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매 (195)
일장춘몽 26회
관기 응모자들의 면접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오자,
영아는 양부모 몰래 이것저것 가출 할 채비를 했다.
그리고 집을 떠나는 전날 밤 그녀는 서찰을 적었다.
서찰에다가 집을 떠나는 까닭을 밝히지는 않았다.
그저 허락을 받지 않고 몰래 뛰쳐나가는 이 불효 여식을 용서해 달라고,
후일에 반드시 무엇 때문에 가출을 했는지 그 까닭을 아시게 될 날이 있을 터이니,
너무 꾸짖지 말아달라고 적었다.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 다시 두 분을 뵈옵지는 못할 것 같으니,
아무쪼록 몸 강녕(康寧)하시어 오래오래 사시라고 끝을 맺었다.
서찰을 적고나서 영아는 서럽게 흐느껴 울었다.
오년동안 정을 붙이고 살았던 양부모의 슬하를 떠나는 섭섭함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번 가출이 자기로사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목숨을 걸고서 떠나는,
어쩌면 이승에서의 마지막 길인지도 모를 일이어서 비장한 각오와 함께
처연한 슬픔이 가슴에 서리기도 했던 것이다.
관기가 되든 그냥 기녀의 길로 들어서든 좌우간 서문경에게 접근해서
그를 해치우고난 뒤 무사히 도망치지 못하고 붙들렸을 경우에는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할게 뻔하지 않은가 말이다.
이튿날 날이 밝기 전에 영아는 서찰을 양부모가 자고 있는 방 바로 문짝에 반듯하게 놓아두고,
작별의 큰절을 하고서 집을 떠났다.
그리고 그날 국주라는 가명으로 관기에 응모하여 아슬아슬하게 채용이 되었을 뿐 아니라
재수 좋게도 바로 서문경이를 곁에서 모시는 몸종이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원수를 쉽사리 갚을 수 있도록 하늘이 돌봐준 것만 같아 속으로 무척 기뻐하며,
소조라는 기명으로 바뀐 그녀는 우선 겉으로는 고부고분하고 나긋나긋하게
충성을 다하는 척해서 서문경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노력해 온 것이다.
그러면서 이제 구체적으로 어떻게 복수를 할 것인지,
그 방법을 궁리해 보고 있는 중이었다.
어느 날 밤,
소조는 자기 방에 혼자 앉아서 뜨개질을 하며 혹시나 서문경이가
동침을 요구해 오지나 않을까 하고 방법을 궁리 중이면서도,
밤이 깊어지면 이상하게도 그의 벌건 몸뚱이가 눈앞에 어른거리면
야릇한 갈증 같은 것이 간절하데 느껴지곤 하는 것이었다.
묘한 이중심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여자의 애원하는 듯한,
그러면서도 반항하는 것도 같은 그런 목소리가 거실 족에서 들려왔다.
소조는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얼른 뜨개질을 멈춘다.
그리고 무슨 일인가 싶어서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일장춘몽 27회
“아이고 나릿님들, 부디 이러지 말아 주세요.
전 그런 여자가 아니란 말이에요. 알겠어요?
죄가 있으면 벌을 주면되는 것이지,
남편이 있는 여염집 여자를 이러는 법이 어디 있어요.
더구나 제형소에서···”
여자의 목소리였다.
“닥치지 못해! 말을 안 들으면 재미없다는 걸 알아야 돼”
“전옥 대감임이 계시기 때문에 하소연을 하는 거잖아요.
전 창녀가 아니니까, 절대로 제 몸에 손을 대지 마시라구요”
“아니, 이년이 간뎅이가 부었어”
냅다 그만 한 관원이 여자의 뺨을 한 대 올려붙이는 소리가 난다.
“때리진 말라구. 색시, 내가 말이야 낮에 옥엘 갔을 때 색시가 대끔 눈에 띄더라구,
보기 드문 미색이지 뭐야. 그래서 사랑을 해 볼려고 부른 건데,
뭘 그렇게 뻣뻣하게 나오는 거지?”
서문경의 목소리다.
소조는 어이가 없다.
붙들려 와서 옥에 갇힌 여자 미결수를 끌어다가 강제로 데리고 자려는 수작이 아닌가.
“전옥 대감님, 아무리 그렇지만 남의 유부녀를 함부로 이럴 수가 있는 거예요?
더구나 법을 집행한다는 제형소에서 말이에요.
전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구요”
“뭣이 어쩌고 어째?”
그만 서문경이가 벌컥 화를 내며,
“그년을 홀랑 벗겨”
“하고 부하 관원에게 이른다. 곧,
“아이고- 이게 무슨 짓들이야? 어머 어머 나 몰라-”
여자가 냅다 비명을 지른다.
