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17장 보스의 자격 [10]
(366) 17장 보스의 자격 (19)
“예, 서동수 올시다.”
수화기에서 서동수의 목소리가 울렸을 때 오태곤은 어깨를 부풀렸다가 내렸다.
깊게 숨을 들이켰다가 뱉은 것이다.
오전 11시 정각, 칭다오 시간은 10시다.
오늘은 “진실은 이것이다”가 방영된 지 이틀 후,
서동수에 대한 평판이 가장 치솟는 시기다.
대개 사건이 탕, 터지면 그 터진 순간을 0으로 치고 사흘까지 치솟는다.
그러고 나서 내려가는 것이다.
강도(强度)에 따라 다르긴 하나 일주일이면 약발이 떨어진다.
그 안에 다시 만들어야만 한다.
“접니다. 오태곤입니다. 회장님.”
오태곤이 정성스럽게 말했다.
겨우 연결이 된 통화다.
그동안 통화시도를 열 번은 했을 것이다.
하지만 번번이 차단당했다가 오늘은 되었다.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때 서동수가 응답했다.
“아, 예, 오랜만입니다.”
“예, 정말 오랜만입니다. 엊그제 진실은 이것이다는 보셨지요?”
“예, 봤습니다. 수고하셨어요.”
그렇지, 서동수가 이쪽 신세를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인사치레라도 먼저 전화를 해줬어야 옳다.
어깨를 편 오태곤이 호흡을 고르고 나서 물었다.
“회장님, 준비되셨습니까?”
“뭘 말입니까?”
“영웅 캠프 출연 말씀입니다.”
서동수가 입을 다물었으므로 오태곤의 말이 빨라졌다.
“전에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사람은 어느 단계쯤에 오르면 본인이 뜻대로 살기가 어렵게 된다고 말씀입니다.”
“아이구, 다 외우고 계시네.”
서동수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띠어졌으므로 오태곤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회장님,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회장님이 영웅 캠프에 나오셔서 국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셔야 합니다.”
“…….”
“그것이 기업가로서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회장님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다 저쪽에서 출연시켜달라고 로비를 했지 이쪽에서
이렇게 국민과 의무까지 팔아먹으면서까지 부탁하기는 처음이다.
오태곤의 이마에서 진땀이 배어 나왔다.
“회장님.”
다시 오태곤이 간절하게 불렀을 때 서동수가 말했다.
“하지요.”
“예?”
되물었던 오태곤이 낚시에 걸린 고기가 빠질 것이 겁난 낚시꾼처럼 서둘렀다.
“예. 감사합니다. 그럼 날짜 잡겠습니다.”
했다가 바로 말을 바꾸었다.
“내일 저희가 칭다오로 찾아가면 되겠습니까?”
“내일 말입니까?”
“예, 내일 첫 비행기로 가겠습니다.”
“그러시지요.”
“전에 유 실장한테 인터뷰 내용을 드렸으니까 준비는 하셨을 것입니다.”
신바람이 난 오태곤은 이미 책상에서 일어나 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회장님.”
전화기를 내려놓은 오태곤이 주먹을 쥐더니 허공에 대고 흔들었다.
마침 주위에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한마디 내뱉었다.
“심봤다!”
경력 15년 차 PD로 그동안 산전수전 다 겪은 오태곤이다.
오태곤은 이것이 서동수에게 어떤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렇다면 자신은 그 길을 만들어준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PD의 보람 아니겠는가?
다시 구내전화기를 쥔 오태곤의 몸은 활기에 차 있었다.
영웅의 캠프 스태프들을 모으려는 것이다.
(367) 17장 보스의 자격 (20)
그로부터 닷새 후,
청와대 대통령 관저의 식당 휴게실에 두 이제 노금봉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오태곤 주위를 빙빙 도는 중이다.
“서동수가 정치를 해도 될 거야. 이 분위기라면 차기 대통령도 문제없다.”
“…….”
“그렇지. 오 PD. 넌 홍보수석을 해. 난 문광부 장관을 준다면 사양하지 않겠다.”
“…….”
“참 내 아파트하고 과천 땅.”
하더니 제 정신을 차린 노금봉이 서둘러 갔는데 청문회에 대비하려는 기세다.
오태곤이 그때서야 폐에 담긴 숨을 길게 뿜었다.
대통령 한대성과 비서실장 양용식이다.
의전비서관 박기만은 뒤쪽에 서 있었는데 손에 리모컨을 쥐었다.
셋의 시선은 앞쪽에 걸린 100인치 TV에 모아져 있다.
두께가 1센티밖에 안 되는 최신형 제품이다.
시간은 오후 8시 반, 대통령이었지만 광고를 안 볼 수가 없다.
박기만이 적절한 시간에 켰어도 대통령은 광고를 두 개나 보고 나서 ‘영웅 캠프’가 시작되었다.
MC는 KBC의 중견 아나운서 이수한과 유미경, 둘 다 노련했고 여유롭다.
초대손님을 편안하게 해주면서 화제를 이끌어 나간다.
미모를 내세우거나 잘난 척을 하지 않는다.
초대손님 서동수가 나오자 양용식이 먼저 긴장했다.
헛기침을 세 번이나 한다.
대통령은 시치미를 뚝 뗀 얼굴로 서동수를 응시했다.
먼저 이수한이 웃음 띤 얼굴로 물었다.
“캠프 출연을 여러 번 고사하셨어요. 왜 그러셨어요?”
서동수가 따라 웃으며 대답했다.
“영웅 캠프라뇨? 제목부터 부담이 되었죠. 내가 너무 약점이 많은 인간이어서요.”
그러자 유미경이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머, 무슨 약점이 그렇게 많으세요?”
“난 제대로 끝낸 일이 거의 없습니다. 모두 실패작의 현재진행형이죠.”
