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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 19장 인연 [11]

오늘의 쉼터 2014. 7. 30. 23:21

<207> 19장 인연 [11]

 

 

(409) 19장 인연 <21> 

 

 

 

갑자기 떠오른 것이다.

마치 머릿속 기억 창고의 문이 열린 것처럼 지난일들이 펼쳐졌다.

“이제 생각이 나신 모양이죠?”

여사장이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하긴 오래전이죠. 15년도 더 되었을 테니까요.”

서동수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유병선과 최성갑도 따라 일어섰다.

“아니, 19년이야. 내가 스물여섯 살 때였으니까요.”

그런 계산도 못하느냐는 듯이 서동수가 나무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유, 앉으세요.”

여사장이 정색하고 말했으므로 서동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시선은 떼지 않는다.

“진윤화 씨, 외국에 나갔다고 들었는데 여기서 만나다니요.”

“그렇게 되었네요.”

진윤화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저기, 이야기는 나중에, 식사 준비할게요.”

상기된 표정으로 진윤화가 방을 나가자 서동수는 길게 숨을 뱉었다.

옆에 앉은 유병선과 최성갑은 외면한 채 딴전을 피우고 있다.

누구냐고 물어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때 서동수가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내 대학 때 첫사랑이야.”

둘은 여전히 외면한 채 숨을 죽였고 서동수가 말을 이었다.

“내가 보기 좋게 차였지. 아주 참담한 추억이었어.”

그러나 서동수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으므로 유병선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둘의 긴장을 풀어 주려는 듯 서동수가 방 안을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식당이 꽤 고급이군, 종업원도 많은 것 같지?”

“예, 그렇습니다.”

유병선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물잔을 쥔 서동수의 눈동자 초점이 흐려졌다.

진윤화를 만났을 때 서동수는 복학한 대학 3학년으로 별 볼일이 없는 인생이었다.

급수를 따지면 3류대학 출신으로 잘해야 기업체 사원이 되어 천신만고하면서

인생을 살아갈 운명인 것이다.

눈앞의 생활에 급급해서 꿈을 꿀 여유가 없었고 서동수가 알기로는 대부분의 동기생이 다 그랬다.

그렇다고 집안에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시골에서 어머니와 형이 농사짓는 집안이다.

반면에 진윤화는 1류로 치는 명문대 영문과 졸업반이었다.

더구나 용모가 빼어났고 조신해서 누구에게나 이상형이었다.

조신하다는 의미는 제 얼굴과 몸매값을 한답시고 이리저리 날뛰지 않는다는 것이다.

친구 소개로 진윤화를 만난 순간부터 서동수는 빠져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친구놈도 제가 안 되니까 서동수에게 인계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서동수도 세 번을 만나고 나서 진윤화를 내놓아야 했다.

세 번 만난 것만 해도 서동수에게는 영예였고 오랫동안 좋은 추억으로 남았던 것이다.

이윽고 눈동자의 초점을 잡은 서동수가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그것 참, 내가 진윤화를 금방 알아보지 못하다니, 생각할수록 기가 막히네.”

유병선과 최성갑은 숨을 죽였고 서동수의 혼잣말이 이어졌다.

“저 여자한테 차이고 3년 후에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내가 울었는데.”

“…….”

“분하고 서러워서 말이야.”

“…….”

“신랑이 미국 박사에 재벌가 아들이라고 하던데 어떻게 된 거야?”

그때 문이 열리더니 음식이 들어왔다.


 

 

 

(410) 19장 인연 <22> 

 

 

 

김치찌개와 된장찌개, 갈비구이까지 시킨 식탁은 풍성했고 음식도 좋았다.

그래서, 소주까지 곁들여 저녁을 마쳤을 때는 9시가 되어 있었다.

“사장한테 잠깐 내가 보잔다고 전하게.”

물 잔을 든 서동수가 말하자 유병선이 서둘러 일어섰다.

진윤화는 저녁을 먹는 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유병선이 돌아왔을 때는 5분도 되지 않았다.

“사장님이 1번 방에서 기다리시겠답니다.”

유병선의 말에 서동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왔다.

1번 방은 복도 끝 방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전윤화가 웃음 띤 얼굴로 맞는다.

“맛있게 드셨어요?”

“맛있던데.”

진윤화는 세 살 연하다.

만난 시간은 아주 짧았지만 서동수의 가슴에 가장 깊게 흔적을 남긴 여자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처음에는 그것이 상처였지만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보니까 그림 같은 흔적이 되었다.

깊고 옅으며 선명하고 흐려진 흔적들이 남겨지면서 늙는 것이다.

원탁에 둘이서 마주앉았을 때 서동수가 물었다.

“자, 남편 이야기 좀 할까?”

“이혼했어요.”

“역시 그렇군.”

대뜸 그렇게 받았더니 진윤화의 눈썹이 좁혀졌다.

낯익은 표정이다.

“역시라뇨?”

“보이지 않아서 그렇게 짐작했어. 언제 이혼했는데?”

“10년쯤 되었네요.”

진윤화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떠올랐다.

“서동수 씨가 영웅캠프에 나왔을 때 알아보았어요.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그런가? 그 전에도 매스컴엔 좀 나왔었는데.”

“여긴 라고스잖아요? 녹화 필름으로 보았죠. 정말 반가웠어요.”

“난 진윤화 씨가 결혼했다는 말을 듣고 울었어.”

“아유, 거짓말.”

진윤화의 얼굴이 갑자기 빨개졌다.

“장난하지 말아요, 속상하게.”

“내가 진짜 좋아했는데, 내 첫사랑이었어. 진윤화 씨가.”

“거짓말.”

“하지만 어쩔 수 없었지,

내세울 것이 없는 입장이라 억지로 밀고 들어갈 수는 없었으니까.”

이제 진윤화는 상기된 얼굴로 시선만 주었고 서동수의 말이 이어졌다.

“그때부터 진윤화 씨를 잊으려고 노력하는 한편으로 무의식중에

내가 내세울 것을 만들겠다는 의식이 자라고 있었던 것 같아.

그래서 짝사랑의 상처는 성장에 도움이 되는 모양이야.”

“…….”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지금 내 앞에 나타나 준 진윤화 씨가 말야,

가슴이 깨끗해진 느낌이 들어.”

“요즘 자주 서동수 씨 생각했는데 갑자기 나타나실 줄은 몰랐어요.”

진윤화가 심호흡을 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

이제는 시선을 내렸고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전 잘 안될 것 같네요,

서동수 씨는 빚을 청산한 느낌이 드시는 것 같지만 저는 어지럽혀진 것 같아요.”

“빚이 많아?”

그러자 진윤화가 눈을 흘겼다.

“누가 빚이 많대요?”

“참, 자식은?”

“없어요, 그래서 갈라서기 쉬웠죠.”

“그럼 우리 다시 연애 한 번 할까?”

마침내 서동수가 터뜨렸다.

이것이 서동수의 본색이다.

그때 진윤화가 다시 눈을 흘겼는데 요염했다.

20년 세월이 이렇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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