 유지했다. 
 
소위 망나니패는 조직력이나 파워 면에서 학생패보다 우세했다.

하지만 배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학생패의 멸시를 받았다.
 
당시만 해도 학생이 귀하고 숭앙받는 풍조가 강했으므로 학생패들의 우월감도 대단했지만,

상인이나 일반 시민들로부터 특별한 대우와 인정을 받았다.

똑같은 주먹을 써도 질이 좋았다고나 할까.

‘우미관(優美館)을 장악하는 자가 전조선을 지배한다’ 할 정도로 주먹 세계의 총본산인

종로·관철동 일대를 학생패가 장악하고 있다는 것에, 망나니패는 배가 아프고 비위가 상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서울의 중심가인 종로 쪽을 기웃거리며, 여차하면 우미관을 장악하려고

호시탐탐하고 있었다.

이러한 판도와 분위기 아래, 이 조직 세력과는 별도로 ‘마적’·‘팔찌’·‘쌍칼’ 등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거리의 영웅과, ‘낙화유수’·‘꼴뚜기’ 등

묘한 이명의 무뢰한 거두가 도처에 할거하고 있었다.

이에 비하면, 후에 우미관뿐 아니라 전국의 주먹 세계를 장악하게 되는 김두한은,

이들이 활개치고 다니던 시절에는 아직은 똘마니 축에도 끼지 못했다.

특히 ‘마적’은 이름을 날렸다.

그는 이름도 없이 그저 마적으로만 통했다.

지금도 있는 종로 3가 단성사 뒤쪽, 현재 주유소가 들어 있는 자리에

‘경성 자동차(京城自動車)’라는 택시 회사가 있었다.

마적은 이 택시 회사의 조수였다.

어찌나 힘이 센지 자동차를 두 팔로 번쩍번쩍 들어올리고,

차돌멩이를 비스킷처럼 손으로 뚝뚝 분질러내는 괴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 배운 것이 없어 자동차 운전 면허도 따지 못하고

자동차 바퀴의 펑크나 때우며 만년 조수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이 스물서넛쯤 되자 그의 괴력은 더욱 세상에 알려져서

종로 일대의 골목대장이나 학생패들도 마적이라고 하면 한 수를 접어 깍듯이

 ‘형님’으로 대접을 했다.

하지만 그는 힘만 셌지 머리가 모자라 독자적으로 집단을 만들 만큼

통솔력이나 조직력을 갖고 있지는 못했다.

물론 무식한 그가 학생패에 흡수될 수도 없었고, 학생패가 그를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저 돈 많은 서울의 한량이나 시골 학생의 보디가드를 겸한 들러리 수하로

그들의 환대를 받으며 유유자적했다고나 할까.

술을 좋아해서 종로 5가, 관철동·낙원동 일대의 술집에서 소일을 하며 행세를 한 셈이다.

돈 씀씀이가 후하고 인심이 좋아 술집에서의 인기도 높았다.

마적과 함께 팔찌나 쌍칼도 그 방면에서 알아주는 실력자였으나,

마적과 마찬가지로 조직이 없어 실질적인 세력을 펴지 못했었다.

YMCA 근처 ‘세창 양복점’ 기술자인 팔찌는 힘도 셌지만 한번 붙잡으면

놓아주지를 않는 집요함과 끈질김으로 두려움을 샀다.

구두 기술자인 쌍칼은 독종으로 유명했지만,

요정 부용의 주인에게 식칼을 들이대고 있는 쌍칼과는 전혀 별개의 인물인 것이다. 
 
그럼, 다음은 구두 기술자인 쌍칼과 부용의 주인에게 식칼을 들이대고 있는

쌍칼이 어떻게 다른가를 설명할 차례다.
 
하지만 이는 뒤로 미루기로 하고, 당시의 주먹 세계의 양상을 좀더 상세히 이야기하기로 하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부모도 없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불우한 자식들이 많았던

이른바 망나니패에 비해, 학생패는 부호·지주들의 자제들이 많았다.

이런 출신 성분과 환경의 차이 때문에 학생패가 망나니패를 무시하듯 경원해서

직접적인 충돌이나 싸움이 없었던 것이다.

이들 학생패들은 YMCA로 운동을 하러 가거나, 또는 운동을 끝마치고 나면

흔히 우미관 맞은편 ‘풍미당’에 많이 모였다.

풍미당은 ‘국화빵’과 ‘가께우동(일본식 국수)’ 집으로 유명했다.

값도 싸고 맛도 일품이어서 학생들의 인기가 대단했다.

한일자형으로 길고 넓은 홀이 있어, 실히 100명은 수용했다.

힘깨나 쓰는 학생패와 선량한 학생들이 함께 어울렸으나,

이들 사이에 마찰이나 말썽이 일어나는 일이란 없었다.

주먹패가 선량한 학생들을 까닭 없이 구타하며 괴롭히거나

금품을 갈취하는 따위는 더욱 없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등 교육을 받고 운동을 해온 이들은,

스스로 선택된 자의 자부를 갖고 있었다.

나라 잃은 일제 치하에서 일본놈들을 굴복시키고,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길은

스포츠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역도와 레슬링·권투·유도 등으로

심신을 단련하고 있는 그들인 것이다.

이들이 하나의 세력을 이루었다고 해서 범죄 단체로는 발전하지 않았다.

하물며 같은 조선 학생들을 구타하거나 괴롭히는 일이란 있을 수 없었다.

오히려, 조선 학생들이 일본놈들에게 매를 맞거나 당하면 이를 복수해 주고

보호해 주는 의리의 협객들이며, 지사(志士)로 자처하는 이들인 것이다.

이 학생패 가운데 보성전문 씨름부 출신의 엄동욱(嚴東旭)이 있었다.

서울 출신인 그는 학생패의 실질적인 보스였다.

문자 그대로 힘이 천하장사였다.

씨름판에서, 아무리 힘이 좋고 기술이 출중한 씨름꾼이라도 번쩍 쳐들어

내동댕이칠 것도 없이 가만히 들어올려 조용히 누였다.

씨름이 되지 않았다.

‘힘이란 힘을 필요로 할 때 겨루는 것이지, 자랑할 것이 못 된다.’

엄동욱은 좌우명처럼 말했었다.

그만큼 인텔리답게 겸손했다.

그러한 그가 어쩔 수 없이 스스로 힘자랑을 하고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긴 여름 해가 질 듯 질 듯하면서도 지지 않고 뉘엿거리고 있었다.

YMCA에서 한바탕 운동을 하고 땀을 빼고 난 다음,

그는 부하라기보다 동료 패거리들과 함께 국일관(國一館) 골목의 어느 비어 홀로 들어갔다.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건만,

벌써 한쪽 테이블에서 술에 취해 왁자지껄 떠들어대고 있는 패들이 있었다.

보아하니, 물주 격인 창백한 한량들에 둘러싸여 있는 마적이었다.

(잘못 들어왔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