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16장 영웅의 조건 [2]
(328) 16장 영웅의 조건 (3)
한국에 온 길에 이번에는 박서현을 만나고 가기로 마음먹은 서동수가 약속을 잡았다.
남편하고 같이 점심을 먹기로 한 것이다.
4년 가까운 기간 동안 통화만 몇 번 했을 뿐 만난 적도 없었던 터라
전화를 받은 박서현이 처음에는 바짝 긴장한 눈치였다.
박서현은 서동수가 급성장한 재벌이 되어 있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네 남편하고 같이 나오라고 했더니 박서현은 30분쯤 후에 그러겠다고 연락을 해왔다.
그래서 12시 반에 서동수는 시청 앞의 킹덤호텔 한식당, 방 안에서 둘과 마주 보고 앉아 있다.
한식당이지만 원탁에 의자를 배치한 구조다.
인사를 마쳤지만 부부는 어색한 듯 제각기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다.
박서현의 남편 정영철은 자동차부품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데
작년 매출액이 185억, 경상이익에 2억5천의 적자를 내었다.
5년쯤 전에 서동수가 소개시켜준 중국 대동자동차가 주 수출선이다.
적자 원인은 원부자재, 인건비 상승에 오더 부족,
대동자동차가 없었다면 3년쯤 전에 부도가 났을 거라고 했다.
서동수가 미리 정영철의 신우기업에 대한 조사를 해본 것이다.
와이프의 전남편을 만나면 오기 내지는 승부욕이 일어날 만도 한데
정영철은 시선을 내린 채 묻는 말에만 대답했고 박서현도
곧 어깨를 늘어뜨렸으므로 이야기는 서동수가 계속 이끌었다.
식사를 거의 마쳤을 때 서동수가 본론을 꺼내었다.
얼굴 보려고 만난 것이 아니다.
“미혜 엄마가 미혜한테 연락 안한 것이 오히려 더 나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서동수의 시선을 받은 박서현이 외면했다.
미혜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서동수가 말을 이었다.
“바쁘게 살다 보면 그런 것이라고 미혜가 말하더구먼,
더구나 엄마가 아이도 하나 더 만들어서 둘이나 키우고 있다면서 말야.
미혜가 이젠 어른 다 되었어.”
물잔을 든 서동수의 시선이 정영철에게로 옮겨졌다.
“둘이 사랑하면서 오순도순 사는 모습이 좋습니다. 정형.”
“아, 저, 그거야….”
정영철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가 금방 지워졌다.
“그런데 정형, 회사를 중국으로 옮기실 생각은 없습니까?
옮긴다면 대동자동차에서 오더를 보장해줄 텐데요.
지금보다 다섯 배 매출액이 오를 겁니다.”
서동수는 박서현의 눈빛이 강해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정영철은 점점 당황하고 있다.
물잔을 들었다가 놓더니 눈동자가 흔들렸다.
“길림성에서 길림시 부근 공장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해줄 겁니다.
건물은 지어줄 테니 기계만 옮기면 됩니다.
물론 시설을 늘려야겠지요,
한국 기술인력도 데려오고. 하지만….”
말을 멈춘 서동수가 똑바로 정영철을 보았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느낀 것이다.
“정형, 검토해 보시겠습니까?”
“예, 검토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영철이 앉은 채로 머리를 숙인 순간 서동수는 가슴안에서 서늘한 바람이 지나는 것 같았다.
정영철은 그럴 생각이 없는 것이다.
새 시장을 개척하고 모험과 희생을 견딜 성품이 아니다.
소리 숙여 숨을 뱉은 서동수의 시선이 박서현에게로 옮겨졌다.
이쪽을 바라보던 박서현이 서둘러 시선을 내렸는데 시선이 부딪친 그 짧은 순간에
서동수는 박서현의 눈에서 적의(敵意)를 보았다.
그것을 말로 풀이하면 ‘내 남편에게 왜 곤란한 제의를 하느냐?’
