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11장 세상은 넓다 (7)
(230) 11장 세상은 넓다 - 13
서동수가 서울에 온 것은 사직하고 한 달쯤이 지났을 때다.
오전 11시, 서동수는 소공동의 동양전자 영업본부장인 김대영 전무의 방에 들어와 있다.
면담 신청을 한 지 일주일 만에 만나자는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이제는 동양그룹 사원이 아닌 터라 민간인 신분으로 면담 목적과 내용까지 제출해야만 했다.
김대영은 2년 전만 해도 서동수의 상관이었던 관계다.
서동수가 칭다오로 좌천되고 나서 어떻게 일했고 사직하고 무얼 하는지 모두 조사했을 것이다.
김대영은 40대 후반으로 동양그룹의 핵심간부다.
사주의 후계자인 사장 전기현의 심복이기도 해서 전도가 양양한 신분이다.
김대영이 지그시 서동수를 보았다.
2년 전에도 이렇게 둘이 마주 앉아 있었다.
그때 김대영이 그랬다.
“그래, 칭다오에 가서 열심히 해. 내가 주시하겠다.”
그러나 이제 서동수는 사직하고 나서 손바닥만 한 회사를 차렸고
김대영은 상무에서 전무이사로 승진해 있다.
이윽고 김대영이 입을 열었다.
“네 계획서는 보았다. 잘 만들었더군.”
외면한 채 김대영이 말을 잇는다.
“하지만 그건 네가 우리 사원이었을 때의 경우야.
회사와 상관이 없는 인간이라면 경우가 다르지.”
서동수가 잠자코 김대영의 옆얼굴을 보았다.
사람은 대개 거절할 때나 믿지 못할 때 또는 싫을 때 대화 상대의 얼굴을 직시하지 않는다.
그것을 염두에 두면 대응이 빨라질 수도 있다.
옆 쪽 화분을 보면서 김대영이 다시 말했다.
“베이징에 현지법인이 있고 주요 도시에 전문 대리인이 있어.
너한테 프리 에이전시를 줄 이유도, 명분도 없다.”
서동수는 동양전자 본사에 중국에서 프리 에이전시로 활동하도록 요청한 것이다.
본래 전자 영업팀장이었던 서동수다.
영업에는 일가견이 있는 데다 현재 중국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중국어 수준도 일상 회화에 지장이 없을 정도다.
매출 증진을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상사 측에서는 고려해볼 만한 조건이었다.
서동수가 똑바로 김대영을 보았다.
“퇴직 사원에게는 에이전시를 준 경우가 없기 때문입니까?”
“그런 경우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전례가 되면 곤란해.”
“제가 팀장으로 일했지만 에이전시가 되면 제 일처럼 뛸 수 있습니다.
전무님도 이해하실 겁니다.”
“사장님하고 상의했는데 안 되겠다.”
“그럼 제가 한국전자 에이전시를 해도 됩니까?”
그 순간 김대영이 눈을 치켜뜨고 서동수를 노려보았다.
“너, 인마, 협박하는 거야?”
“아닙니다. 한국전자의 제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서동수를 노려보는 김대영의 눈동자가 약간 흔들렸다가 고정되었다.
한국전자는 동양전자와 2, 3위를 다투는 경쟁업체다.
작년까지만 해도 동양이 2위였는데 올해는 한국한테 빼앗겼다는 것이다.
1위는 일성이다.
서동수는 소리죽여 숨을 들이켰다.
거짓말이다.
그러나 한국 측에 확인해보지는 못할 것이다.
서동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제의를 받고 계획서 썼다가 동양부터 연락한 것입니다.
제 능력을 밖에서 발휘하게 해 주십시오.
제 진면목을 보여드릴 기회를 주신다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열성을 다 바쳐 말한다.
지금 당장 울어 보일 수도 있다.
서동수는 절실한 표정으로 김대영을 보았다.
김대영이 물끄러미 시선을 주고 있다.
