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4장 신성(新城)함락 34 회

오늘의 쉼터 2014. 8. 9. 20:43

제14신성(新城)함락 34

 

 

 내호아 일행이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불에 탄 빈 절 부근에 이르렀을 때였다.

돌연 한 패의 기병이 함성을 지르며 나타나 패주하는 내호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내호아가 보니 앞선 장수는 해포에서 만났던 바로 그 장수였다.

“수장은 들으라! 고구려의 좌장군 건무가 이곳에서 너의 목을 취하려고 기다린 지 이미 오래다!”

건무라는 이름을 들은 내호아는 일순 반가움과 놀라움이 뒤섞인 묘한 표정을 지었다.

수나라의 백관치고 북화파의 수장인 건무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건무라면 대원왕의 아우인 고건무 장군이 아니오?

내 서경에서 듣기로 귀공은 늘 우리 수나라를 따르고 황제를 섬기는 마음이 태산과 같다고 하였는데

섬기는 나라의 장수를 반갑게 맞이하기는커녕 어찌하여 군사를 끌고 나와 죽이려 하시오?”

내호아가 다급한 마음을 억누르며 점잖게 묻자 건무는 껄껄 목소리를 높여 웃었다.

“내가 수나라를 섬기려는 마음은 평시의 일이요,

지금은 창칼을 마주하고 싸우는 전시가 아니던가?

고구려의 개도 너희를 보면 이를 드러내고 짖는 마당에

내 어찌 간악한 침략의 무리를 용납할 수 있겠는가!”

그리곤 내처 칼자루를 고쳐 잡으며,

“너는 잔소리 말고 목을 내놓아라!”

하고 맹렬히 내호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내호아는 사력을 다해 이를 막았지만 그는 본래 건무의 상대가 아니었다.

채 5합을 겨루지 못하고 부장들이 합세하는 틈을 보아 옆길로 달아났다.

쫓기는 수군 패잔병들의 눈에는 외성 길목을 지키는 기백의 복병들도 수천의 군사나 다름없이 비쳤다.

가까스로 화살을 피해 도망 온 자들은 그곳에서 다시 건무가 이끄는 마군들의 창칼에 수도 없이

목숨을 잃었다.

성안은 수군 시체들로 가득 차서 길이 없었고, 빈 절의 마당에서 성문에 이르는 넓은 공터에도

포개져 쌓인 시신이 산더미와 같았다.

대패한 내호아는 겨우 죽음을 면하고 패주하여 주법상이 기다리는 해포에 이르렀는데

3만에 가까운 군사 가운데 살아 돌아온 자는 불과 3천 명 남짓이었다.

“장군의 성급함이 결국은 일을 망치는구려.

내 어찌 당신 같은 이를 따라왔던가!

아아, 이제 무슨 낯으로 황제 폐하를 뵙는단 말이오?”

땀에 흠뻑 젖어 영락없이 물에 빠진 새앙쥐 꼴로 나타난 내호아를 보자

주법상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내호아로선 입이 열이라도 할말이 없었다.

“운수가 사나워 그리 되었네.

싸움터에서 이기고 지는 것이야 매양 있는 일이라고 자네가 그러지 않았나?”

그는 궁색한 변명에 이어 아직도 채 두려움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잘잘못을 논할 계제가 아님세.

얼만지도 모르는 자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쫓아오고 있으니 시급히 대책을 세워야 하네!”

이에 주법상은 해포에 남은 군사와 살아 돌아온 잔병들을 수습하여 진영을 정비하는 한편

정박한 배들을 손보아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출항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외성에서 적군을 크게 물리친 건무는 2천의 보기병을 이끌고 잔적을 추격하여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해포 기슭에 이르렀다.

그는 수군이 짜놓은 진의 형세가 제법 짜임새가 있고, 낮에 보았을 때와 달리 정박한 배들이

서로 떨어져 뱃머리가 바다 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보자 적진에 또 다른 장수가 있음을 알았다.

“저들은 가만히 두어도 곧 돌아갈 것이다.

궁지에 몰린 적을 쳐서 귀중한 우리 군사를 하나라도 다치게 할 까닭이 없다.

게다가 보아하니 비록 잔적들이라곤 하지만 지금의 우리 군사를 모두 합친 것보다 오히려 많구나.

차라리 몸을 숨겨 대치하면서 적들이 스스로 물러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현명하겠다.”

건무의 말에 고유림과 솔천수는 애석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적들은 혼비백산하여 경황이 없을 것입니다.

거기 비하면 우리 군사들의 사기는 가히 하늘을 찌르고 땅을 가를 듯합니다.

이긴 여세를 몰아 질풍노도와 같이 몰아친다면 나머지 잔병들도 모조리 고기밥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두 장수의 한결같은 말에 건무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적들은 경황이 없어 우리의 군사가 얼마인 줄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다.

본래 오르지 못한 산은 더 높아 보이고 건너지 못한 물은 더 깊어 보이게 마련이다.

저들은 좀 전에 3만의 군사로도 패하였기 때문에 십상팔구는 우리 숫자가 그보다 많으리라

여길 게 분명하다.

나가지 않으면 두려워할 것이요,

나가면 얕볼 것이니 굳이 나가서 얕보는 마음을 갖게 할 까닭이 있는가?

더욱이 저들은 먹을 것마저 없으니 길어야 사나흘 이상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건무는 두 장수에게 지시했다.

“너희는 각기 5백의 군사를 거느리고 해안의 기슭을 따라 횡렬로 늘어서서

수시로 북을 치고 깃발을 높이 올리며 함성을 질러라.

밥 때가 되면 사람마다 나뭇가지를 꺾어 연기를 피우고,

강물에 먹고 난 밥그릇을 부시되 되도록 많은 밥알이 물로 흘러가도록 하라.

그렇게만 한다면 적들은 사흘 안에 저절로 배를 타고 해포를 떠날 것이다.”

명령을 내린 뒤 그는 나머지 군사를 모두 데리고 도성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