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강안여자

18. 악연 (5)

오늘의 쉼터 2014. 7. 21. 10:02

 

18. 악연 (5)

 

 

 

문이 열리면서 들어선 여자를 본 윤기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동시에 컴퓨터로 게임을 하던 박준배도 머리를 들더니 숨을 멈췄다.

"저기, 전세 아파트 좀 보려고."

문 앞에 엉거주춤 선 여자가 둘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부동산 사무실 분위기가 어쩐지 부자연스럽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아, 여기 앉으세요."

하면서 서둘러 일어나 자리를 권한 것은 윤기수다.

아까부터 연신 하품을 해대던 참이라 잘 되었다는 표정이 얼굴에 역력히 드러나 있다.

여자가 엉거주춤 앉았는데 미니스커트의 허벅지가 다 드러났으므로

박준배는 입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섹시했다.

룸살롱 웨이터 생활도 1년 가까이 해온 박준배로서 어지간한 여자는

시선도 주지 않았는데 이 여자는 특별했다.

첫째 분위기가 있다. 섹시하면서도 이런 고급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는 아주 드물다.

이런 여자는 특급 룸살롱의 특급 손님 담당에 어울릴 것이었다.

탤런트나 모델이라고 다 특급이 아니다.

고급손님은 오히려 소문이 날 염려가 있어서 기피한다.

그때 윤기수가 먼저 선수를 쳤다.

"전세 보시게요? 몇평 짜리로?"

"20평쯤요."

여자가 조심스런 시선으로 둘을 번갈아 보았다.

그 시선을 잠깐 받은 박준배는 입안이 마른 느낌을 받고는 다시 침을 삼켰다.

윤기수가 머리를 끄덕였다.

"20평짜리가 좋은 가격으로 나온게 있는데. 근데 월세로 나왔네요."

바로 그 월세 연립주택 지하방이 장안동의 조직원 합숙소인 것이다.

그곳을 6명의 숙소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방에다 모셔놓은

한 놈 때문에 둘은 밖에서 지낸다.

바로 길 건너편의 이곳 부동산 사무실이다.

간판만 부동산 사무실로 걸어놓고 조직원 대기실 겸 연락 사무실로 사용하는

이곳에 가끔 지금처럼 잘못 찾아온 손님이 온다.

박준배가 눈치를 주었지만 떠버리 윤기수는 말을 이었다.

이놈은 말도 빠르고 몸은 더 빠르다.

일단 저질러놓고 보는 성격이어서 박준배는 윤기수가 연립주택으로

여자를 끌고가 덮칠 작정 같아서 불안해졌다.

물론 입막음을 확실하게 한다면 더 말할 것도 없는 대박이 날 것이다.

그때 여자가 물었다.

"그럼 월세는 얼마죠?"

"한번 보고나서 결정하실까요?"

윤기수가 그렇게 물었을 때 박준배는 길게 숨을 뱉었다.

윤기수는 일을 저지르려고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일진이 좋지 않다.

집안에 한 놈을 잡아두고 있어서 보스의 연락이 자주 오는 것이다.

일을 치르려면 차라리…. 박준배가 부동산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이곳에서 뚝딱 해치우는 것이 낫다.

그때 문이 열렸으므로 박준배는 다시 머리를 들었다.

"어!"

그 순간 박준배의 입에서 놀란 탄성이 터졌고 역시 몸이 빠른 윤기수는 먼저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안으로 뛰쳐 들어온 사내들의 동작이 그보다 빨랐다.

먼저 윤기수를 덮친 사내가 마치 장작을 뽀개듯이 야구 배트로 머리를 내리쳤고

바가지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때서야 박준배는 컴퓨터 테이블을 밀치고 섰지만 다음 순간 눈에서 수만 개의 불똥이

튕겨 나옴과 동시에 두 눈 사이에 엄청난 충격을 받고는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사내 하나가 던진 당구공을 맞은 것인데 박준배는 무엇에 맞은지도 모르고 기절해 버린 것이다.

"됐다."

사무실 바닥에 널부러진 두 사내를 내려다 보면서 강한이 말했다.

강한이 아직도 소파에 그대로 앉아있는 장미에게 물었다.

