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5장 대륙(9)
(101) 5장 대륙-17
“국제공사로 결정되었어.”
회의 도중에 서동수가 불쑥 말하자 이인섭은 눈만 껌벅였다.
회의실 안에는 둘뿐이다. 오후 2시 반이 되어 가고 있다.
의자에 등을 붙인 서동수가 말을 잇는다.
“가격은 동북건설 계약 가격하고 똑같이 하는 거야. 알겠지?”
“예.”
하고 대답했지만 이인섭은 서동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런 이인섭의 콧등을 3초쯤 바라보던 서동수는 심호흡을 했다.
본사에서 전자팀장으로 근무하면서 리베이트를 수없이 챙겼던 서동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부하가 이인섭처럼 대놓고 제 주머니를 챙기는 꼴은 겪은 적이 없다.
이인섭의 행태는 마치 눈 뜬 놈 코를 베어가는 수작이나 같다.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어져 웃음이 실실 나오는 장면이었다.
서동수가 조은희 모녀로부터 중국어를 급속으로 배우지 않았다면 진짜 코를 떼일 뻔했다.
서동수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본사는 이미 사내 금연을 시행하고 있지만 중국 공장은 아직 아니다.
라이터를 켜 한 모금을 깊게 빨아들인 서동수가 테이블 건너편의 이인섭을 향해 길게 내뿜었다.
그때 이인섭이 시선을 들고 서동수를 보았다.
“과장님, 오늘 간부 회식이 있는데요.”
“참 그렇지.”
이제는 서동수가 외면했고 이인섭이 말을 잇는다.
“주임급 이상으로 12명이나 됩니다. 장소는 어느 곳이 좋을까요?”
“간부급들이 좋아하는 곳이 어디야?”
“해산물 식당입니다.”
“그럼 그곳으로. 이왕이면 고급 식당으로.”
“알겠습니다.”
그러고는 이인섭이 자리에서 일어섰으므로 서동수가 담배 연기를 내뿜고 나서 말했다.
“화란을 들어오라고 해.”
이인섭이 회의실을 나가자 서동수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담배는 고3 때부터 피웠으니 15년쯤 된다.
그러나 한 갑을 한 달 동안 갖고 다닐 때도 있고 하루에 다 피울 때도 있다.
요컨대 담배 중독이 아닌 것이다. 버릇처럼 담배를 찾지 않는다.
술도 마찬가지, 마시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 한 달도 끊는다.
서동수에게 금연·금주 소동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화란이 들어섰으므로 서동수가 머리를 들었다.
공기가 움직이면서 맑은 향기가 맡아졌다.
이른 아침에 꽃이 피어 있는 산속 공기 같은 냄새다.
시선이 마주치자 화란은 희미하게 눈웃음만 보였는데 그것도 신선하다.
화란은 연두색 회사 점퍼에 바지 차림이다.
그러나 서동수의 머릿속에는 화란의 알몸이 그려진다.
이것은 어쩔 수 없다.
적당한 크기의 가슴, 둥근 어깨, 유두는 콩알만 할 것이다.
그때 앞쪽 자리에 앉은 화란이 묻는다.
“부르셨어요?”
물론 영어다.
머리를 끄덕인 서동수가 상반신을 세웠다.
“본사에서 승인이 났어.
매달 산동실업에서 들어오는 리베이트를 후원금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어.”
그 순간 화란이 활짝 웃었다.
눈이 가늘어지면서 얼굴을 펴고 소리 없이 웃는 웃음이다.
“정말이세요? 기뻐요.”
두 손을 모은 화란의 목소리가 떨렸고 얼굴은 상기되었다.
“지방 정부에서 굉장히 기뻐할 거예요.”
“그 후원 대상을 검토해 보자고.”
화란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서동수가 말했다.
아름답다.
누가 그랬던가?
웃을 때 아름다운 여자가 진정 아름다운 여자라고.
(102) 5장 대륙-18
회식장소는 칭다오 바닷가의 해산물 식당 ‘청해’, 총무과의 간부사원 12명이 모두 모였다.
사무실, 경비실, 전기기계실, 식당, 청소업무의 간부들이다.
조선족은 이인섭 하나였고 모두 중국계여서 둥근 원탁 주위는 중국어가 난무했다.
밝은 분위기의 중국어는 높고 빠르다.
전에는 그것이 소음으로만 울렸었는데 지금은 서동수의 귀에 ‘언어’로 들리고 있다.
그것을 아직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터라 서동수는 자신이 투명인간처럼 느껴졌다.
모두 자신을 없는 사람처럼 치부하고 지껄이기 때문이다.
“과장 권세가 공장장 다음이더구만, 힘센 과장을 만나면 여러 가지 좋은 점이 많아.”
50대 중반인 청소주임 위 선생이 점잖게 말했더니 경비주임 곽 선생이 말을 받는다.
“내가 듣기로는 동북건설 홍 사장도 우리 과장한테 건방지게 굴다가 혼이 났다는군,
과장의 배경이 베이징에 있다는 소문이 있어.”
그러자 식당주임 맹 여사가 끼어들었다.
“맞아, 과장이 시내에서 베이징에서 온 사람들하고 만나는 걸 본 사람도 있대.”
“자, 쓸데없는 소리 그만합시다.”
하고 이인섭이 나섰지만 기계실 주임 후 선생이 나무랐다.
후 선생도 50대다.
“자넨 그러면 못써.”
“아니, 왜 그러십니까?”
“자네가 과장 위세 믿고 호가호위하는 건 봐주겠어. 이해한다고.”
“그런데요?”
“그런데 요즘 왜 과장 욕을 하고 다니나? 호가호위하는 걸 감추려는 수작이야?”
“아니, 내가 언제요?”
금방 얼굴이 굳어진 이인섭이 되물었을 때 옆에 앉은 화란이
서동수에게 웃음 띤 얼굴로 말을 걸었다.
서동수가 눈만 껌벅이고 테이블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기 때문이다.
“과장님, 오랜만에 모이니까 서로 할 이야기가 많은가 봐요.”
화란이 영어로 말하자 서동수가 웃었다.
“그런 것 같군, 그런데 후 선생하고 이 대리는 다투는 거야?”
“네, 기계 부속 때문에요.”
서동수는 화란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는 것으로 자위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서동수가 화란하고 이야기하는 동안 주춤했던 후 선생이 말을 잇는다.
“내 귀에 다 들려, 과장이 비자금을 챙기는 것 같다느니, 유흥가에 자주 간다느니,
어디 마담한테 살림을 차려 주었다느니 하는 소문이 다 자네한테서 나온 것 같단 말야.”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제는 이인섭이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시선이 서동수를 스치고 지나갔는데 수습하려는 것 같다.
그때 다시 화란이 다가섰다. 주위를 둘러보면서 화란이 말했다.
“저기, 잡담 그만하시구요.
모처럼의 과 간부 회식이니까 분위기를 밝고 건전하게 만드십시다.”
“맞는 말이야.”
식당의 맹 여사가 맞장구를 치더니 후 선생과 이인섭을 흘겨보았다.
“당신들은 입 닥쳐.”
이곳은 여성 파워가 세다.
실제로 서동수도 길가에서 남자 귀싸대기를 치는 아줌마를 보았다.
남편을 패는 것이다.
맞을 죄를 저질렀겠지만 그것이 일상인 나라다.
남녀평등은 한국보다 낫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술과 요리가 날라져 왔으므로 분위기가 더 밝아졌고 ‘언어’가 더 많아졌다.
“화란, 너, 과장 조심해. 과장이 여자를 무지 밝힌다는 거다.”
또 누가 서동수를 투명인간 취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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