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19장 인연 [4]
(395) 19장 인연 <7>
한국산 승용차 ‘번개’가 그야말로 번개처럼 달려가고 있다.
오후 2시, 운전석에 앉은 서동수가 장치와 함께 영동고속도로를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서울을 떠난 지 한 시간쯤 되어 차는 방금 여주 휴게소를 지났다.
날씨는 화창했고 평일이라 길도 막히지 않는다.
백미러에 비서진과 경호원이 탄 차가 가끔 보였지만 신경 쓰이지는 않는다.
없는 듯이 경호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고 이제 이쪽도 부담을 받지 않는다.
“동쪽 끝까지 두 시간 반이면 닿는군요.”
지도를 보던 장치가 혼잣소리처럼 말했으므로 서동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가 뱉었다.
중국을 동서로 횡단하려면 사흘 가지고도 모자랄 것이다.
일일이 따지면 안된다. 자격지심, 열등의식의 발로다.
서동수가 가속기에서 발을 뗐다.
“그렇죠, 전에는 네 시간쯤 걸렸는데 새 고속도로를 개통해서.”
“갑자기 절 불러내신 이유라든가 동기가 있나요?”
슬쩍 화제를 바꾼 장치의 얼굴에 웃음기가 띠어져 있다.
아름답다. 선입견도 작용했겠지만 중국의 공주를 보는 것 같다.
품격이 있다. 서동수가 다시 가속기를 밟으면서 대답했다.
“어제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국무총리, 여당 대표까지 다 있었지요.”
장치는 앞쪽에 시선을 둔 채 잠자코 듣는다.
“특구에 전폭적인 지원을 하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밤에는 호텔에서 한국 제1의 대기업 광일그룹 박 회장을 만났지요.”
“…….”
“내가 장치 씨한테 전화를 한 것은 박 회장과의 면담이 끝난 후입니다. 들떠있었죠.”
“…….”
“장치 씨는 날 소개 받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그때 장치가 머리를 돌려 서동수를 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반짝였고 살구색 루주를 바른 입술이 반들거렸다.
“정략결혼 생각이 나더군요. 옛날 식으로 말하면 인질로 보내주는 공주랄까.”
장치가 입술 끝만 올리고 웃었다.
“하지만 서 회장님에 대해서는 호감이 갔습니다.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았어요.”
휴게소 안내판이 보였으므로 서동수가 차선을 바꿨다.
문막이다. 장치의 말이 이어졌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에게 이야기해주신 분은 전혀 중·한 관계라든지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남편감으로서의 서 회장님 소개만 해줬지요.”
“…….”
“하지만 주위에서는 그렇게 안보겠지요, 중·한 결합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서동수는 문막 휴게소 안으로 들어섰다.
차를 주차장 끝 쪽에 세운 서동수가 머리를 돌려 장치를 보았다.
“한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순간 장치가 이를 드러내고 소리 없이 웃었다.
“내가 배운 역사관이 우리 둘의 관계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요?”
말문이 막힌 서동수가 눈만 껌벅였을 때 장치가 손을 뻗어
아직 핸들 위에 있는 서동수의 손등을 덮었다.
“한국의 고구려 역사, 중국의 동북공정, 그런 것들 말이에요.”
장치의 손바닥은 따뜻했고 촉감이 부드러웠다.
서동수가 장치의 손등을 보았다.
모양이 좋았지만 힘이 느껴지는 손이다.
서동수의 시선을 받은 손가락이 별개의 생명체처럼 꿈틀거렸다.
그때 장치가 한 마디씩 분명하게 말했다.
“날 당신의 여자로 만들어 보세요.”
(396) 19장 인연 <8>
“아름답네요.”
베란다에서 바다를 보던 장치가 탄성과 함께 말을 이었다.
“바다가 불꽃축제를 하는 것 같아요.”
속초 앞바다에 오징어잡이 배가 서너 척 떠 있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오징어잡이 배를 100척 정도 전세 내어 바다에 띄울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서동수는 감동하고 있다.
오후 8시 반, 룸서비스로 저녁을 마치고 이제는 베란다에 술과 안주를 펼쳐놓은
둘이 밤바다를 보고 있다.
속초 근처의 한국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4시,
장치는 호텔방에 들어섰을 때도 전혀 어색해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방까지 갈 때는 서동수의 팔까지 끼었다.
스위트룸이어서 활동 공간이 넓었기 때문에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하는 데도 부담이 적었겠지만
룸서비스 주문은 장치가 다 할 정도였다.
지금 장치는 흰색 면바지에 옅은 하늘색 반팔 티셔츠를 걸쳤다. 의자에 등을 붙인 장치가
바다를 향한 채로 말했다.
“난 어렸을 때부터 정치인들의 얼굴을 익히면서 자랐죠.
정치인이란 당 고위층, 원로들을 말합니다.”
장치의 조부(祖父)는 부총리를 지냈고 부친은 산시성 서기였다.
이른바 태자당에 속한다.
서동수가 따라준 위스키 잔을 쥔 장치가 말을 이었다.
“날 귀여워해줬던 아저씨들이 지금도 도처에 널려 있죠.”
장치는 입을 다물었다. 결론은 서동수가 추리해보라는 표시였다.
서동수는 들고 있던 위스키를 한 모금에 삼켰다.
장치와 결합함으로써 서동수는 신분상승의 효과를 받을 것이었다.
장치의 인연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사며 사업이다.
인연을 이용하지 않는 사업은 없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음양이 있는 것이다.
“그 남자, 진짜 3분이었어요?”
불쑥 서동수가 묻자 장치는 눈웃음을 쳤다.
눈이 초승달 모양이 되었고 입술 끝이 위로 솟았다.
서동수가 다시 물었다.
“전화 받았을 때가 5분?”
그때 장치가 입을 딱 벌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맑고 분명한 소리, 베란다에 장치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우월감이 느껴져요?”
장치가 되물었으므로 서동수는 머리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 말씀을 듣고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어요.
나한테도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요.”
“겸손하시구먼.”
어깨를 부풀렸다가 내린 서동수가 지그시 장치를 바라보았다.
“실례지만 겪었던 남자들이 대부분 3분이었습니까?”
“대부분이라고 하시니 누가 들으면 수백 명인 줄 알겠네요.”
“실례. 그저 복수형이라고 해둡시다.”
“그래요.”
“뭐가 그렇다는 겁니까?”
“만난 남자들이…….”
“모두 3분?”
“글쎄 모두가 아니라…….”
“도대체 몇 명이신데?”
“말 못해요.”
했다가 장치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말을 이었다.
“일곱 명.”
서동수는 숨을 들이켰다.
다만 일곱 명이라니. 국보를 발견한 느낌이다.
그때 장치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아유, 싫어. 이런 이야기.”
대통령도 밥 먹을 때 씹는 소리를 내고 설사도 한다는 것을 잊을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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