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취산(鷲山)의 맹세 11
양 도령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앉았던 성보가
문득 입가에 알 수 없는 웃음을 띠며 이르기를,
“엊그제 소인이 밖에 나가 천문을 보았는데 토성이 달을 범하고 패성이 동방에 나타나
깜빡거리는 것이 곧 국상이 있을 징조입니다.”
하고서,
“이는 아마도 왕실에서 가장 연로하신 태후께서 돌아가실 조짐인 듯하니
국상이 끝난 뒤에 일을 보시면 한결 수월하리이다.”
하고 조언하였다.
뜻밖의 말에 양 도령이 깜짝 놀라,
“그게 참말인가? 참말 별궁 노태후께서 돌아가시겠는가?”
동시에 성보를 보고 물으니 성보가,
“아마 그렇지 싶습니다요.”
하고서,
“그 시기는 딱히 못박아 말씀드리기 어려우나 제 소견으로는 대략 내달 중순경일 듯합니다.”
하였다.
용춘은 성보의 말을 철석같이 믿는 사람이라 팔순에 이른 별궁의 노태후가
너무 오래 살았노라 말하고,
“나하고는 당최 불상득한 어른이었네.
그 어른 하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인숭무레기들이 날뛰었나.
백반이나 죽은 노리부의 세도도 결국은 그 어른한테서 나온 것이요,
지금 나의 백모인 왕태후가 할머니 사도 태후에게 함부로 굴 수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뒤에 그 어른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지. 어디 그뿐인가.
내 아버지 진지대왕께서 불충하고 사악한 무리의 모함을 입고 폐위라는
전인미답의 수모를 겪게 된 이면에도 별궁 노태후의 입김이 가장 크게 미쳤으니
내가 지금 왕실에 있지 아니하고 취산 몽암에서 살게 된 까닭도 실상은 그 어른 덕택이네.”
하며 증조모 입종비와 자신의 악연을 늘어놓은 후에,
“잘 가시네. 이제 신라 왕실에도 한줄기 서광이 비치는 것 같으이.”
하고 마치 당장이라도 국상이 난 것처럼 말하였다.
이날 삼자가 밤을 꼬박 새우고 새벽녘의 닭 울 무렵까지 이런저런 얘기로 정담을 나누어도
피곤한 줄을 몰랐다.
초저녁에 일찍 자러 갔던 한돈이 혼자서만 한숨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니
아직도 옆방에서 얘기 소리가 들리는지라,
“저 양반들이 장히 일찍도 일어났네.”
하고서 신을 찾아 신고 서현의 방으로 건너와 차려놓은 술상을 보고는,
“소인도 진작에 좀 깨우시지요. 목이 마르던 차에 잘됐습니다요.”
하며 답삭 상 한쪽을 차고 앉았다.
“그래, 봉화 오른 곳을 가보니 어떻던가? 어찌하여 봉화가 올랐어?”
용춘이 빙긋이 웃으며 물어 한돈이 겸연쩍은 낯으로,
“에이, 왜 자꾸 남의 아픈 곳을 건드리십니까요.”
하며 머리를 긁적이자,
“자, 우리는 이제 파장이니 자네 혼자 실컷 들게나.”
하고 자리에 벌렁 드러누웠다. 이에 서현도 덩달아,
“나도 그만 눈을 좀 붙여야겠네.”
하고 용춘의 옆자리에 등을 붙이고 눕자
한돈이 자작으로 술을 잔에 따르다 말고 홀연 머쓱하여,
“하면 날밤을 꼬박 새웠던가?”
성보를 향해 물었다. 성보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그럼 천천히 건너오십시오. 소인도 제 방으로 건너가서
눈을 좀 붙여야 아침에 지혜 아가씨 심부름을 하지요.”
하며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므로 한돈이 혼자 망연자실 앉았다가,
“빌어먹을, 혼자서 첫새벽에 무슨 맛으로 술을 먹어.”
하고는 다시금 제 방으로 건너갔다.
날이 밝자 서현이 재너머 움막에 들러 낭지와 고우도도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금성으로 떠나는데, 한돈은 자신의 일을 꼭 살펴달라고 신신히 당부하고
지혜와 더불어 몽암에서 작별 인사를 하였으나 용춘과 성보는 산자락 밑까지
따라 내려와서 서현을 배웅하였다.
세 사람이 하산하는 길에 무력 장군의 묘 앞을 지나치게 되었는데 앞서 가던
용춘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성큼성큼 봉분 앞으로 걸어가서,
“신라왕 사륜의 독생자 용춘은 무력 장군의 영전에 엎드려 고합니다.
서현과 용춘, 저희 두 사람은 각기 신라국과 가락국의 왕실 자손으로 태어나
선대의 인연이 이미 깊고 위중한 것을 들어 알고 있거니와,
이제 다시금 저희 두 사람이 선대의 높은 뜻을 받들어 금일 이후로는
형제와 같은 정으로 생세지락을 함께하려 합니다.
음부에 계신 장군의 넋이 있다면 저희 두 사람의 우정이 이승을 하직할 때까지
변치 말게 하시옵고 저희 두 사람의 친교가 나라와 백성의 앞날에 큰 보탬이
되도록 굽어살피소서.
지금 이 순간 후로 용춘은 서현을 일생의 벗으로 삼아 평생토록 받들고 신의를 지키겠나이다.
만일 이 맹세를 저버린다면 장군의 노여움과 양국 열성조의 저주를 한몸에 받아 간과 뇌를
땅에 쏟고 처참히 죽도록 하여주소서.”
말을 마치자 두 번 절하고 물러나니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성보가
문득 눈에 눈물이 글썽하여 서현을 쳐다보며,
“소인 같은 것이 감히 무력 장군의 능에 절하여 뵈어도 되겠는지요?”
하고 물었다.
서현이 온화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성보가 용춘을 흉내내어 묘 앞에 두 번 절하고 일어나,
“간밤에도 내내 그 생각을 하였습니다만, 소인은 아시량국이 신라에 망한 후로 하늘에 대고
탄식과 원망만 늘어놓았을 뿐 한 번도 이 나라를 위해 제가 배운 재주를 써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오나 어제 오늘, 두 분 도련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뵙고 그만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소인은 앞으로 오직 두 분 도련님을 위해서만큼은 저의 가진 재주를 아낌없이 바칠 것인즉,
도련님들께서는 부디 저를 물리치지 마시고 가까이 두어 수족처럼 부려주시기 바랍니다.
보잘것없는 재주일망정 기꺼이 마소의 도리를 다하겠습니다요.”
서현과 용춘을 번갈아 바라보며 감격하여 말하므로 그 말을 들은 두 사람이
동시에 천군만마를 얻었다며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헤어질 무렵에 서현이 용춘의 손을 마주잡고,
“숙흘종 어른을 만나는 일은 내가 알아 할 터이니 자네는
간밤에 나눈 얘기를 잘 생각하여 모쪼록 세상에 나와서 금왕을 도왔으면 좋겠네.”
하자 용춘이 빙긋 웃으며,
“내 뜻은 지난밤에 자네의 말을 들으며 이미 바뀌었네.”
하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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