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요하(遼河) 9 회
다음으로 문덕은 차례를 기다리고 섰던 안시성의 고각상을 바라보았다.
“그대 역시 마찬가지다. 어떻게든 안으로 성문을 굳게 잠그고 때를 기다렸다가
적군이 다시 요동으로 쫓겨왔을 때 군사를 내어 쳐야 한다.
사전에 미리 덤볐다가는 이기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이겨봤자 별로 얻는 것도 없다.
요동 8성 중에 중하지 않은 곳이 한 곳도 없지만 특히 안시성과 요동성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
각상은 내 말을 명심하겠는가?”
그러나 조의(早衣) 출신의 무장 고각상은 여름이 되도록 싸우지 말아야 한다는
문덕의 당부가 마음에 들지 아니하였다.
“글쎄, 장군께서 그렇게 하라면 하는 수밖에 없지만 제가 보기에 아무도 나가서
싸우는 자가 없다면 적군의 의심을 살 뿐만 아니라 그다지 좋은 계책도 아닌 듯합니다.
그러잖아도 궁리가 많기로 이름난 양광이 요동의 7성에서 한 군데도 군사를 내지 않는다면
이를 수상쩍게 여길 것은 명백한 일이요,
그렇지 않다면 더욱 기고만장하여 설칠 것이므로 적의 사기를 오히려 높여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어느 쪽으로 보나 이로울 것이 없으니 안시성 한 군데쯤은 나가서 싸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고각상의 말에 문덕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림없는 소리다.
양광은 백만 대군을 움직이는 순간에 기고만장할 대로 기고만장하였고,
그 사기며 자신감은 이미 오래전에 하늘에 닿았다.
우리가 대적하지 않아도 그는 오히려 당연히 여길 뿐 이를 두고 의심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각상은 섣부른 행동을 삼가고 오직 군령을 따르라!
나는 그대의 무예가 훌륭한 줄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적군을 유인해 내지로 갔다가 다시 요동에 이르렀을 때는
반드시 그대를 중히 쓸 것이다!”
문덕이 엄히 잡도리를 했지만 고각상의 불만스러운 표정은 여전하였다.
“각상도 6월 중순이 되거든 몰래 성안의 역부들을 뽑아 요수를 건너서 북살수로 가라.
북살수 상류에 이르면 동서에서 나뉘어 흘러온 강의 두 지류가 만나는 지점이 있는데
그곳 역시 내가 미리 수중보를 만들어 숨겨놓은 곳이다.
그대는 이를 활용하는 한편 주변의 나무들을 뿌리부터 뽑아내어 땅이 물을 머금지 못하도록 하고,
뽑아낸 나무는 밧줄로 엮어 둑을 만들었다가 우기가 시작되고 강의 하류가 소란스럽거든
한꺼번에 터뜨려 급류가 폭포처럼 쏟아지게 하라!”
각상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되물었다.
“요하에 둑을 쌓는 것은 십분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북살수는 요서의 땅이 아닙니까?
어찌하여 요서까지 가서 계책을 세우신단 말씀이오?”
각상의 질문에 문덕은 돌연 놀라운 말을 입에 담았다.
“나는 이번에 양광이 백만 군사를 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아예 수나라를 정벌하여
그 사직을 없애버릴 뜻을 갖게 되었다.
백만 군사로 패한다면 수나라는 틀림없이 회생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며,
이는 우리나라의 오랜 근심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절호의 기회다.
그러니 어찌 요하 주변에서 그칠 것인가?
두고 보면 알겠지만 나는 차제에 요서뿐 아니라 탁군을 지나 낙양(洛陽)과 대흥(大興)까지
적군을 추격하여 기필코 양광의 목을 취할 것이다!
하니 각상은 어떤 일이 있어도 대략을 그르치지 말고 일체의 경거망동을 삼가라!”
문덕의 장담을 들은 성주들은 일제히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감히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를 토벌하겠다는 생각은 그때까지
어느 누구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마지못해 치르는 방어전쯤으로 여겼던 자신들과는 달리 문덕은 도리어
이를 수나라 토벌의 다시없는 호기로 인식하는 듯했고,
이것은 전쟁에 임하는 성주들의 개념 자체를 근본부터 뒤집어놓기에 충분했다.
성주들은 문덕이 지닌 기상과 배포에 새삼 혀를 내둘렀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나서 문덕은 각상을 향해 이렇게 덧붙였다.
“이번 대전의 시작이 범동의 손에 달렸다면 그 마무리는 바로 각상에게 달린 셈이다.
그대는 이 점을 유념하여 내가 말한 바를 한 치도 차질 없이 지키고 따라야 한다.
만일 이를 어긴다면 오직 군령에 따라 처리할 것이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제가 몸이 근질근질하여 공연히 해본 소리이니
상장군께서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고각상은 언제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느냐는 듯 금세 경쾌한 음성으로 넌덕스레 대꾸했다.
문덕도 각상의 밝은 낯을 대하자 비로소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오골성의 우민에게 말하였다.
“우민은 6월 초순이 지나 남서풍이 일기 시작하거든
성 중의 힘세고 날랜 군사 3천을 뽑아 압록수 강가로 나오라.
그곳에서 배를 준비하고 내가 도착하기를 기다려라.”
그리고 문덕은 만약의 사태를 우려하여 여러 성주들을 둘러보며
다음과 같은 당부를 잊지 않았다.
“양광의 군사가 비록 오합지졸을 모아놓은 보잘것없는 것이라곤 해도
그 숫자가 무릇 백만이요,
출사의 성대함이 이와 같은 예는 일찍이 없었소.
두려워할 까닭은 없으나 그렇다고 이를 가볍게 여겨서도 아니될 것이외다.
우리나라의 명운은 이제 여기 모인 여덟 사람의 수중에 있다고 해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이제 각자 성으로 돌아가서 방비와 대책을 철저히 세우고 군령을 준수하며 기다리시오.
상황이 바뀌거나 급히 연락할 일이 생기면 사람을 보낼 테니
어떤 경우에도 성을 비우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거꾸로 내게 기별하거나 의논할 일이 있을 때는 요동성으로 사람을 보내도록 하시오.”
말을 마치자 을지문덕은 성주들을 되돌려보내고 자신은 고신을 앞세운 채 요동성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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