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악연 (1)
바지 주머니에 넣은 핸드폰이 진동 했으므로 강한은 꺼내 보았다.
발신자 번호는 나타나지 않았다.
잠깐 그것을 쏘아본 강한이 마침내 핸드폰의 덮개를 열고 귀에 붙였다.
오전 10시 40분. 조재일을 만나려고 성남시장 근처의 골목으로 들어선 참이었다.
"여보세요."
응답했을 때 2초쯤 저쪽이 가만 있더니 말했다.
"김동수씨, 저예요. 장미."
"아, 장미씨."
장미다. 강한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지난번 퀵서비스로 배달된 뭉치를 받아 장선에게 전해준 인사를 해오리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다.
강한이 길가의 건물벽에 등을 붙이고 섰다.
그때 장미의 목소리가 수화구를 울렸다.
"바쁘세요?"
"아닙니다. 말씀하시지요."
"지난번에 수고하셨어요. 선이한테서 잘 받았다는 연락을 받았거든요."
"수고는요. 뭘."
"그래도 빚쟁이들 떼어 놓으시느라고 애쓰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닙니다."
강한은 소리죽여 숨을 뱉었다.
그날밤 장선을 데리고 일산의 모텔방에 간 후로 벌써 일주일이 되었다.
그때 장미가 물었다.
"저기, 무역하신다고 들었는데요. 사업은 잘 되세요?"
"여직원 하나 데리고 하는 일인데요 뭘. 겨우 사무실 운영비 대고 있습니다."
"겸손하시네요."
낮게 웃은 장미가 다시 물었다.
"저, 오늘 저녁에 시간 있으세요?"
"오늘 저녁 말씀입니까?"
되묻고나서 강한은 심호흡을 했다.
이 순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 시간 있습니다."
"그럼 저녁 8시에 논현동 성동센터 뒷골목에 아담이란 카페가 있거든요?"
"아, 예. 성동센터 뒷골목. 아담카페."
"아세요?"
"모릅니다만 찾기 쉽겠군요. 성동센터는 압니다."
"찾기 쉬워요. 바로 뒤쪽에 있으니까."
강한은 이미 알고있는 곳이다.
3층 건물에 출입구가 셋. 눈앞에 약도가 환하게 펼쳐졌다.
"알겠습니다. 그곳에서 뵙죠."
그때 장미가 다시 짧게 웃더니 물었다.
"저를 찾으실 수 있겠어요?"
"거기서 다시 전화를 하면 되겠죠."
쓴웃음을 지은 강한이 눈앞에 장미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자 지금까지 흐리게 윤곽만 드러났던 장미의 얼굴이 환하게 펼쳐졌다.
장미가 웃는다.
그 웃음띤 얼굴로 장미가 말을 이었다.
"그럼 거기서 뵈어요. 제가 저녁 사드릴게요."
그리고는 전화가 끊겼으므로 강한은 폐에 담긴 숨을 길게 뱉어냈다.
오늘이다.
마침내 살인혐의 수배자, 인터넷 사기, 날치기 원더우먼 장미가 손바닥 위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강한이 시장 끝쪽의 찻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는 11시 정각이었다.
구석 자리에 앉아 이쪽을 보고있던 조재일이 강한에게 눈으로만 아는 체했다.
찻집 안에는 오전부터 술에 취한 중년 사내 둘과 조재일뿐이었다.
강한이 앞쪽에 앉았을 때 조재일이 물었다.
"팀원들도 그만 두었다면서?"
"따라간다고 해서."
다가온 종업원에게 커피를 시킨 강한이 주위를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날 찔러서 잡아간다면 네가 나한테 돈 먹은거 용서해 줄까?"
"시끄러, 새끼야."
눈을 치켜뜬 조재일이 잇사이로 말했다.
"날 보자는 이유는 뭐야?"
"행동대장 전영철 주소."
강한이 던지듯 말하고는 조재일을 똑바로 보았다.
"그리고 너희들이 보호하고 있는 연예인들의 명단, 보고 내역, 계약 관계에 대한 자료가
다 필요하다. 너희들의 조직도와 사업 내역까지 모두."