"이제 경비초소는 제거한 셈이야. 이번에도 네가 앞장 설거냐?"

"밥값은 해야지."

소파에서 일어난 장미가 미니스커트를 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병신들이 맨 다리만 보면 사족을 못써요."

 

 

 

 

 

사내는 연립주택 안의 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지친 표정이었다.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다가 가끔 담배를 입에 붙이고는 마시지도 않고 연기를 뱉는다.

긴 얼굴, 가는 체격. 앉아 있었지만 다리가 길어서 큰 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오전 10시 반이 되어가는 시간이라 평일의 주택가는 조용했다.

아이들과 가장이 떠난 후에 집안 정리를 마친 주부들이 한숨 돌리는 시간이다.

장미가 다가가자 사내는 시선만 들었다. 보통 남자는 이럴 때 눈빛이 강해졌고

다혈질인 놈은 침을 삼키거나 얼굴이 와락 붉어지기도 했는데 이놈은 아니다.

그러고보니 호모같다.

"아저씨, 여기 유수진이라고 제 친구가 사는데요. 혹시."

하고 장미가 운을 뗐을 때 사내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머리를 저었다.

"모르겠는데."

"근데 저쪽 부동산 아저씨가 여기 산다고 하던데요."

장미가 손을 들어 뒤쪽을 가리켰다.

이곳에서 길 건너편의 부동산 간판이 정면으로 보였다. '국제부동산'.

"저기서 말요?"

사내가 부동산 간판을 눈으로 가리키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다 탄 담배를 손끝으로 튕겨 문밖으로 던졌다.

5m가 넘는 거리였는데 잘 튕긴 것이다.

그때 장미가 울상을 지었다.

"그래요. 밖에 부동산 아저씨가 따라와 주셨는데요. 여기 계시다고."

"부동산에 있는 놈들이 말요?"

사내의 얼굴에 웃음이 더 짙게 번지더니 엉거주춤 일어섰다.

예상했던 대로 사내는 키가 컸다.

1m85 넘을 것이다.

강한보다 컸다.

"걔들 어디 있어요?"

"밖에 계세요. 아저씨가 알려 주신다고 했는데."

"나아 참."

이제는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은 사내가 앞장 서 연립주택 대문으로 다가갔다.

"이 새끼들이 여자를 어떻게 하려고."

뒤를 따르는 장미는 사내가 중얼거리는 말을 다 들었다.

철제 대문의 열린 쪽문으로 사내가 허리를 꺾고 나간 순간이었다.

"뻑!"

이번에는 물동이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따르던 장미는 사내의 다리가 뒤로 쭉 뻗어 지는 것만 보았다.

장미가 멈춰섰을 때 곧 쪽문 안으로 강한이 들어섰다.

손에 쥔 야구배트를 지팡이처럼 짚은 강한이 장미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잘 무는구나."

그러자 장미가 웃지도 않고 대답했다.

"밖에는 저놈뿐이야."

"그럼 안에 세 놈이 남았겠다."

현관으로 앞장 서 가면서 강한이 말했다.

천상태가 잡혀 있는 곳은 203호다.

2층 오른쪽 방이었고 3층짜리 연립주택에는 계단뿐이다.

현관 안쪽에 멈춰섰을 때 커다란 사내를 치우고 난 백용철과 황택수가 다가왔다.

둘은 각각 쇠파이프에다 빨래 방망이를 쥐었는데 황택수가 쥐고 있는 빨래 방망이를 보자

그 경황 중에도 장미가 풀썩 웃었다.

그것을 본 강한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장미에게 말했다.

"자, 그럼. 시작해."

그러자 장미가 앞장서 계단을 올랐고 세 발짝 쯤 뒤로 강한이 따랐다.

황택수와 백용철은 뒤쪽으로 돌았다.

1층 베란다를 짚고 2층 베란다 쪽으로 넘어 들어가려는 것이다.

거침없이 203호 앞으로 다가간 장미가 숨도 고르지 않고 벨을 눌렀으므로

강한은 계단 옆의 벽에 등을 붙였다.

장미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누구야?"

사내의 거친 목소리가 안에서 들리자 장미가 말했다.

"동사무소에서 주민세 영수증 드리려고 왔습니다."

