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살수대첩(薩水大捷) 29
수나라는 문제와 양제 양대를 거치며 네 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모두 패하였고,
이것이 한때 맹위를 떨치며 거세게 일어나던 수제국(隋帝國)을 단명의 역사로 마감하게 만든
근원이었음은 다시 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다.
중국에서 양광이 죽고 당나라가 들어선 바로 그해(618년) 9월, 고구려 장안성에서도 국상이 났다.
대원왕이 나이가 들어 붕어한 것이다.
그는 평강왕의 장자로 태어나 수제국이 남북조를 아우르고 거세게 팽창하던 시기에 보위에 올랐고,
이후 네 번에 걸친 수나라 침략은 모두 그의 재위 기간 중에 일어났던 국변이었다.
태자로 보낸 세월이 스물다섯 해요,
왕위에 올라 다시 스물아홉 해를 더하여 무려 오십수 년을 궁에서 보냈으나
안으로는 조정 양론에 휩싸여 갈등을 겪었으며, 밖으로는 백제, 신라, 수나라와
차례로 대전을 치르느라 하루도 편한 날을 얻지 못한 고단하고 불운했던 임금이었다.
평소 왕은 세상을 잘 다스려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제왕의 첫째 덕목으로 믿어
늘 이의 실현을 꿈꾸었지만 내우외환에 시달려 오히려 국력은 소진되었고,
백성들의 살림은 전대에 견주어 크게 궁핍해졌다.
왕은 말년에 늘 이것을 마음 아파하여,
“사람의 일과 하늘의 뜻은 어찌 이리도 다르단 말이냐……”
하며 홀로 탄식하곤 했다.
특히 수나라 양광과는 하늘에서 낸 숙적(宿敵)이요,
천적(天敵)이었는데, 수나라가 망하고 양광마저 죽었으면 편히 몇 해를 지내도 좋으련만,
누적된 긴장이 갑자기 풀어진 탓이었을까,
양광이 죽고 반년 만에 뒤따라 붕어하니 왕의 운명을 돌아보면 자못 기구한 면이 없지 않았다.
대원왕은 붕어하기 며칠 전 자신의 천수가 다한 것을 알고 몇몇 신하들을 불러 말하기를,
“내게로 대를 이을 적자가 없고 나라를 믿고 맡길 만한 이는 오직 좌장군 건무밖에 없으니
만일 내가 눈을 감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거든 경들은 당황하지 말고 건무를 받들어
이전의 나를 섬기듯 하라.”
유언하고 또 은밀히 이복 아우 건무를 불러서는,
“내 뒤를 이어 사직을 맡길 사람으로는 오직 네가 있을 뿐이다.
자고로 나랏일을 돌보매 조정의 중론이 한결같지 않고 사람마다 이견이 분분할 때는
어느 한 편을 일방으로 편들거나 또는 어느 한 편만을 일방으로 탄압하는 것은 제왕의 도리가 아니다.
나는 수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 가서 근심은 덜었지만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자니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일은 남는다.
젊은 선비 단귀유와 도학자 주괴를 죽인 일이 그 중의 하나로, 이는 내가 지금만 같았어도
하지 않았을 일이다.
비록 북방에는 금수와 같은 수나라가 망하였으나 새로 들어선 당나라에 어찌 양광과 같은 자가
없다고만 할 것인가?
내가 오랜 세월에 걸쳐 중신들을 겪어보니 사람이 곧기로는 고추대가 이명신만한 이가 없고,
5부 욕살들을 통솔하기로는 막리지 연태조만한 이가 없으며, 고창개(高猖芥)와 고정의(高正義)는
모두 믿을 만한 사람들이다.
게다가 나라의 간성(干城)으로 을지문덕과 같은 명장이 있으니
너는 이들과 잘 의논하여 오랜 전쟁으로 소진한 국력을 다시 일으키고 고단한 백성들을 극진히 보살피라. 전에 죽은 귀유가 남으로 나제(羅濟)와 화친하여 지낼 것을 말하였는데,
지내며 생각하니 그 말한 바가 구구절절이 맞는 말이다.
근자 내 꿈에 귀유가 자주 나타나 양광에게 당한 감회를 묻곤 하거니와, 죽어 저승에 가서
그를 만나면 고개를 숙여 사죄할 것이다.”
하며 간곡한 소리로 뒷일을 당부하였다.
대원왕이 이름까지 거명하며 잘 지내라고 부탁한 사람들은 이명신을 제외하면 하나같이
남화북벌을 주장하던 사람들이라,
이는 건무가 남진파의 우두머리임이 끝내 마음에 걸려 한 말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왕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잠자리에 들었다가 뒷날 일어나지 못하니
고구려땅에 살던 사람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비록 국력은 쇠하였고 살기는 어려웠지만 고구려 백성들은 그것이 왕의 탓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왕은 수차례에 걸친 양광의 입조 요구를 단호히 물리치고 드디어는 을지문덕과 같은
명장을 발탁하여 방약무도한 수제국을 몰락시켰으므로 백성들은 궁핍한 중에도 조정에 대한
믿음과 뿌듯한 자긍심만은 간직할 수 있었다.
그런 대왕이 세상을 버렸으니 백성들의 마음은 마치 어버이를 잃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맨발로 달려나와 땅을 치며 통곡하는 자들이 부지기수요,
장안성 대궐 앞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애도 인파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대신들은 붕어한 대원왕의 시호를 영양왕(창陽王)이라 하고 도성 북산에 성대히 장사지낸 뒤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좌장군 건무를 옹립하니
그가 곧 고구려의 27번째 임금 건무왕(建武王:영류왕)이다.
왕은 평강왕이 후비의 몸에서 본 왕자로 선왕의 이복 아우인데,
무예가 뛰어나고 지략이 있어 오랫동안 나라의 장군으로 복무하였다.
선왕이 재위 29년째 되던 해에 돌아가시자 뒤를 이어 즉위하니
이때가 무인년(618년) 9월, 수제국이 망하고 당제국이 들어서던 해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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