"저녁에 약속이 있다고 하셨죠?"
커피잔을 내려놓은 이용구가 물었다.
이용구가 안가로 이용하는 오피스텔 안이다.
30평형의 원룸 오피스텔 안은 깔끔하게 정돈되었고 가구도 고급품이었다.
특히 벽에 부착된 대형 벽걸이 TV는 최신형이다.
"네, 동생하고."
이용구의 시선을 받은 장미가 외면했다.
이용구는 이제 동업자이며 공범 관계가 되었다.
장미의 CD를 할인해온 후부터 이용구는 노골적으로 장미에게 접근해 왔다.
만나는 장소를 이곳 오피스텔로 정한 것도 그렇다.
장미에게는 이곳이 안전한 점도 있었지만 불편했다.
이용구의 속셈을 알기 때문이다.
"장미씨."
이용구가 정색하고 장미를 보았다.
눈이 가늘고 콧날이 낮았지만 전체적으로 호인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였다.
둥근 어깨에 건장한 체격으로 손발이 컸다.
장미의 시선을 받은 이용구가 입술 끝을 비틀며 웃었다.
"난 장미씨를 좋아합니다. 알고 계시지요?"
다시 장미가 시선을 내렸을 때 이용구가 말을 이었다.
"내가 장미씨한테 일한 대가는 받고 있지만 난, …."
"알아요."
장미가 이용구의 말을 잘랐다.
"이 사장님이 인생을 걸고 절 도와주고 계시다는거 알아요."
"장미씨가 인정해주시기만 하면."
그리고는 이용구가 장미를 똑바로 보았다.
눈에 열기가 담겨 있다. 장미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 하는가를 안다.
섹스다.
이 남자는 지금 몸을 원하고 있다.
그때 장미가 입을 열었다.
"동생 만나고 오늘밤에 여기로 올게요."
그 순간 이용구가 정신이 든듯이 눈을 크게 떴다.
지금까지 장미는 오피스텔을 전전해왔다.
정색한 장미가 말을 이었다.
"그래요. 이 사장님이 저 때문에 공범이 되었어요.
제가 누명을 쓰고 있긴 하지만 절 믿어주신 분은 이 사장님 한분 뿐이죠."
그리고는 장미가 가늘고 길게 숨을 뱉었다.
"오늘부터 여길 숙소로 삼을게요."
"준비를 해 놓지요."
이용구가 서두르듯 말했다가 생각났다는 얼굴로 장미를 보았다.
들뜬 표정을 감추려고 일부러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
"그렇다면 짐을 옮겨야 할텐데요. 짐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 동생 만나구요. 내일."
"그럼 저하고 내일 같이."
"그래요."
머리를 끄덕인 장미가 팔목시계를 보는 시늉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후 5시반이 되어가고 있었으니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더 앉아있기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잠깐 들를 데가 있어서."
"조심해야 됩니다."
따라 일어선 이용구가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내가 따라갔으면 좋겠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장미가 얼굴을 펴고 웃었다.
"길거리에서 잡히지는 않을 테니까요."
오피스텔을 나온 장미는 엘리베이터에 오른 순간 저도 모르게 길게 숨을 뱉었다.
이용구가 저러는 이유는 뻔했다.
앞으로 더 나올 CD 때문이다.
이번에도 이용구는 1억 CD를 바꿔 선금 5000만원을 받았는데
수수료로 1000만원까지 떼먹었다.
이용구에게 자신은 돈 덩어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은 장미는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왔다.
이용구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한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오늘밤 오피스텔로 돌아가면 이용구는 발정난 개처럼 덤벼들 것이다.
좋다. 나도 섹스를 즐기면 된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몸을 주었다고 제 여자나 된 것처럼 여긴다면 그놈은 제정신이 아닌 놈이다.
오히려 이쪽에 허점을 보이게 된다.
거리로 나왔을 때 장미는 문득 김동수를 떠올렸다.
그러나 목소리만 들릴뿐 당연히 형체는 없다.
