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3장 요하(遼河) 27 회

오늘의 쉼터 2014. 7. 27. 10:20

제13장 요하(遼河) 27

 

 

배구가 변복하여 보낸 심복이 을지문덕을 찾아온 것은 그럴 무렵이었다.

문덕은 주위를 물리고 배구의 서찰을 받아 읽었다.

배구는 수군의 사정이 날로 나빠져서 군영마다 먹을 것이 동이 나고,

사기는 이미 오래전에 곤두박질을 쳐 수습하기 힘든 상황이며,

근자에는 요하를 건너 탈영하는 무리까지 생겨났음을 말하고서,

9군의 장수들이 육합성에 모여 황제에게 출병을 극간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자신의 참수를 주장하는 마당이라 더 이상 앞일을 장담할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

그는 양쪽이 창칼로써 교전하는 불상사를 막고 전날 언약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문덕이 항복한 7성의 성주들만이라도 거느리고 서둘러 투항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읽기를 마친 문덕은 속으로 회심의 웃음을 머금었지만 겉으로는 시름에 잠긴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배구의 심복을 후히 대접하고 말하기를,

“전날 황문시랑이 내게 두 달의 말미를 주었는데 아직 날짜도 되지 않아 이같이 재촉이 심하니

나로서도 되우 난감할 따름일세. 본래 대사를 도모하다 보면 자잘한 어려움이야

어느 쪽에나 있게 마련이 아닌가? 나 또한 적병을 앞에 보고도 군사를 내어 치지 않는다고

우리 조정의 의심과 탄핵을 받고 있는 몸일세.

그 바람에 평양의 우리 임금이 곧 요동으로 납시어 친히 이곳을 둘러보시고

나를 문초할 거라는 뜻을 조칙으로 알려왔다네.

하지만 이와 같은 일들을 시시콜콜 상대에게 알리고 오도깝스레 구는 것은 대사를 운위하는

장부의 태도가 아님세.

나는 황문시랑이 황제를 가까이서 모시는 사람이고 또한 천하의 대사를 함께 논할 큰 인물인 줄로

알았더니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졸부인가 싶어 여간 실망스럽지 안해.”

하고서 한동안 사이를 두었다가,

“내 자네한테 이런 말을 해서 어떨는지 모르겠네만, 실은 내달에 우리 임금이 이리로 납시면

이미 나와 뜻을 같이하기로 맹약한 일곱 성주와 더불어 감히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큰일을 벌이려고

꾀하던 중이었네.

그 대사가 성사만 된다면 황제께서는 굳이 남평양의 장안성까지 가지 않더라도 요동에서

뜻한 바를 능히 이루는 것이요,

나 또한 황제의 신하로 가면서 조금도 부끄럽지 않을 대공을 세우는 것이니

이 어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만일 지금 양쪽이 창칼을 들어 싸우게 되면 만사가 다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네.

황문시랑은 내가 일곱 성주들과 함께 투항할 것을 말하였지만 그것은 현재로선 불가한 일일 뿐더러

양쪽에 별반 도움이 되지도 않네.”

하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심복은 뭐라 대답할 형편이 못 되는 자였다.

문덕이 한참 만에 깊은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하기야 세상의 일이란 것이 어디 사람의 뜻대로만 되는 것인가!

그쪽의 사정이 정 어렵고 다급하다고 하니 그렇다면 싸우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지.

가거든 배시랑께 전하게나. 내달까지 기다리지 못하겠거든

전날의 이야기는 서로 없었던 걸로 하자고.”

심복은 배구에게 돌아오는 즉시 문덕이 했던 이야기를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그대로 전했다.

배구는 득달같이 양광에게로 달려갔다.

배구의 말을 들은 양광은 기뻐하기보다는 다시 달을 넘겨야 한다는 말에 크게 화를 냈다.

“이는 문덕이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는 제장들을 불러모으고 목소리를 높였다.

“내 그간 요동에 이르러 성곽의 형세를 유심히 살펴보건대 을지문덕의 수작을 훤히 알겠다.

저들은 우리가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각 성에서 일제히 군사를 내어 학익진을 구사하려는

계책을 갖고 있다.”

양광도 병법에는 제법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적의 생각을 안 이상 어찌 이에 대비하지 않겠는가?

학익진이란 본시 양끝이 성하므로 이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자는 양끝으로 군사를 내는 법이다.

하지만 학익진의 허점은 중간에 있다. 중간을 쳐서 무너뜨리고 나면 양끝은

저절로 힘을 잃는 법이니 이는 마치 몸통을 잃은 학의 날개가 맥없이 추락하는 것과 같다.”

양광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음과 같이 군령을 내렸다.

“너희는 지금 당장 각자의 군영으로 돌아가서 일제히 군사를 내어 맡은 성들을 공격하라!

우문술과 신세웅의 군대는 신성을 치고 우중문은 현도성을 취하며 형원항은 개모성을 친 뒤에

저마다 성을 공취하는 즉시 요동성으로 향하라.

설세웅과 조효재는 각각 백암성과 안시성을 공격하라. 또한 최홍승은 안시성의 샛길을 열어

비사성으로 가서 내호아와 주법상의 수군이 당도하는 대로 수륙 양방에서 협공토록 하라!”

그리고 자신은 친위대 6군과 장근, 위문승의 군사를 더하여 20만이 넘는 대군으로 학익진의

중심인 요동성을 공략할 뜻을 세웠다.

하지만 막상 공격을 개시하면서도 양광은 을지문덕의 제안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떨치지는 못하였다.

군령의 말미에 제장들에게 당부하기를,

“만약 고구려의 장수나 병졸들이 항복해오거든 이를 무마하여 받아들이고,

그들을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우리 군사들을 엄히 단속하라.

모든 장수들은 진퇴에 앞서 짐에게 품의하고 영을 받아 행할 것이며,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마음대로 처리하고 독단으로 행동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를 어기면 군율에 따라 엄중하게 다스릴 것이다!”

하고 덧붙였다. 황제의 명을 받은 장수들은 각기 자신들의 군영으로 돌아가서

일제히 군사를 내어 고구려의 각 성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소설방 > 삼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3장 요하(遼河) 29 회  (0) 2014.07.27
제13장 요하(遼河) 28 회  (0) 2014.07.27
제13장 요하(遼河) 26 회  (0) 2014.07.27
제13장 요하(遼河) 25 회  (0) 2014.07.27
제13장 요하(遼河) 24 회  (0) 2014.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