또는 ‘잘난 척 좀 그만해’ 등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서동수는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난 그저 미혜 친모가 고생 않고 살기를 바랐을 뿐이다.
(329) 16장 영웅의 조건 (4)
“뭐어? 영웅캠프?”
화들짝 놀란 강정만이 말까지 더듬었다.
“네, 네가 그, 영웅캠프에 나간다고?”
“이런 젠장.”
입맛을 다신 서동수가 의자에 등을 붙였다.
이곳은 장충동의 한정식당 ‘춘풍’ 방 안이다.
노란 빙판 같은 온돌방의 안쪽에는 12폭 병풍이 세워졌고
창 밖은 시멘트 벽이겠지만 창문에 창호지가 붙어 있다.
자개 문갑 위에 놓인 도자기는 진품 같다.
둘 앞에 놓인 상에는 상다리가 휘어질 것처럼 한정식 요리가 쌓여 있는데
아직 아가씨는 부르지 않았다.
이곳은 강정만의 건설회사 회장이 단골로 다니는 요정이라는 것이다.
그런 곳을 일개 부장이 온 셈이었지만 손님이 제 회장보다 센 인물이니 명분이 선다.
“언, 언제냐?”
흥분이 가시지 않은 강정만이 다시 물었을 때 서동수가 자작으로 따른 소주잔을 들었다.
“한 달쯤 후에.”
“재계 인사는 네가 처음인 것 같은데.”
눈을 가늘게 뜬 강정만이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만 알고 있을게. 너, 로비했어?”
“로비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정말이냐?”
“야, 이 미친 놈아, 넌 날 뭘로 보고.”
그러자 강정만이 어깨를 부풀렸다가 내렸다.
“거기 한번 나가면 다 뜬다.
시장, 지사, 국회의원, 장관까지 다 되는 거야.
연예인은 바로 드라마 주연급으로 발탁되고 억대 광고를 따. 가수는….”
“그만.”
손바닥을 벌려 보인 서동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미친 세상이구먼. 제대로 검증도 안 해 보고 어떻게 뜬단 말이야?”
“인마, 방송에 나오는 것으로 검증이 끝난 거다. 시청자는 그렇게 믿어.”
이제는 서동수가 시선만 주었고 열이 오른 강정만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넌 영웅캠프에 출연한 후부터 네 위상이 달라져 있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될 거다.
넌 단숨에 뜨는 거야.”
“단숨에 추락할 수도 있겠구먼.”
혼잣소리처럼 말한 서동수가 방 안을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야, 네 회장이 오는 데가 뭐 이래? 아가씨들 데리러 보도방에 간 거야?”
그때 강정만이 상 밑에 붙은 벨을 눌렀고 10초도 안 되었을 때 미닫이문이 스르르 열렸다.
한복 차림의 마담을 선두로 아가씨 둘이 들어섰다.
모두 한복 차림이었는데 원색 바탕에 현란한 무늬가 눈이 부실 정도였고
저고리 위에 얹혀진 얼굴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서동수가 숨을 들이켰을 때 마담이 먼저 아가씨 하나를 옆에 앉혔다.
치마가 부풀어 오르면서 향내가 풍겨 왔고 순식간에 서동수는 꽃밭에 둘러싸인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마담이 어떻게 인사를 하고 나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으으음.”
겨우 탄성을 뱉어낸 서동수가 옆에 앉은 아가씨를 보았다.
머리를 옛날식으로 뒤에서 묶어 옥으로 만든 비녀를 꽂았는데
갸름한 얼굴이 그림책에서 본 선녀 같다.
시선이 마주치자 눈웃음만 친 아가씨에게 서동수가 헛소리처럼 물었다.
“네가 과연….”
“네?”
“사람이냐?”
“아이고, 저 자식.”
강정만이 웃었지만 정색한 서동수가 아가씨의 손을 잡았다.
“네가 과연 두 다리를 번쩍 치켜 들고 신음을 뱉어낼 수 있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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