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1부 黑龍의 트림-대결 5회

오늘의 쉼터 2014. 8. 24. 15:43

제1부 黑龍의 트림-대결 5

 

 

김두한은 몸을 비키지도 않은 채 그 칼을 그대로 맞는가 싶었다.

제자리에서 몸을 옆으로 슬쩍 돌렸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된 것인지 칼을 들고 달려든 녀석이 달려온 여세로 흐르듯이

그의 옆을 지나치더니 돌부리에 차여 넘어지듯 앞으로 폭삭 고꾸라지는 것이었다.

그의 단도는 그대로 땅바닥에 덜커덕 굴러 떨어졌다.

일본놈이 칼로 찌르려 한 그 찰나 김두한은 왼발을 비스듬히 반 발짝쯤 물러서면서

왼손으로 상대의 칼을 든 손목을 후려친 것이다.

그것과 거의 동시에 오른발을 역시 반 발짝쯤 당기면서

오른손으로 상대의 명치를 정확하게 찌른 것이었다.

언제 어디를 어떻게 건드렸는지 주위의 학생들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았다.

일본놈이 쓰러지자 조선 학생들 사이에서는 얕은 탄성이,

일본 학생들 사이에서는 동요의 빛이 흘렀다.

“까불지들 말고, 어서 꺼져!”

그는 일본놈들 쪽을 향해 소리쳤으나 조선말이 그들에게 통할 리 없었다.

그러자 일본 학생들 가운데서 제법 몸집이 굵은 녀석 하나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왔다.

김두한은 그를 본 순간, 그가 누구인가를 단번에 알았다.

전조선 유도 대회에서 중등부 우승을 한 유도 5단의 오찌아이(落合)였다.

오찌아이는 경중 졸업반인 5학년이었다.

그러나 입학을 늦게 한 데다가 몇 차례의 유급을 해서 나이가 많았다.

워낙 몸집이 좋고 듬직해서 다른 학생들과 비교하면 아이들 틈의 어른이었다.

그 자신이 어른 행세를 해서 같은 반 아이들과도 잘 어울리지 않았다.

학생들끼리의 싸움에서 굳이 그가 앞장서는 일도 없었다.

그러한 그가 이날따라 싸움판에 직접 나서게 된 것은,

학생패도 아닌 자가 느닷없이 뛰어들어 자기 패를 해친 데 대한

그 나름대로의 의분을 느꼈기 때문인 듯하다.

모자도 벗어버린 채 거구의 몸을 흔들면서 나오는 오찌아이의 모습을 본 순간,

김두한도 조금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오찌아이의 유도 시합 광경을 직접 목격한 일도 있었지만,

그에 대해서는 익히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조선 학생들에게도 유도의 강자가 많았지만,

오찌아이에게만은 이빨이 들어가지 않았다.

뚝심이 어찌나 센지 이쪽에서 아무리 수를 쓰고 기술을 부려도

바윗덩어리처럼 옴쭉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놈은 힘만 좋은 것이 아니었다.

기술도 월등히 좋아서 작은 발 재간 정도가 아니라 언제나 업어치기·허리치기 등

큰 기술로 완전한 한판을 따내는 맹자였다.

그가 졸업을 하지 않는 한 조선인 학생이 중등부에서 우승을 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체념을 하다시피 하고 있는 터였다.

그런데 그는 해마다 마냥 졸업반에 머물러 있는 것이었다.

그 오찌아이가 김두한과 대결하기 위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김두한은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놈에게 붙들리면 이로울 것이 없지…….)

그러면서도 그는 오찌아이가 바로 앞까지 닥쳐들고 있는데도

물러서지도 않았고 맞싸울 태세조차 갖추고 있지 않았다.

오찌아이가 뭐라고 떠들고 있었지만 일본말을 모르는 그는 알아듣지도 못했다.

요컨대 한번 맞붙자는 것이겠지.

“요로시(좋다)!”

그는 역시 몇 마디밖에 모르는 일본말 가운데 한마디로 응수를 했다.