택시에서 내린 장미는 다시 팔목시계를 보았다.
7시 55분. 아담 카페와의 거리는 100미터 가량. 천천히 걸으면 20. 30분 후에 도착할 것이었다.
성동센터 뒷골목은 언제나 복잡했다.
의상실과 미용실이 한 집 건너 있는데다 대여점, 편의점, 떡볶이집 등 가게마다
손님이 바글바글 했다.
언제부터인가 이 골목 뒤쪽으로 가게 나가는 아가씨들이 방을 얻어 옮겨왔고
저녁 무렵이 되면 출근하는 아가씨들을 태우려고 모범택시가 새까맣게 몰려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가씨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시간이다.
그래도 골목은 행인들로 붐볐으므로 장미는 가게 구경을 하면서 천천히 걸었다.
김동수는 동생 장선의 애인이다.
얼마 전까지는 친구 관계인 것 같더니 눈치를 보니까 둘이 깊은 관계로까지 들어선 것 같았다.
그러나 장선도 나이가 스물 둘에 대학 졸업반이다.
제 앞가림은 할테니 간섭할 필요는 없다.
길가로 붙어 걸으면서 장미는 저도 모르게 긴 숨을 뱉었다.
김동수를 만나려는 이유는 믿을만한 남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주댁과 김희선과의 일을 끝내는데 혼자로는 역부족이다.
용역회사에서 고용한 뜨내기 함동석의 경우를 봐도 그렇다.
그놈은 박스에 돈 대신 종이가 든 것을 알자 강도로 돌변해서 대들었다.
미리 대비를 하고 가스총을 쏴서 기절시켜 버렸지만 다시 이용구를 고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시 장선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으므로 장미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장선에게 김동수를 만난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은 것이다.
"실례합니다."
뒤에서 부르는 남자 목소리에 장미는 주춤했지만 서너걸음을 더 떼었다.
부를 남자가 없다는 표시를 낸 것이고 그동안 생각할 시간도 벌자는 생각이었다.
장미가 눈을 치켜떴을 때 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실례합니다."
걸음을 멈춘 장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두 사내가 서 있었다.
허름한 점퍼 차림에 둘 다 달리기 좋은 평상화를 신었다.
표정없는 얼굴. 그러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는다.
순식간에 사내들의 분위기를 읽은 장미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이런 분위기의 사내들은 경찰이다.
장미가 사내들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는 눈을 크게 뜨고 조금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저, 경찰입니다."
사내 하나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장미 눈앞에 펼쳐보였다.
경찰 신분증 이름은 고석준. 장미가 차분하게 신분증을 보았을 때 경찰이 물었다.
"저기, 신분증 좀 보실까요?"
"왜요?"
"죄송합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다른 경찰이 부드럽게 말하더니 바짝 다가섰다. 사내한테서 비누냄새가 났다.
"신분증 좀 보여 주시지요."
"안 갖고 다니는데."
"그럼 이름하고 주민증 번호를 불러주시지요."
"오은지. 820345-20×××××."
그러자 경찰이 복창을 하더니 주머니에서 무전기를 꺼내 귀에 붙였다.
확인이다.
그때 다른 경찰이 장미를 길가 가게 앞쪽으로 안내했다.
"1분이면 확인이 됩니다. 잠깐만 기다리시죠."
편의점 앞에 선 장미가 소리죽여 숨을 뱉었다.
오은지와 주민번호는 확실했다.
주소도 외우고 있다.
오은지는 일년에 한번 볼까 말까한 어머니의 먼 친척으로 나이는 장미보다 한 살이 많다.
그때 무전 확인을 마친 경찰이 다가왔다.
웃음띤 얼굴이어서 장미는 심호흡을 했다.
"저기, 경찰서에 같이 가주셔야겠는데요."
경찰이 여전히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확인이 잘 안됩니다."
"도대체 왜?"
장미가 눈을 치켜떴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거예요?"
"사건 용의자하고 비슷해서 그럽니다."
옆에 선 경찰이 낮게 말했으므로 장미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걸렸다.
