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4장 신성(新城)함락 20 회

오늘의 쉼터 2014. 8. 3. 16:00

 

제14신성(新城)함락 20

 

 

““이제 장수는 너 하나가 남았구나.”

문덕은 달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린 채로 약간 가쁘게 숨을 쉬며 상기를 노려보았다.

 

얼마나 재빠르고 귀신같은 솜씨였으면 그토록 수많은 자를 베어 넘어뜨리고도

 

흰 저고리에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상기는 온몸이 얼어붙어 대꾸조차 할 수가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졸개들은 줄행랑을 치고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번에도 들고 있던 철퇴 한번 변변히 써보지 못한 채 말머리를 돌려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우중문의 진채로 돌아온 상기는 을지문덕을 잡아오지 못한 자신의 허물을 되도록 감추느라

 

입에 침이 마르도록 문덕의 무예를 칭찬했다.

“그를 상대하여 어느 누구도 단 1합을 넘기지 못하였습니다.

 

장흔도, 곽사천도, 문태도 모두 단칼에 베임을 당하고 죽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광석화와도 같이 말을 달리며 흡사 우리 군사 사이를 무인지경을 지나듯

 

거침없이 가로질렀는데, 나중에 헤아려보니 그때 죽은 아군이 스무 명도 넘었습니다.

 

그러고도 을지문덕은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아니하였고,

 

옷에 피 한 방울 묻은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당최 뉘라서 그를 상대하오리까?

 

 1백이 아니라 1천의 군사를 내었어도 필경은 그를 붙잡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신출귀몰이란 바로 을지문덕과 같은 자를 두고 하는 말이올시다.”

그러잖아도 부아가 머리끝까지 치민 판국에 적장을 지나치게 찬양하는 상기의 말을 듣자

 

우중문은 분기가 탱천하여 눈알이 다 튀어나올 것 같았다.

“장흔도 문태도 곽사천도 모두 목숨을 바쳐 충절을 지켰거늘

 

어찌하여 너만 대가리를 설레설레 흔들고 살아 돌아와서 하찮은 주둥이를 종작없이 나불거리는가?”

상기는 그제야 자신의 말이 과했음을 알고 뜨끔하여 입을 다물었다.

 

우중문이 노여움에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그런 상기를 노려보다가 돌연,

“여봐라! 입만 살아서 돌아온 저놈을 당장 데려다가 혀를 뽑고 눈알을 도려낸 뒤에

 

제가 가지고 다니던 철퇴로 내리쳐 죽이고 그 시신은 아무데나 던져 날짐승의 밥이 되도록 하라!”

하고 벼락같이 고함을 내질렀다.

 

시립한 하리들이 차마 명을 받들기 난처하여 우왕좌왕 중문의 눈치를 살필 즈음에

 

우승 유사룡이 나서서 만류하기를,

“고정하시오, 장군.

 

상기의 말이 귀에 거슬리는 것은 사실이나 이는 저 혼자 생환한 것이

 

무참하여 지껄이는 소리이지 다른 뜻이야 있겠습니까.

 

또한 상기뿐 아니라 여러 병졸들의 말말이 하나로 일치하니

 

문덕의 무예가 저들로서 당하기 어려웠던 것은 분명한 듯싶소이다.”

하고서,

“본래 문덕을 놓아주자고 주장했던 사람은 나요,

 

내가 들어 장군이 아끼던 부하 장수들을 죽게 했으니

 

우정 누군가를 죽여 분풀이를 하자면 나를 죽이시오.

 

화근이 내게서 비롯된 것임을 낸들 어찌 모르겠소.”

하며 죄를 자청하였다.

 

우중문은 유사룡에게 일말의 원심을 품고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말하는 사람을 탓할 마음은 없었다.

 

본래 두 사람은 대흥에 있을 때부터 각별한 교분을 쌓아온 데다,

 

항차 묘저를 잃은 고적함을 헤아리고 수고로움을 무릅써가며 황제에게 간하여

 

그 애첩까지 얻어온 유사룡을 우중문으로선 어떤 경우에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곧 안색을 부드럽게 하여 말하기를,

“죄를 논하자면 음흉한 감언이설로 속인 자에게 있지 어찌 속은 사람을 탓하겠소.

 

게다가 우승께서야 언제나 나의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시는 분이 아닙니까?

 

이번 일도 그래서 비롯된 일임을 모르지 않은 터에 설혹 결과가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한들

 

어떻게 우승을 원망하겠습니까?

 

우리를 속이고 도망간 을지문덕 따위야 실은 독 안에 든 쥐올시다.

 

군사를 풀어 다시 잡으면 되는 것이니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짐짓 너그러운 말로 유사룡을 위로하였다.

 

뒤이어 우중문은 고개를 돌려 상기를 엄하게 꾸짖은 다음에,

“앞으로 네게 을지문덕을 상대할 기회가 반드시 다시 올 것이니

 

그때는 공을 세워 부디 오늘의 죄를 경감토록 하라!”

장공속죄할 것을 명하니 상기는 눈물을 흘리며,

“대장군의 명을 받들어 용서하여 주신 은혜를 기필코 갚겠습니다!”

하고 맹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