눈동자도 흔들리지 않는다.
(231) 11장 세상은 넓다 - 14
오후 1시반, 서동수는 소공동 지하상가 안의 커피숍으로 들어섰다.
안쪽에서 출입구를 바라보고 앉았던 사내가 벌떡 일어섰다.
이찬홍이다.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띤 이찬홍이 서동수가 내민 손을 두 손으로 잡는다.
“팀장, 2년 만입니다.”
“야 인마, 나, 사장이다. 넌 이 대리가 되었고.”
마주 보고 앉았을 때 서동수가 눈을 좁혀 뜨고 이찬홍을 보았다.
“넌 동양에서 별 딸 거다.”
“아닙니다. 그런 욕심 없습니다.”
“욕심 갖고 되는 일 아냐, 운이 붙어야 돼.”
다가온 종업원에게 커피를 시킨 서동수가 의자에 등을 붙였다.
“김 전무가 연락해 주겠다는구나.”
긴장한 이찬홍이 서동수를 보았다.
계획안을 만들기 전에 이찬홍과 수시로 연락했던 것이다.
자료도 받았고 조언도 들었다.
사직서를 내기 전부터 계획했던 일이다.
밖으로 나온 이상 섬유에만 매달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8년 동안 집중했던 전자제품, 그리고 동양그룹에서 생산하는 모든 상품까지다.
다시 서동수가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거부했다가 내가 한국전자 제의를 먼저 받았다고 털어놓았더니 흔들리더군.
다시 연락해 주겠다는 거야.”
“연락 안 오면 한국전자로 가시죠. 그럼.”
“받아들이기를 바라야지.”
정색한 서동수가 이찬홍을 보았다.
이찬홍한테도 한국전자의 제의가 왔다고 한 것이다.
그래야 이찬홍의 부담이 작아질 뿐만 아니라 이쪽도 당당해진다.
탁 털어놓고 밑바닥까지 보여주는 것은 거래관계인 사회에서 민폐만 끼칠 뿐이다.
커피잔을 놓고 사라지는 아가씨의 엉덩이를 뚫어지게 보던 서동수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표정을 짓고 양복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이찬홍 앞에 놓았다.
“정보비 이백 넣었다. 받아.”
“아이고, 이런.”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은 이찬홍이 상반신까지 세웠지만 봉투에 손을 대지는 않는다.
이찬홍의 시선을 받은 서동수가 빙그레 웃었다.
“내가 뒤가 깨끗한 선수라는 건 네가 제일 잘 알 거다. 얼른 넣어.”
“잘 쓰겠습니다.”
봉투를 양복 주머니에 넣은 이찬홍도 따라 웃었다.
“와이프가 TV 바꾸자고 했는데 잘되었습니다.”
“야 인마, 그건 카드로 사고 그 돈은 와이프한테 용돈 쓰라고 주는 거야.”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 가야겠다.”
서동수가 커피에 손도 안 대고 일어서자 이찬홍이 따라 일어서며 말했다.
“회사 분위기 수시로 전해 드리지요.
궁금하신 일은 언제든 전화 주시고요.”
“고마워. 먼저 나갈게. 넌 커피 마셔.”
몸을 돌린 서동수가 커피숍을 나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오늘도 낭비 없는 동선(動線) 계획을 세웠지만 시간 차이가 났다.
약속 시간을 당기려는 것이다.
버튼을 누르자 신호음 세 번 만에 응답소리가 들렸다.
“자기야?”
오정미다. 정보회사의 과장.
그 순간 서동수의 머리에 열이 오르면서 눈앞에 오정미의 알몸이 펼쳐졌다.
“응, 내가 일이 좀 일찍 끝나서. 4시쯤 만날 수 없어?”
“그래, 별일 없으니까 나갈게. 어디로 가지?”
그러더니 목소리가 낮아졌다.
“우리, 내 차로 바닷가나 가지 않을래? 바닷가에서 오늘밤 같이 있자.
할 이야기도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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