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신성(新城)함락 33 회
“급할 것이 하나도 없다. 제군들은 대국의 위엄을 갖추어 천천히 진군하라!”
수군들은 뒤늦게 출발한 자신들이 고구려의 도성을 일차로 장악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우쭐하여 지나친 자만심에 빠지게 되었다.
도망간 복병들을 따라 빈 절의 동쪽으로 나서자 비로소 고구려의 민가가 그 한적하고
고즈넉한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나라는 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지만 백성들이 살아가는 민가의 풍경은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한가롭고 평화롭게만 보였다.
때는 마침 이른 저녁밥을 지을 무렵이었다. 옹기종기 둘러앉은 민가의 굴뚝에선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고 구수한 밥 냄새가 천지를 진동했다.
그러잖아도 배를 타고 오는 내내 제대로 먹지 못한 수군들은 밥 짓는 냄새를 맡자
그만 눈알이 뒤집혔다.
앞서 가던 보졸들은 명령도 받지 않고 길가의 아무 민가로나 뛰어들어
미처 익지 않은 밥을 솥단지째 들고 나왔다.
이를 본 중군에서도 가만히 있을 턱이 없었다.
1만여 명에 달하는 군사들이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지며 저마다 먹을 것을 찾느라
눈알이 시뻘개서 설쳐댔다.
제일 늦게 당도한 후군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동료들이 배불리 먹고 있는 것을 보자 한순간에 그만 이성을 잃고 말았다.
이내 대오를 이탈하여 동료들의 차고앉은 것을 빼앗으려 드니
뺏으려는 자와 뺏기지 않으려는 자들이 뒤엉켜 쫓고 쫓기는 일대 혼전이 벌어졌다.
약탈을 당한 민가에서는 집집마다 아이가 울고 개가 짖어 사방은 일시에 아비규환을 방불케 했다.
내호아는 장수들을 이끌고 대오를 이탈하지 말라며 호통을 쳐댔지만 먹을 것을 본 주린 군사들에게
그 호통이 통할 리 없었다.
이미 오와 열은 뒤죽박죽이 되었고, 진은 형체도 없이 무너졌다.
심지어 일부 장수들마저도 노략질의 틈에 가세해 부하들로부터 먹을 것을 빼앗아 손에 감추거나
주둥이를 우물거리곤 했다.
한 장수가 내호아에게,
“나무랄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이곳에서 허기진 군사들의 배를 채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건의했다.
내호아가 가만 생각하니 그런다고 해서 크게 낭패날 일도 없을 법했다.
“기왕 일이 이렇게 된 것을 어찌하겠는가.
앞으로도 먹을 기회는 많을 것이지만 음식을 입에 댔으니 모두들 실컷 배불리 먹도록 하라!”
총관의 허락까지 떨어지자 수군들의 약탈과 노략질은 가히 거칠 것이 없었다.
후군들은 집집마다 쑤석거리며 물로 씻은 듯이 부엌살림을 거덜내고,
짖는 개를 때려잡고, 날콩과 씨앗까지 주머니에 챙겨 넣느라 정신이 없었고,
어느 정도 배를 불린 선군과 중군들은 포만감에 못 이겨 길가에 드러눕거나
민가의 여인네들 엉덩이를 보며 눈알을 번뜩이고 흰수작을 걸곤 했다.
한창 그럴 무렵이었다.
“양광의 주구들은 들으라!
우리가 어찌 너희들의 만행을 용납하겠는가?
방금 전에 너희가 다투어 처먹은 음식은 실은 너희를 데려갈 염라부의 사잣밥이다!”
홀연 민가의 사방 둔덕에서 수많은 말과 사람의 머리가 나타나더니
그 가운데 한 장수가 마상에서 칼을 휘두르며 땅이 우렁우렁 울리도록 큰 소리를 질렀다.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던 수군들이 혼비백산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주몽의 후예인 우리가 근본도 알 바 없는 중국의 오랑캐들을
당하지 못할 까닭이 없다!
제군들은 저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주살하여 고구려인의 우뚝한 기상을 분명히 보여주도록 하라!”
말을 마친 장수가 높이 쳐든 칼을 내리며 신호하니
사방팔방에서 장창과 맥궁으로 무장한 기병들이 달려 나오고 대궁을 든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아댔다.
수군들은 미처 피하기도 전에 장창과 화살촉에 찔려 수백 명이 단번에 죽어갔다.
특히 수군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기병들이 말을 타고 달리며 짐승을 사냥하듯 쏘아대는 맥궁이었다.
보기에는 활도 작고 살도 작아서 별것이 아닌 것 같았지만 정작은 그게 아니었다.
등을 맞으면 살촉이 가슴으로 튀어나오고, 머리를 맞으면 턱이 뚫렸으며,
말과 사람을 함께 관통시켜 인마를 동시에 땅에 눕히기도 했다.
화살은 그 빠르기가 번갯불과 같은데 몸을 피하는 수군들의 움직임은 바위보다 둔하고
거북이보다 느렸다.
그나마 도망이라도 치는 자는 다행이요,
얼마나 먹어댔던지 날아오는 살을 눈으로 뻔히 보면서도 피하지 못하는 자가 태반이었다.
대오를 이탈하고 진을 무너뜨린 수군은 그 숫자가 3만이 아니라 30만이라 하더라도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내호아는 자신이 살기에도 바빠 군사를 추스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는 몇몇 부장들과 함께 말배를 멍이 들 정도로 걷어차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신없이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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