장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번도 절망해 본 적이 없다.
희망을 잃지 않았다는 뜻이다.
낙천적인 성품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좌우에 경찰의 감시를 받으면서 골목을 빠져 나갈때는 절망을 느꼈다.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으며 목까지 메었다.
머리속이 텅 빈 느낌이 왔고 가슴에는 쇳덩어리가 든 것 같았다.
"아저씨."
마침내 10여미터쯤 걷던 장미가 하얗게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좀 쉬었다 가요, 아저씨."
"허, 이 아가씨가."
경찰 하나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조금 전까지 웃음띤 얼굴을 보였던 사내였다.
"조금만 더 가요. 골목 밖에 차가 있으니까."
그때 다른 경찰이 장미의 한쪽 팔을 끼며 물었다,
"아가씨, 장미지?"
그 순간 장미의 눈앞이 하얗게 되었다.
경찰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예? 누구라구요?"
장미가 안간힘을 쓰면서 되물었을 때 경찰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나가는 아가씨들이 많은 이곳이 활동하기 좋겠다고 생각했겠지만 우리도 그쯤은 예상했지."
"아저씨, 머리가."
손으로 이마를 짚은 장미가 비틀거렸을 때 다른 경찰이 다가와 팔을 끼었다.
둘이 양쪽에서 부축하는 모양이 되었지만 꼼짝달싹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쓸데없는 짓 말고 어서." 하면서 둘은 크게 발을 떼었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힐끔거렸으므로 장미는 머리를 숙였다.
다시 절망감이 덮쳐왔다.
조금 전에는 기를 쓰고 말을 뱉었지만 이제는 말할 기력도 없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으므로 장미는 이를 악물었다.
그때 왼쪽 사내가 말했다.
"장미, 우린 일계급 특진에다 상금 5천만원을 나눠갖게 되었어."
들뜬 목소리였고 장미의 팔을 쥔 손에 힘이 실렸다. 그때 오른쪽 사내가 말을 받았다.
"넌 재수없는 날이겠지만 우린 대박을 터뜨린 날이야,
팔자가 펴진 날이라고,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바로 이런 때를 말하는 것 같구만."
사내의 목소리도 들떠 있었다.
골목 밖으로 나왔을 때 왼쪽 경찰이 손을 떼었다.
그리고는 앞장서 가면서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 차 갖고 올테니까"
"서둘러."
오른쪽 경찰이 아직도 들뜬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녁 무렵이어서 주위는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차도에는 차가 꽉 차 있었고 인도의 행인들도 많아서 둘은 길가로 비껴섰다.
그때였다.
장미는 뒤쪽으로 사내 하나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선글라스를 끼었고 키가 컸다.
그리고 어딘가 낯이 익었다.
뒤쪽으로 지나가는 것 같았던 사내가 갑자기 손을 치켜들더니
수도로 경찰의 뒷목을 내려쳤다.
"억!"
앞으로 엎어지면서 경찰은 그렇게 신음을 뱉었다.
장미는 그대로 서 있었는데 사내가 손을 뻗어 팔을 쥐었다.
"뛰어!"
그리고는 장미를 잡아 끌고 골목 안쪽으로 뛰었다.
장미는 따라 뛰었다.
장미 인생에서 이만큼 전력을 다해서 뛴 적은 없다.
운동회에서 달리기 할 때도 이러지 않았고 수능 볼 때도 이만큼은 안 뛰었다.
골목 안에서 다시 다른 골목으로, 그래서 뒷길로 나왔다가 다시 큰길을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나왔을 때까지 5분은 더 뛰었을 것이다.
마침내 멈춰 섰을 때 장미는 쇳소리를 내며 숨을 뱉었다.
그때 옆으로 승용차 한 대가 다가와 섰고 사내는 차 문을 열었다.
"자, 타!"
사내가 소리치듯 말했을 때 장미는 주춤대며 시선을 들었다.
아직 사내하고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사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때 사내가 다시 소리쳤다.
"난 경찰 아냐! 어서 타라니까!"
