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5회 살수대첩(薩水大捷) 30

오늘의 쉼터 2014. 8. 20. 21:41

제15회 살수대첩(薩水大捷) 30

 

 

 

 건무왕은 대원왕에게 후사가 없는 것을 알고 일찍부터 자신이 보위에 오를 날을 부단히 기다리며

준비해온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동복 아우 대양(大陽)이 있었지만 심약하고 고분고분한 대양은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따라서 대원왕이 죽고 나면 왕위는 자연히 그의 몫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모쪼록 조정의 북벌파와 화합하고 남방으로 나제 양국과 화친하여 지내라는

선왕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보위에 오르자마자 남진파 일색으로 대신들을 중용하였다.

이에 따라 자신의 책사인 사본은 하루아침에 대로 벼슬에서 대형이 되었고,

동복 누이 예원과 혼인한 동부 욕살 고명화와 소형 맹진에게는 각각 내평과 외평을 맡겨

내외 국사를 분담시켰으며, 서부 욕살 연태조가 맡고 있던 막리지는 그가 나이가 많고

임기가 다 됐다는 이유로 중부 욕살이자 외평직에 있던 시명개로 바꾸었다.

내평 금태는 태대형으로 벼슬을 올리고, 자신의 아우 대양을 중외대부로 삼았으며,

솔천수와 고유림으로 병부의 요직을 맡게 하고 그밖에도 대로 이상의 중신들은 빠짐없이

남진파들로만 채워넣었다.

아울러 자신의 아들인 환권(高桓權)을 세자로 삼아 후사까지 분명히 하였다.

나라의 공을 논하기로 들면 을지문덕을 따를 자가 없었다.

그런데 왕은 유독 을지문덕에 대해서만 여러 날이 지나도록 어떤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자 남진파 일색이던 조정의 내부에서조차 이 문제로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 고구려의 백성들치고 을지문덕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는 이가 없었다.

둘만 모이면 어디서건 을지문덕의 무용담으로 온 나라가 통째 떠들썩할 정도였다.

그는 나라의 영웅이었고 만백성의 자랑거리였다.

백성들은 을지문덕만한 영웅호걸이 현세에는 다시없을 거라고들 입을 모았다.

일각에서는 을지문덕을 국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일기도 했고, 건무가 맡아왔던

좌장군의 자리는 당연히 을지문덕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게 정설처럼 굳어져 있었다.

어쩌면 백성들은 거듭된 전쟁으로 지치고 고단한 삶을 을지문덕을 통해 이겨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들은 을지문덕을 이야기하며 허기를 잊었고, 우중문을 속여넘긴 일과 살수대첩의 신출귀몰한

무용담을 자랑하는 일로 세상 사는 시름을 달래곤 했다.

조정 중신들이 이같은 민심을 모를 턱이 없었다.

어전에서 제일 먼저 이 문제를 거론한 이는 노신 이명신이었다.

“이제 양광도 죽고 수나라도 망해 나라의 오랜 근심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논공을 하자면 우장군 을지문덕만한 이가 드물고 조정과 향당을 막론하고

그를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마땅히 을지문덕의 벼슬과 관작을 높이고 큰 상을 내리셔야 옳을 줄 압니다.”

이명신의 뒤를 이어 막리지 시명개와 외평 맹진도 차례로 같은 말을 했다.

심지어 늘 을지문덕을 탐탁찮게 여겼던 대형 사본까지도,

“그러하옵니다. 적군을 물리치고 대공을 세운 자에게 벼슬을 높여주고 상을 내리는 것은

 만고의 이치이오니 가납하소서.”

하고 거들었다.

 

그러나 왕은 시종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이제 막 즉위한 왕으로선 만백성의 사랑과 중신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을지문덕이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남다른 야심을 가지고 북진파를 상대로 싸워온 인물이었다.

대체로 후덕한 인품과는 거리가 있었고 조정의 북진파를 탄핵하는 일에 앞장서온 전력 때문에

아무래도 선왕보다는 지지 기반이 허약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 그 자신의 생각이 그러했다. 수나라의 침략을 받아 나라가 전란에 휩싸였을 때부터

명분을 잃은 남진론과 그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한 자신의 위상을 그는 스스로 깨닫고

또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을지문덕의 공을 인정한다는 것은 거꾸로 자신의 오판과 허물을 고스란히 자인하는 것이며,

만일 을지문덕의 벼슬을 높여 도성으로 데려온다면 그를 중심으로 북진파가 일정한 세력을

구축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왕은 암만해도 나라의 영웅인 을지문덕을 도성에 데려다놓을 자신이 없었다.

더구나 전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면 모르되,

수나라가 망한 북방에서는 당분간 외침을 걱정할 이유도 없었다.

그는 차제에 오히려 명분을 잃은 북화남벌론을 다시 일으켜 그것으로 자신의 빈약한 권위를

 칼날처럼 세우고자 했다.

그렇게 하기에는 양국 조정에 나란히 새로운 왕실이 들어선 이때가 더 없는 적기일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