이제는 정색한 서동수가 말을 이었고 두 MC는 시선만 준다.
이것이 두 MC의 장점이다.
“결혼생활도 이혼한 상태인 데다 딸에게 정상적인 부모 교육도 못 시킵니다.
직장도 리베이트를 먹다가 좌천된 후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뛰쳐나와 사업을 시작했지 않습니까?
이 사업도 현재는 성장하고 있지만 진행입니다.
내세울 게 없지요.
그래서 영웅은 당치도 않습니다.”
“겸손한 말씀이세요.”
이수한이 위로했다.
“하지만 ‘동성’은 이제 세계적인 대기업 아닙니까?”
이번에는 유미경이 치켜주었다. 서동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겸손한 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보다 몇 배나 훌륭한 기업가가 대한민국에 수백 명이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출연하게 된 것은….”
서동수의 시선이 화면을 응시했다.
“자극을 좋아하는 시청자, 시대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때 양용식이 다시 헛기침을 했고 뒤쪽에 선 박기만이 긴장했다.
여기 셋도 시청자였기 때문이다.
“그건 서 회장님 생각이시구요.”
이수한이 부드럽게 반론했다.
“우리는 이 시대에 적응해서 성공해나가는 서 회장님을 보고 있는 것 같은데요.”
“난 타락한 인간입니다.”
정색한 서동수가 말했으므로 양용식이 마침내 대통령을 보았다.
그러나 대통령은 여전히 ‘오리발’ 얼굴이다.
그래서 양용식이 머리를 돌려 박기만을 보았지만 서동수의 말이 이어졌다.
“전처하고 이혼한 이유도 내 사생활 때문이었죠.
만나는 여자가 많았습니다.
아까 제가 리베이트 먹다가 좌천되었다고 말씀드렸죠?
제가 리베이트 먹는 선수였습니다. 도사였죠.”
“저거, 편집.”
마침내 어깨를 부풀린 양용식이 대통령 앞이지만 목소리를 높였다.
“저놈들, 편집도 안 했나.”
당황한 박기만이 제가 당장 편집이라도 할 기세로 리모컨을 권총처럼
TV에다 대고 겨누었을 때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그대로 내보내게 한 거야.”
양용식이 숨을 들이켰다. 대통령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라 있는 것이다.
(368) 17장 보스의 자격 (21)
“됐다, 이 자식!”
손바닥으로 의자 팔걸이를 내려친 민족당 의원 양성기가 얼굴을 펴고 웃었다.
그러나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다.
방금 서동수의 말을 들은 것이다.
옆에 앉은 백기현은 잠자코 TV만 들여다본다.
그때 다시 MC 이수한이 말했다.
“서 회장님을 멘토로 삼고 있는 청소년, 대학생, 20대와 30대 직장인이 많습니다.
너무 부정적인 말씀만 하지 마시고….”
“그래서 제가 정직하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정색한 서동수가 똑바로 화면을 보았으므로 양성기가 긴장했다.
저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서동수가 말을 이었다.
“제가 영웅 캠프에 출연하겠다고 결심을 굳힌 것은 제가 이룩한 것보다 실패하고 잘못했던
과거를 털어놓음으로써 여러분에게 반면교사의 도움을 드리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으음.”
이 신음은 백기현한테서 나왔다.
백기현은 야당 원내총무로 4선이다. 별명이 여우, 처세의 달인이다.
이제 입만 딱 벌리고 있는 양성기는 2선으로 입이 거칠고 경박하지만 야당에 꼭 필요한 인재다.
돌격대장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때 유미경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하지만 회장님, 이렇게 기업을 이루신 데는 회장님만의 장점, 특기가 있으실 텐데요.
그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그건 솔직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대답한 서동수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서동수가 말을 이었다.
“그 솔직함은 자신감 또는 용기가 배경에 자리잡고 있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자신감이 없으면 솔직함은 책임 회피, 또는 임기응변의 방책으로 사용되기 쉽지요.”
MC 둘은 시선만 주었는데 이것이 다른 풋내기들과 다른 점이다.
풋내기들은 몇초간의 침묵이 무서워 말도 안 되는 말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서동수가 똑바로 양성기를 보았다.
“저에게 실패는 또 다른 기회의 시작이었습니다.
억지로 그렇게 맞추다 보니까 습성이 되었고 이제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더군요.”
그러더니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것은 인생사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놈, 위험한데.”
서동수의 말이 끝났을 때 백기현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다.
여의도의 일식당 ‘도쿄’의 방 안이다.
머리를 든 양성기가 백기현을 보았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무슨 말인지 모를 만큼 양성기의 머리가 나쁘지는 않다.
그 시간에 KBC의 PD 오태곤에게 보도부장 노금봉이 말했다.
“어이, 시청률 64%야.”
노금봉의 목소리가 떨렸다.
“세상에 2014년에 64%라니, 이것은 모세의 기적보다 더하다.”
KBC 본관 구석의 휴게실 안이다.
사람을 피해 이곳에 박혀있는 오태곤에게 노금봉이 찾아온 것이다.
“벌써 난리가 났어. 이건 재방을 열 번쯤 해야 돼.”
이제 노금봉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오태곤 주위를 빙빙 도는 중이다.
“서동수가 정치를 해도 될 거야. 이 분위기라면 차기 대통령도 문제없다.”
“…….”
“그렇지. 오 PD. 넌 홍보수석을 해. 난 문광부 장관을 준다면 사양하지 않겠다.”
“…….”
“참 내 아파트하고 과천 땅.”
하더니 제 정신을 차린 노금봉이 서둘러 갔는데 청문회에 대비하려는 기세다.
오태곤이 그때서야 폐에 담긴 숨을 길게 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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