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요하(遼河) 26 회
이때 을지문덕은 성중에서 한가롭게 글을 읽으며 지냈다.
그는 엿새나 이레 간격으로 부하들에게,
“성루에 가서 황색 깃발이나 한 개쯤 꽂아두고 오도록 해라.”
하는 알지 못할 명령이나 내릴 뿐,
성루에서 내려다보면 개미 떼처럼 새카만 적의 대병을 코앞에 두고도
조금도 근심하거나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따금 적진의 군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훈련하는 광경을 본 부하들이,
“아무래도 동향이 심상치 않습니다.”
하고 말해도 문덕은 언제나 태연하고 느긋한 얼굴로,
“아직은 때가 아니니 걱정할 것이 없다.
성밖의 일은 보지도 듣지도 말고 부지런히 군기나 점검하며 기다려라.”
하고는 창고를 열어 끼니마다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해가 지면 일찍 잠자리에 들도록 하였다.
을지문덕은 적진의 요란한 함성소리를 듣고도 지축이 울리도록 코를 골았고,
연일 태평스럽게 늦잠을 잤다.
시초에는 전대미문의 대병을 보고 불안에 떨던 요동성의 병졸들도
그 바람에 차츰 안정을 되찾아 평시나 다름없이 생활하였다.
“저 육시랄 놈의 것들이 뭣을 주워 먹을 게 있다고 예까지 와서 저 고생들을 하나 그래?”
“어디 저것들이 오자고 해서 왔나, 양광인지 뭔지 하는 그 애비 죽인 개쌍넘이
가자고 하니 할 수 없어 따라왔지.”
“임금 하나 잘못 만나 지지리 욕들도 보는구만그래.”
고구려 군사들은 매일 성루에 나가서 엄청난 숫자의 수군들을 구경하곤 했다.
당초만 해도 요동의 강역을 온통 새까맣게 뒤덮은 적병의 위세와 규모 앞에서
미상불 싸울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고구려 군사들이었지만 하루하루 무슨 풍경처럼
적진을 눈으로 익히게 되면서 사정은 조금씩 달라져갔다.
“그런데 우정 예까지 왔으면 창이라도 집어 들고 싸우는 체라도 해볼 양이지 허구한 날
저기서만 뭉쳐서 뭘 하자는 게야?”
“그게 모다 우리 상장군의 꾀에 넘어가서 옴쭉달싹도 못하고 있는 게라지 뭔가.”
“꾀에 넘어가다니?”
“나도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성루에 간간이 황색 깃발만 하나씩 갖다 꽂으면 저놈들이
그렇게들 좋아한다고 하네. 그러곤 저곳에서 싸울 생각도 아니하고 붙박이루다 즐겁게 지낸다는 게야.”
“허허, 참으로 묘한 종자들일세. 그렇게 좋아한다면야 간간이 하나씩 갖다 꽂을 게 무에 있나?
황색 깃발이야 수두룩하니 있는 대로 몽창 싸들고 나가서 기운이 다하도록 신껏 흔들어주고 오지.”
“어따, 저기 저놈들은 또 쌈박질을 하는 모양일세.”
“아까 불 피우고 밥해 처먹던 놈들이 이번엔 떼거지루 몰려가서 똥을 싼다고 난리구만. 여보게들,
상구경 났네! 저기 나란히 엉덩이를 까고 앉은 꼴 좀 보게나! 명년에 요동엔 대풍 들겠네!”
산이나 강의 풍광처럼 일상 속을 파고든 수나라 대병은 더 이상 위협과 충격이 되지 못했다.
요동성의 고구려 군사들은 걸핏하면 성루에 올라가 수군 진영을 구경하며 시간을 때우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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