그리고 그것이 싸움 개시의 신호이기나 한 것처럼 자기의 손뼉을 딱 쳤다.

오찌아이는 다짜고짜로 김두한의 멱살이라도 움켜잡으려는 듯 달려들었고,

김두한은 제자리에서 흠칫 어깨만을 움직거리는 듯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셈인지 오찌아이가 턱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면서

외마디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마잇다(졌다)!”

기실, 어느새 김두한의 주먹이 번개처럼 그의 턱에 날았던 것이다.

팔을 크게 내휘두를 것도 없었다.

주먹도 두 방이 필요 없었다.

오직 한 방이면 충분했던 것이다.

싸움은 너무나 싱겁게 끝났다.

경중 학생들은 자기네 패의 총수가 너무나 어이없게 무너지자

더 이상 싸울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일본 사람들은 그 점이 기특하리만큼 깨끗했다.

한번 졌다고 자인을 하면 깨끗이 굴복을 하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일본놈들을 ‘앗싸리하다’고 하는 이유이며, 앗싸리하다는 말은

아직껏 우리 일부 사회에서 통용되는 일본말의 하나가 되어져 있을 정도인 것이다.

싸움을 끝낸 김두한은 조용히 자기 주먹을 들여다보았다.

자기가 보기에도 억세고 다부진 주먹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주먹의 위력을 이때만큼 실감한 때도 없었다.

 

주먹의 위력을 지금처럼 효용 있게 발휘해 본 일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흐뭇한 일임에 틀림없었으나 그렇다고 의기양양할 것도 없었다.

(그까짓 중학생에 지나지 않는 것을…….)

김두한이, 몰리고 있는 YMCA 운동부 학생들을 돕기 위해

단신으로 이화고녀 앞으로 달려갔다는 얘기를 듣고 우미관에서 같은 매점원으로 있는

심청과 우미관 골목패인 문영철·김무옥·망치·팔찌 등이 뒤미처 달려왔을 때는,

이미 일본 학생들은 쥐새끼처럼 슬금슬금 꽁무니를 뺀 다음이었다.

이들 일행은 유유히 관철동으로 되돌아왔다.

어찌 되었거나 이날의 싸움은 김두한으로 인해 조선 학생패의 쾌승으로 끝났다.

이 일로 해서 김두한은 YMCA 학생패들 사이에 ‘의리 있는 쓸 만한 녀석’에서

의리 있는 쓸 만한 사나이’로 승격되었다.

동시에 그에게 ‘잇뽕(一本: 한 방)’이란 새로운 별명이 붙게 되었다.

상대를 쓰러뜨리는 데 한 방이면 그만이지 두 방이 필요 없다는 데서 붙은 별명이었다.

그러나 그 이튿날 김두한은 이 싸움으로 인해서 종로서 고등계로 연행을 당해야만 했다.

조선총독부 경무청이 김두한을 그 싸움의 주모자로 지명 체포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그는 아직 경찰 고등계의 맛을 모르고 있었다.

수갑을 채우지는 않았으나 처음 끌려가보는 것이었다.

끌려가는 까닭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는 있었으나,

설마 자신이 그 싸움의 주모자로 몰리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솔직히 두려움이 없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껏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체험을 하게 됨으로써

화려한 이력을 갖게 되는 것 같은 우쭐한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일본놈을 때려주고 잡혀가는 것이니,

독립 투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수갑을 차는 것이 격에 어울릴 것 같았고,

수갑을 찬 모습으로 종로 거리로 끌려가야만이 비장미(悲壯美)가 감도는

멋이 풍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고등계 형사 앞에서도 그는 꿀리지 않았다.

그다지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것도 없었지만 독립 투사의 기개를 가져야 한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고등계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가를 미처 몰랐던 만용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당당히 주장했던 것이다.

“제가 싸움의 주모자라니 말도 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쇼.

길을 지나가다가 어린애가 쓰러져 있으면 어느 사람이 그냥 보고 그대로 지나갑니까?

학생들이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데 누가 모른 체하고 지나간단 말입니까?

나도 인정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냥 지나갈 수가 없었던 것뿐입니다.

