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요하(遼河) 29 회
양광과 을지문덕이 맞닥뜨린 요동성의 사정도 이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양광은 장근과 위문승에게 명하여 성을 여러 차례 공략하였지만 중군은 방책을 넘지 못하여
열흘이 지나도록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그런데 장근의 부하 장수 가운데 도제(度提)란 자가 수백 개의 모래 보를 만들어
병거에 싣고 몇 개의 구덩이들을 메우고 나오자 요동성 사람들은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성루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을지문덕은 성주 고신을 불렀다.
배구가 보낸 서찰을 통해 수군 진영의 어려움을 낱낱이 알고 있던 문덕은
고신에게 돌연 군창의 양곡이 얼마나 있는가를 물었다.
“우리 군사가 내년 봄까지 먹기에는 너끈합니다.”
“그럼 됐네. 날이 어둡거든 수레 열 대에 곡식을 실어 우리 군사들로 하여금
성의 남문으로 나가서 백암성으로 가라고 이르게.”
문덕의 말을 들은 고신은 깜짝 놀랐다.
“백암성에 군량이 떨어졌습니까?”
“백암성이라고 군량이 어찌 없겠나. 거기도 아마 여기만큼은 있을 것이네.”
“그런데 어찌하여 곡식을 백암성에 갖다 주라 하십니까?”
“갖다 주라는 말은 아니 했지. 그저 백암성 쪽으로 가라는 게지.”
고신은 을지문덕의 말뜻을 도무지 헤아릴 수 없었다.
“남문에서 백암성에 이르는 길은 적군들이 도처에 깔려 있어 수레를 내기만 하면
당장 뺏기고야 말 것입니다.”
“그렇게 하라고 시키는 짓일세.
우리 군사들에게 말하여 가는 길에 적군을 만나거든 수레를 버리고 돌아오라 이르게나.”
“하면 수군에게 군량을 공으루 갖다 바치겠습니까?”
고신이 묻자 문덕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적진의 형편이 여러 모로 누란지경에 처하여 있으나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뭐니뭐니 해도 식량 사정이네.
양광은 요동의 인심을 얻기 위해 전군에 약탈과 노략질을 엄금하는 영을 내렸지만
군사들은 죽은 말과 심지어 동료의 시신까지 가져가서 뜯어먹는 판국이니
양광의 영이 통할 리가 있는가?
더욱이 춘궁기를 거치면서 백성들의 사정 또한 궁핍하긴 마찬가지니
수군들은 노략질마저도 힘들게 되었지.
그런데 본시 사람이란 너무 궁하면 독기를 품게 마련일세.
백만 군사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면 그거야말로 큰 낭패가 아닌가.
나는 수나라 군사들의 기세가 어제오늘에 와서 부쩍 맹렬해지고 있음을 걱정하고 있다네.”
“하지만 군량을 주면 그 기세가 더욱 살아나지 않겠습니까?”
“수십만 군대에 수레 열 대의 곡식이 무슨 큰 힘이 되겠나?
마른 땅에 물 한 바가지지.
그러나 두고 보게마는 우리가 얻는 효과란 수백 대의 무기와 맞먹을 걸세.
그대는 자중지란이 어찌하여 일어나는지 아는가?
열 형제가 다 같이 굶고는 화목하게 지낼 수 있어도 어디서 밥 한 그릇이 생기면
비로소 다툼이 일고, 전에 없던 불만도 생기는 법이라네.”
고신은 그제야 문덕의 말하는 바를 알아차리고 크게 감탄했다.
“실로 상장군의 지략은 부열과 공명에 비견하고 왕맹의 그것을 능가하는 데가 있습니다.”
“이 싸움은 식량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세. 식량도 쓰기에 따라서는 창칼보다
더 무섭고 날카로운 무기가 될 수도 있다네.”
고신은 즉시 문덕의 영을 따랐다.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가 남문으로 수레 열 대 분량의
양곡을 실어내니 이것을 끌고 백암성으로 가던 군사가 중로에서 수군을 만나
곡식과 수레는 빼앗기고 가까스로 몸만 빼내어 도망왔다.
군사들은 땅에 머리를 조아리고 죄를 빌었으나 고신은 오히려 안색을 부드럽게 하여,
“수고들 하였다.”
하며 위로하였다.
곡식을 강탈한 수군은 위문승의 군대였다.
이들은 우선 저희들의 배를 불린 다음 남은 것을 위문승에게 가져갔다.
병졸들이 풀뿌리로 연명하는 마당에 장수들이라고 매끼를 배불리 먹는 것은 아니었다.
5월도 하순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양광의 친위대인 6군의 우두머리들조차도 먹을 것이 떨어져
굶기를 밥먹듯 하는 형편이었다.
위문승은 수레 두 대의 양곡을 자신의 몫으로 빼돌리고 나머지만 가지고 육합성으로 갔다.
6군의 수장들이 다시 제 몫들을 챙기고 마지막으로 양광에게 이르렀을 때는 열 대의 수레 중에서
고작 몇 가마뿐이었다.
양광은 노획한 곡식을 보자 시쁜 웃음을 지었다.
“저것으로 뉘 코에 붙이겠느냐?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줄 수도 없는 일이니
두었다가 입이 궁금할 적에 전병이나 만들어 먹도록 하자.”
하지만 이 소문은 금방 요동성 주변에 머물던 중군 전체로 퍼져나갔다.
본래 보지 못한 고기가 용이 되고 가보지 않은 데가 별천지라, 뺏은 양곡이 수레 열 대에서 스무 대,
서른 대로 입을 거칠 때마다 불어나더니 급기야 요동성 서북방에 주둔한 장근의 군대에 이르러서는
수백 섬으로 늘어났다.
장근의 군사들은 수백 섬 곡식을 빼앗았다는 말에 환호를 지르며 좋아하였는데,
그 소문이 돌고 난 뒤에도 여전히 배를 곯게 되자 저마다 불평과 불만을 터뜨리며
황제와 위문승을 싸잡아 비난하였다. 을지문덕의 예견처럼 과연 수군 진영은
수레 열 대의 양곡으로 크게 어지러워졌다.
모래 보를 만들어 열심히 참호를 메우던 도제의 군대도 당장 일을 중단하고
자신들의 진채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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