"뭐요? 주민세? 우리가 주민세 냈나?"

안에서 보안경을 통해 장미를 본 사내가 투덜거렸다.

그리고는 안전장치를 푸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린 순간 장미는 반 걸음 옆으로 비켜난 대신 강한이 뛰어들었다.

"퍽석!"

야구 배트가 사내의 머리 꼭대기에 맞는 소리가 그랬다.

장미는 야구 배트에 맞은 사내가 눈을 찢어질 듯이 치켜뜬 채

그대로 주저 앉는 것을 눈도 깜박하지 않고 보았다.

배트에 맞은 머리가 환상인지는 모르지만 3㎝ 쯤 밑으로 푹 꺼지는 것 같았다.

다음 순간 강한이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으므로 장미는 문옆의 벽에 등을 붙이고는

가방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동안 집 안에서는 소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고함소리와 뭔가 부서지는 소리,

신음소리가 이어졌고 베란다쪽 문이 와락 열리는 소리까지 들렸다.

황택수와 백용철이 들이닥친 것이다.

장미는 불을 붙인 담배 연기를 앞쪽으로 길게 뱉었다.

바로 옆집인 204호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장미가 이쪽 문을 등으로 밀어 밖에서 닫은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안에서 문이 열린 것은 그로부터 1분도 안되었다.

"들어오셔."

하고 백용철이 말했으므로 장미는 안으로 들어섰다.

집안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현관에 쓰러져 있는 사내는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는데 엎어진 채 꿈틀거리며 신음을 뱉었다.

좁은 응접실 탁자 위에도 사내 하나가 엎어져서 큰 신음을 뱉는 중이었다.

이 사내는 팔 한쪽이 뒤틀려져 부러진 상태여서 보기에도 끔찍했다.

"야, 상태 업고 나와."

하고 강한이 소리치자 곧 방 안에서 황택수가 천상태를 업고 나왔다.

천상태는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데다 온몸을 늘어뜨렸다.

그러자 강한이 천상태의 머리 위에다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저고리를 엎어 씌웠다.

"형, 여기."

하고 안방에서 백용철이 가방 하나를 들고 나왔다.

"돈이 들었는데 300만원쯤."

"내버려!"

와락 강한이 소리치자 놀란 백용철이 가방을 주방에다 던져버렸다.

가방은 개수대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방 안에서도 신음소리가 났다. 방 안에도 사내가 있는 모양이었다.

"가자구."

강한이 장미에게 말했다.

아직 긴장이 풀리지 않은 강한의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장미는 한 모금 깊게 빨아들인 담배 연기를 앞쪽으로 길게 뱉고는 방바닥에 담배를 버렸다.

그리고는 구두 끝으로 담배를 비벼껐다.

집 안으로 신발을 신은 채 들어온 것이다.

연립주택 앞에 주차시킨 승합차 안에는 이미 테이프로 번데기처럼 묶어놓은

세 사내가 실려 있었는데 강한은 일행 다섯이 오르자 그대로 출발했다.

셋은 뒤쪽에 짐짝처럼 실려 있었는데 끙끙거렸지만 모두 정신은 말짱했다.

눈을 한껏 치켜 뜨고는 눈동자만 어지럽게 굴리고 있다.

"저 새끼들 저기다 버려."

승합차가 10분쯤 달렸을 때 길가에 주차된 청소차 뒤쪽 공간을 발견한 강한이 말했다.

쓰레기 더미에 막혀 있어서 사람의 눈이 닿지않는 위치였다.

승합차가 멈추자 세 사내는 묶인 채로 쓰레기 더미 안쪽으로 던져졌고 나중에 던져진

사내의 손은 풀어 주었다.

동료들을 풀어주라는 배려였다.

차가 다시 출발했을 때 강한이 옆자리에 앉은 장미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여전히 표정없는 얼굴이었다.

"수고했어."

강한이 던지듯 말하자 장미는 쓴웃음을 지었다.

"뭘. 별거 아냐."

"너, 반말 할거냐?"

"당연하지."

정색한 장미가 강한을 똑바로 보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안돼. 우리 둘만 말 놓는거야."

강한이 눈썹을 올렸지만 장미의 말이 이어졌다.