나는 학생도 아니고 배우지도 못한, 그저 우미관의 매점원에 지나지 않습니다.

궁지에 몰린 사람을 도와준 것이 죄가 됩니까?

칼을 뽑아들고 싸우는 것을 말린 것도 죄가 됩니까?”

그의 목소리는 크고 우렁찼다.

정말 배우지를 못해 무식하기는 했지만,

그는 원래 청산유수와 같은 입담은 있었다.

형사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도 그럴듯했다.

칼로 찌른 자가 일본 학생이고, 찔린 자가 조선 학생인 것이다.

게다가 김두한에게 당했다는 자가 중등부 유도 선수권자인 오찌아이가 아닌가.

일본인 입장에서 보더라도 창피해서 그냥 덮어버리고 싶었다.

학생과 학생들 사이의 편싸움에 일개 극장 매점원이 주모자라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았다.

게다가 무슨 기미를 알아차렸는지 신문 기자까지 꾸역꾸역 모여들어 기웃거리고 있었다.

고작 극장 매점원 하나를 잡아들여 사건을 확대시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가 보다.

김두한은 그날로 석방되었다.

경찰 고등계를 무서운 곳으로만 알았더니

의외로 이야기가 통하는 관대한 일면도 있구나 싶었다.

그는 정말 의기양양해서 우미관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 의리 있는 쓸 만한 사나이,

잇뽕에 대해 실로 놀랄 만한 소문이 학생패 사이에 퍼지고 있었다.

김두한이 독립 투사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그것이었다.

백야 김좌진 장군(白冶 金佐鎭 將軍).

충남 홍성의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명문 거족 출신인 그는

1905년 17세의 나이로 상경한 이후,

청년 시절부터 독립 투쟁을 해온 애국 지사였다.

1915년, 비밀 결사 조직체인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에 가담,

서울 돈의동의 거부 김종근(金鍾根)으로부터 독립 자금을 강탈하려다가 실패해

3년 동안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3년의 옥고 끝에 1917년에 출감한 후,

다시 일본군에 쫓겨 만주로 망명,

1930년 1월 24일,

고려공산당청년회(高麗共産黨靑年會)의 김일성(金一星)·박상실(朴相實)의 저격으로

최후를 맞게 될 때까지 한결같이 항일 투쟁을 해왔다.

특히 1919년 4월 상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된 후, 서북 간도를 위시한

남북 만주와 연해주에서 무장 독립군을 조직하여 그 진두에서 지휘한 총사령이었다.

1920년 10월, 청산리(靑山里)에서의 싸움에서는 일본군 3300명을 섬멸한 명장으로서

국내에서도 그의 용명은 하나의 신화적인 존재로 쉬쉬하는 가운데 퍼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학생패들이 김좌진 장군을 알 까닭도 없었고 ‘청산리 대첩’을 알 수도 없었다.

장군이 이미 고인이 되어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학생패들은

그저 ‘독립 투사’·‘장군’의 두 마디만 듣고도 깜박 기가 죽었다.

비록 주먹패라고는 하지만 이들 또한 그만큼 민족 의식이 강했고

독립 투사에 대한 무조건적인 숭앙이 있었던 것이다.

이 김좌진 장군의 부인이며 김두한의 호적상의 어머니인 오씨 부인(吳氏婦人)이

삼청동(三淸洞)에서 살고 있었다.

김두한의 생모인 박씨 부인(朴氏婦人)은 그의 나이 여덟 살에 세상을 떠났다.

김두한은 아버지 김좌진 장군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고,

오씨 부인이 아버지의 정부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오씨 부인이 생모가 아니어서 생모에 대한 그리운 정으로 고아처럼 자라면서도,

함께 살지도 않았고, 내왕을 하지도 않았다.

오씨 부인은 나이 열넷에 두 살 위인 장군과 고향인 홍성에서 결혼했다.

그러나 부인은 신혼의 단꿈은 물론 가정다운 가정을 가져본 일이 없었다.