그러나 사정없이 입을 틀어 막혀 버린 듯 여자의 몸부림치는 기척만이 들린다.
“저리 침실로 갔다가 눕혀. 그리고 팔다리를 침상에 묶으라구”
시키는대로 발가벗긴 여자의 알몸뚱이를 두 관원이 침실로 끌고 들어가는 모양이다.
소조는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발딱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얼른 거실로 통하는 문 쪽으로 사거 빼꼼히 문짝을 열고 그쪽을 훔쳐본다.
아니나 다를까, 벌거숭이가 된 여자를 개 끌듯이 침실로 끌고 들어가 우격다짐으로 침상에 눕힌다.
서문경이는 뒷짐을 지고 서서 재미있다는 듯이 지켜보고 있다가,
“어서 팔다리를 침상에 묶어. 꼼짝 못하게···”
하고 재촉한다.
일장춘몽 28회
두 관원이 여자의 팔과 다리를 어거지로 활짝 벌려서 침상의 모서리에 묶는다.
그래 놓으니까 마치 여자의 알몸뚱이가 침상 위에 사지를 시원하게 내던지고
큰댓자로 누워있는 것처럼 되었다. 입에는 수건으로 재갈이 물려 있다.
"됐어. 멋지게 됐다니까. 이제 제깐년이 도리가 없겠지. 허허허···"
서문경이는 기분이 매우 좋은 듯 여자의 알몸뚱이를 내려다보며
능글능글한 웃음을 터뜨린다.
그리고 두 관원에게 말한다.
"수고들 했어. 이제 됐으니까 밖에 나가 대기하고 있으라구.
이년이 또 어떤 발악을 할지 모르니까"
두 관원은 침실에서 물러나온다. 그리고 침실 문이 닫힌다.
소조는 의분 같은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고, 조그마한 두 주먹을 발끈 쥔다.
생각 같아서는 당당 식칼이라도 들고 뛰어 들어가서 냅다 서문경이란 놈을
콱 찔러 죽여 버리고 싶다.
정말 짐승보다도 못한 놈이 아닌가.
제형소의 우두머리인 전옥이라는 놈이 남의 유부녀를,
아무리 죄를 짓고 붙들려 들어왔다고는 하지만
강제로 발가벗겨서 묶어놓고 겁탈을 하다니,
불한당 중에서도 악질 불한당이 아니고 무엇인가.
더구나 부하 두 녀석을 밖에 대기시켜 놓고서 그러다니ㅡ
전옥 대감으로서의 체면이고 나발이고 아무 것도 없는 놈이 아닌가.
이제 보니까 관원이라는 것들이 순 화적패 같질 않은가 말이다.
소조는 그저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다.
서문경은 침상에 큰댓자로 묶어놓은 그 여자를 유유히 덮쳐서 헉헉거리며 짓뭉개었다.
그렇게 어거지로 여자의 몸뚱어리를 즐기는 것도 색다른 묘미가 있어서,
한번으로 그치질 않고, 두 차례나 설쳐댔다.
말하자면 강간을 한 셈인데, 외도 이십년에 처음 일이었다.
그러고 나서 서문경은 두 관원을 불러들여 여자의 팔다리를 풀게 해서
도로 끌고가 옥게 집어넣어 놓도록 일렀다.
데리고 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다가 그 독한 계집에게 어떤 변을 당할지 모르니 말이다.
장죽산에게 개가한 이병아를 어거지로 정복하려다가
불알을 당했던 일이 생각나기도 했던 것이다.
이튿날 그 소문은 제형소에까지 은밀히 퍼졌다.
홍아각 안의 관기들과 다른 종사자들은 이미 밤에 낌새를 다 눈치 채고 있었고,
제형소에는 서문경이 시키는 대로 여자 미결수를 끌어다가 침상에 묶었던
그 두 관원의 입에서 발설이 되어 수군수군 퍼져나갔다.
전옥 대감이 색골 중의 색골이라더니 과연 그렇구나 하고 모두 혀를 내둘렀다.
관기들도 오후의 한가한 시간이 되자 모여앉아 그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무론 소조도 그 속에 섞여 앉아 있었다.
일장춘몽 29회
이러쿵 저러쿵 얘기들을 나누다가 한 관기가,
“그럴 경우에는 미약(媚藥)을 쓰면 되는 건데···”
하고 말했다.
양향(良香)이라는 계집애였다.
“미약이 뭔데?”
소조가 무심히 물었다.
“미약을 모르는구나.
미약이라는 것은 말이야 뭔가 하면,
남자가 먹으면 여자 생각이 나서 못 견디고,
여자가 먹으면 남자 생각이 나서 못 견디는 그런 약이라구”
“어머, 세상에··· 그런 약이 다 있어?”