"다른 사람은 나한테 반말하면 안되겠지? 우리, 위계질서는 지키자구."

 

 

 

 

 

"허허, 참."

헛웃음을 웃었던 전영철의 얼굴이 금방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오전 11시 5분전. 전영철은 방금 장안동 숙소의 탈취 사건 보고를 들은 것이다.

역삼동의 천지 나이트클럽 사무실 안이다.

앞에 선 홍대식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장님, 회장님한테는 보고 드리지 않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러자 퍼뜩 눈을 치켜 떴던 전영철이 외면했다.

회장님이란 KK단의 보스 최광규를 말하는 것이다.

성격이 냉혹하고 철저하지만 열이 나면 물불을 안 가리는 최광규였다.

더구나 이번 일은 전영철이 독단으로 추진한 작전이었다.

이름도 없는 강한의 기습을 받아 여섯 명이 떼로 당했다는 것을 알면 전영철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었다.

"내 이, 시발놈을."

전영철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아예 쥑일테다."

"그놈은 서울에 있습니다."

홍대식이 달래듯이 말했다.

"그놈 집도 다 알아 놓았고 팀원 놈들도 다 우리 손아귀에 있으니까요."

이미 천상태는 말할 것도 없고 황택수, 백용철의 가족관계, 주소까지 다 알아놓은 것이다.

머리를 든 전영철이 홍대식을 보았다.

"강한이 그 새끼 가족을 잡아."

"제가 보고를 받자마자 바로 지시를 했습니다."

팔목시계를 내려다본 홍대식이 말을 이었다.

"곧 연락이 올겁니다."

강한의 동생 강민은 진작부터 감시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천상태를 빼앗긴 상황이 되었으니 이젠 강한의 동생을 잡아다가 미끼로 쓰면 된다.

강한을 잡기에는 그 수가 오히려 더 낫다.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사내 하나가 서둘러 들어섰다.

"형님, 주호한테서 연락이 왔습니다."

사내가 홍대식에게 말했지만 전영철도 다 들었다.

사내가 말을 이었다.

"그놈이 샜다는데요. 집에 있는줄 알고 들어갔더니 비어 있었답니다."

강민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다시 전영철이 이를 악물었을 때 당황한 홍대식이 사내에게 눈을 부릅떴다.

"그 병신은 10분 전에도 그놈이 안에 있다고 했단 말이다."

죄가 없는 사내가 눈동자만 굴렸을 때 전영철이 책상 위에 놓인 재떨이를 집어 던졌다.

재떨이가 홍대식의 어깨를 스치고 날아가 벽에 부딪쳐 박살이 났다.

유리 재떨이인 것이다.

"시발놈들아, 나가!"

홍대식과 사내가 서둘러 방을 나갔을 때 전영철이 인터폰을 눌렀다.

"네, 사장님."

스피커에서 비서 배희연의 목소리가 울렸다.

클럽 보조 댄서였다가 전영철에게 찍혀 비서 겸 애인 역할을 하는 아가씨였다.

전영철이 잇사이로 말했다.

"조재일이 들여보내."

"네, 사장님."

간드러진 배희연의 목소리를 듣고나자 전영철의 심사가 조금 가라앉았다.

의자에 등을 붙인 전영철이 지긋이 눈을 감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울리더니 문이 열렸다.

방 안으로 들어선 조재일이 허리를 꺾어 절을 했다.

"부르셨습니까?"

눈을 뜬 전영철이 조재일을 노려보았다.

"방금 홍 부장이 다녀갔는데."

부동자세로 선 조재일을 흘겨본 전영철이 말을 이었다.

"강한이 이 개새끼가 장안동 숙소를 엎은 이야기를 들었지?"

"예, 사장님."

"정보가 샜다."

어깨를 부풀렸다가 내린 전영철이 목소리를 낮췄다.

"우리 쪽에서 일급 정보가 샌거다.

장안동에 그 새끼를 잡아두고 있다는걸 아는 놈은 몇 놈 안되었어."

전영철이 잇사이로 자근자근 씹듯 말했다.

"밀고자가 있어. 그놈을 찾아. 찾아서 이놈은 아주 죽여 없애야 돼. 진짜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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