신혼 초부터, 독립 운동 때문에 옥살이를 하는 남편의 뒷바라지만 했다.

또한 남편이 출감한 후 이내 만주로 망명을 했기 때문에 그후로는 그대로 청상과부였다.

부인의 슬하에는 자식도 하나 없었다.

그러나 독립 투사의 아내라는 긍지와 양반 가문의 법도를 지켜 지조를 잃지 않고 꿋꿋이 살아왔다.

김두한이 남편의 실자(實子)인 것을 부인도 물론 알고 있었고, 그러기에 호적에도 입적을 시켰다.

그러나 삯바느질로 어려운 살림을 이어가는 부인으로서는 겉돌기만 하는 김두한을

 데려다가 교육을 시킬 수도 없었고, 돌봐줄 수도 없었다.

그러던 김두한이 오씨 부인을 찾아가게 되었다.

이제 철이 든 것이다.

오씨 부인을 어머니로 깍듯이 모시기 시작한 것이다.

김두한은 우미관 매점원으로 겨우 벌어들이는 돈을 쪼개어 오씨 부인의 생활비로 보탰다.

오씨 부인을 어머니로 부르는 것은 물론 그 정성도 지극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게 된 것이 중동 출신의 권투 선수 오성환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김두한과 악동 시절을 함께 보냈기 때문에

그의 내력에 대해서는 훤히 알고 있었다.

김좌진 장군의 이름까지는 알고 있지 못했지만,

그가 독립 투사인 어떤 장군을 아버지로 두고 있다는 것을 들은 일이 있었다.

더구나 그는 오씨 부인과 먼 인척 관계에 있었다.

오씨 부인이 그에게 아주머니뻘이 되었다.

오씨 부인 댁을 자주 드나들지는 않았어도 음력 정월이 되면 아버지와 함께 반드시 세배를 갔다.

오성환의 머리가 커감에 따라 그는 오씨 부인이 김좌진 장군의 부인이며,

그 김좌진 장군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밖에 나가서 말하면 안 돼. 큰일난다…… 알았지?”

이런 다짐과 함께 아버지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였다.

그러나 이 엄청난 비밀을 혼자 알고 감춰두기에는 입이 간지러워 못 견딜 일이었다.

그는 마침 학생패의 보스 엄동욱과 단둘만이 있게 된 체육관에서 기어이 입을 열고 말았다.

“형님! 김좌진 장군이 누군지 알고 계세요?”

두 사람 이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주위를 살피고 목소리를 죽였다.

무서운 것 모르는 엄동욱도 덩달아 주위를 살폈다.

엄동욱을 위시한 머리 큰 학생패들은 김좌진뿐만 아니라 ‘김구’니 ‘이승만’이니

‘임시 정부’ 등등의 낱말을 들어 알고 있었다.

이런 낱말을 입에 담기만 해도, 자신들이 어떤 혁명적인 거사에 직접적으로

가담하고 있는 것 같은 긴장을 느꼈다.

“네가 어떻게 김좌진 장군을 알지?”

엄동욱이 되물었다.

(역시 보스는 김좌진 장군을 알고 있구나!)

오성환은 속으로 감탄을 했다.

“그런데 말예요, 형님!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란 것도 아세요?”

“응, 그런 말을 듣긴 들었어. 긴가민가하고는 있었지만…….”

오성환은 자기만 알고 있는 비밀인 줄 알았더니,

엄동욱이 먼저 알고 있는 것에 김이 새는 기분이었다.

뭔가 엄동욱이 모르는 얘기를 터뜨려 그를 놀라게 해주고 싶었다.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인 것이 틀림없단 말예요.”

“네가 어떻게 알아?”

“김두한이 그렇게 힘이 좋은 것도 아버지를 닮아서 그렇단 거예요.

김좌진 장군이 얼마나 장사였는지 아세요?”

“어떻게?”

“말술에 갈비 한 짝과 염통을 한꺼번에 먹어치우는 대식가였구요,

광복단 사건으로 체포되었을 때 한번 힘을 주니까

묶은 포승이 썩은 새끼처럼 끊어져 버렸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