장미는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사내와 함께 뒷좌석에 올랐을 때 차는 맹렬한 엔진음을 내며 차량 사이로 끼어들었다.
"누구세요?"
아직도 가쁜 숨을 고르면서 장미가 선글라스에게 물었다.
고맙다는 인사부터 할까 하다가 우선 신분부터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불안감은 덜 가셨다.
그때 선글라스가 장미를 똑바로 보았다.
"살인 용의자에다 강도, 인터넷 사기, 거기에다 고속버스, KTX를 휩쓸고 다니면서
마취제를 먹이고 절도."
선글라스가 얼굴에서 선글라스를 벗었다.
"경찰서에서는 원더우먼이라고 별명을 붙였더군."
"아."
그 순간 장미가 눈과 입을 딱 벌리면서 사내를 보았다.
기억이 난 것이다.
KTX. 약을 먹이고 이놈한테서는 750만원을 털었다.
사채업자의 수금사원, 이름이 외우기 쉬운 두 자였다.
뭐더라?
1초도 안되는 순간에 장미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이다.
그때 강한이 쓴웃음을 지었다.
"기억이 나는 모양이군. 살인범이."
"난 살인범 아냐."
장미가 반박했으나 목소리는 약했다.
차는 올림픽대로로 들어서더니 미사리 쪽으로 속력을 내어 달려가기 시작했다.
"자, 어쨌든 인사는 받자."
강한이 장미를 쏘아보며 말했다.
"내가 경찰 뒷머리를 쳐서 기절시키고 널 빼냈다.
이유를 말하기 전에 그 인사부터 받아야겠다."
"왜?"
했다가 장미는 어금니를 물었다가 풀고나서 대답했다.
"고마워."
"반말을 해?"
와락 강한이 소리치자 장미는 또 어금니를 물었다 풀고 대답했다.
"요."
"그럼 이번에는 내가 왜 널 경찰한테서 빼냈는지 물어. 반말 말고."
강한이 말했으므로 장미가 시선을 들고 똑바로 보았다.
지난번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다.
눈빛이 사나워서 잘못 말했다가 대번에 한 대 맞을것 같다.
지난번에는 수줍고 좀 덜 되어 보였었다.
그것에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는 것까지 기억났다.
아직도 강한이 시선을 주고 있었으므로 장미가 물었다.
"왜 빼내 준거…죠?"
"내가 사채업자 수금사원이다. 돈 받는데는 전문가지."
그때 운전을 하던 사내가 픽 하고 웃었으므로 잠깐 말이 끊겼다.
운전사의 뒷통수를 흘겨본 강한이 말을 이었다.
"네가 달려가면 내 돈 받기가 어려워 지는 것이 첫째 이유고."
"둘째도 있어…요?"
장미는 불쑥 그렇게 묻고나서 스스로의 분위기가 안정되어 간다는 것을 자각했다.
강한의 태도가 사나웠지만 악랄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위기에서 구출해 준 것이다.
따라서 강한도 공범이 되었다. 그때 강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장미를 보았다.
"둘째는, 아니, 이게 첫째가 되겠구만. 날 병신으로 만든 대가를 줘야지.
내가 약 먹고 KTX에서 뻗어있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니까."
강한이 장미에게 얼굴을 바짝 붙였다.
"어떻게 대가를 치러야 하냐고 물어봐."
"말해요. 그냥."
"우선 널 한번 따먹고."
그랬다가 강한이 머리를 저었다.
"아니, 그건 나중으로 미루지. 별로 맛도 없게 생겼으니까."
"보기만 하고 어떻게."
그 순간 장미는 왼쪽뺨에 불이 번쩍 일어나는 느낌을 받았다.
머리가 시트에 부딪쳤다.
강한한테 귀싸대기를 맞은 것이다.
장미가 번쩍 머리를 들고 입을 딱 벌렸을 때 반대쪽 뺨에서 불꽃이 일어났다.
다시 머리를 시트에 박은 장미가 눈을 크게 떴지만 입이 열리지는 않았다.
기가 죽은 것이다.
강한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고 표정도 차분했다.
그러나 왠지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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