소조는 눈이 휘둥그레진다.
다른 관기들도 거의가 처음 듣는 듯 신기한 표정들을 짓는다.
어떤 계집애는 서슴없이 내뱉는다.
"그 약 나도 한번 먹어봤으면 좋겠다. 어디서 팔지?
그러자 한 계집애가 얼른 말을 받는다.
“왜? 그런 약 안 먹으면 남자 생각이 안나?
내사 그런 약 안 먹어도 남자 생각이 너무 나서 죽겠더라”
모두 재미가 좋아서 못 견디겠는 듯 하하하··· 히히히··· 웃어 제낀다.
웃음이 가라앉자,
다시 양향이가 입을 연다.
“어젯밤에 말이야 그 여자한테 미리 그 약을 먹였더라면,
이이고 대감님, 어서 저를 안아 주세요,
하고 오히려 못 견디며 달라 들었을 게 아니냔 말이야”
“정말 그런 약이 있을까”
소조는 미심쩍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인다.
“있다구. 난 본 일도 있단 말이야”
“정말?”
“정말이라구”
“어떻게 생겼어? 보니까···”
“환약 같은데, 끝에다가 금칠을 했는지 누렇게 번쩍거리더라구”
“어머”
“그런데 말이지 그 약을 먹으면 몸에는 해롭다는 거야.
그럴 거 아니겠어.
자꾸 생각이 나서 자주 해대면 몸에 이로울 게 뭐 있겠어.
계속 복용하면 중독이 돼서 안 먹고는 못 배긴다는 거야”
“아편 같은 거구먼, 말하자면···”
“그렇지, 아편 같은 건데, 특별히 성욕을 돋구는 약이지.
그 약을 먹고 하면 기가 막히게 좋다는 거야”
그러자 계집애들이 나도 먹어봤으면,
나도··· 하고 떠들어대며 또 킬킬킬 켘켘켘 웃는다.
소조도 헤죽헤죽 웃고 나서,
“그럼 그 약을 많이 먹으면 어떻게 되지?”
하고 묻는다.
일장춘몽 30회
“한번에 한 알씩 먹는데,
만약 두알 세알을 먹으면 입이 비틀리고, 손발이 마비된다지 뭐야”
“그렇다면 더 많이 먹으면 목숨도 위태롭겠네”
“물론이지. 대여섯 알을 한꺼번에 먹으면 눈깔도 뒤집혀서 죽고 만다는 거야”
“어머나, 그렇구나”
소조는 놀란다.
그러나 속으로는 옳지,
바로 그거로구나, 싶다.
독살용(毒殺用)으로 십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한 계집애가 약간 장난기 어린 그런 어조로 말한다.
“자살할 때 그 약을 먹으면 좋겠는데···
아주 기분 좋게 죽을거 아니냔 말이야. 안그래?”
“왜, 죽어야 될 일이라고 있어?”
양향이 역시 농담조로 묻는다.
“죽어야 될 일은 없지만, 난 때때로 죽고 싶을 때가 있다구. 그약 어디서 팔지?”
“파는 약이 아니라구”
“그럼?”
“몰래 주문을 하면 특별히 만들어 준다구.
아주 비싸지. 나라에서 금하고 있는 약이거든”
“아, 그래?”
가만히 듣고 있던 소조가 불쑥 묻는다.
“비싸다니, 얼마나 하는데?”
“확실한 값은 모르지만, 좌우간 엄청나게 비싸다고 들었어”
“월급 한 달치면 안될까?”
“글쎄··· 왜? 정말 사려고 그러는 거야?
그 약을 사먹었다가는 국법을 어기는 셈이니까 붙들려서 옥에 갇힌다구. 알겠어?”
그러자 한 계집애가 또 장난삼아 지껄인다.
“소조가 옥에 갇히면 전옥 대감님이 봐주겠지 뭐. 우린 안 봐주더라도··· 안그래?
옆에서 늘 곰실곰실 나긋나긋 시중을 달 드니까”
그 말에 모두 또 웃어댄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 소조는 그 미약이라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양향이를 잘 구워삶으면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그 미약을 어떻게 사용해서 서문경이를 살해할 것인지,
궁리를 거듭했다.
어쩌면 감쪽같이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자기가 죽인 게 아니라,
서문경이가 스스로 그 약을 과용해서 죽은 것처럼 일을 꾸밀 수가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런 생각에 이르자,
소조는 혼자서 속으로 쾌재(快哉)를 불렀다.
잘만 하면 자기는 조금도 의심을 받지 않고,
깨끗이 복수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말하자면 완전범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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